<그림 :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중 하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시인부락》(1936)
<시어 풀이>
비명(碑銘) : 비석에 새긴 글자.
빗돌 : 비석, 돌로 만든 비
노고지리 : ‘종다리’의 옛말.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생명력 넘치는 시어와 단호한 명령형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죽음을 넘어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작품을 고려해 볼 때, ‘죽은 청년 화가 L’은 이 시의 화자로 보여진다. 따라서 화자는 이 작품에서 비명이라는 극한 상황을 설정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강렬하게 표출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의 부제의 ‘L 청년 화가’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로 짐작된다. 그 이유로 그는 해바라기를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으로 여기고 많은 작품을 그려 소위 ‘해라기 연작’(11점)을 탄생시켰으며, 격정적으로 살다가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삶을 마쳤기 때문이다.
이제 작품을 들어가 보자. 모두 다섯 문장으로 유언 형식으로 된 이 시는 행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점층적 전개를 보이면서 대립적 이미지와 색채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1행에서 청년화가인 ‘나’는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말로 죽음을 거부한다. ‘차가운 빗돌’은 앞의 ‘무덤’과 함께 정열이 사라진 상태, 즉 죽음을 의미한다.
2행에서는 1행과 대조를 이루어 그 대신 무덤 주위에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한다. 여기서 해바라기는 향일성(向日性) 식물로 정열을 상징하는 것으로, 1행의 ‘차가운 비ㅅ돌’과는 대조된다. 그러므로 해바라기를 심어덜라는 것은 죽음의 세계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태도이며, 열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화자의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인 것이다.
3행에서 화자는 해바라기가 선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고 한다. ‘보리밭’은 왕성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시어로, 즉 화자는 죽음을 넘어 자신의 푸르른 삶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4행에 와서 화자는 노란 해바라기를 정열적인 태양과 동일시하여 해바라기에 대한 화자의 열정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5행에 와서 푸른 보리밭 사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노고지리’를 내세워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며 비상(飛翔)의 꿈, 즉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차가운 빗돌’로 상징되는 죽음의 이미지에, ‘해바라기’, ‘보리밭’, ‘노고지리’ 등으로 상징되는 생명을 대조시키면서 죽음을 넘어선 정열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해바라기의 비명’은 30년대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한 생명파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생명파는 서정주가 중심이 되어 창간한 시 전문지 《시인부락》의 동인들이 대체로 이러한 경향을 보였는데, 주요 작가로는 서정주, 함형수, 김동리, 오장환, 김광균 등이 있다.
시인. 함북 경성 출생. 《시인부락》 동인. 서정주, 김동리를 알게 되어 문학에 입문한 것을 계기로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이 되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중퇴하고 만주로 건너가 도문공립백봉우급학교에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당시 고향에 머물러 있었으나 심한 정신착란증으로 시달리다가 사망하였다.
≪시인부락≫과 ≪자오선≫에 〈해바래기의 비명(碑銘)〉, 〈형화(螢火)〉, 〈홍도(紅桃)〉, 〈무서운 밤〉, 〈조개비〉, 〈해골의 추억〉, 〈회상의 방(房)〉 등 17편을 발표했다. 그 외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마음〉(1940)과 〈개아미와 같이〉(人文評論, 1940.10.) 등이 있다. “내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지 말고 노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는 〈해바래기의 비명〉은 그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주지적 계열의 시인으로서 사변적(思辨的)인 시를 주로 썼다.
*해설 및 정리 : 남상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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