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플라타너스 / 김현승

by 혜강(惠江) 2020. 2. 19.




플라타너스

 

                                      - 김 현 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훍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문예여름호(1953) 수록.

 

 

이해와 감상

 

 이 시는 틀이라 타 나스를 소재로 하여 감정 이입(感情移入)의 기법으로 정서를 표출해 온 우리 시가의 전통을 계승한다. 플라타너스를 단순히 식물로서 바라보지 않고, 다정한 친구에게 말을 거는 수법으로, 고독한 그러나 서로 위로하며 꿈(이상)을 향해 가는 인생의 삶을 노래했다. 김현승 시 중에서 인간의 고뇌를 노래한 제2기 작품이다.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 시에 대해 말하면서 가로수 플라타너스는 반려의 소재로 사용되기 매우 적절하다. 그 모습과 그 풍치와 그 품위 있는 무늬는 인간으로 친다면 우아한 귀족풍에 알맞다라고 한 적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외로운 나그네라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플라타너스를 고독 삶을 살아가는 반려자로 선택하여 시를 전개해 나간다.

 

 5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연마다 '플라타너스'를 되풀이하여 리듬감을 주면서 플라타너스를 인격화하고 있다. 1연에서 인간은 푸른 꿈을 가진 존재라고 인식한다. 하늘을 지향하여 서 있는 플라타너스에 화자는 꿈을 아느냐고 물어본다. 플라타너스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표현으로 인간이 꿈을 가진 존재하는 것을 말해준다. 꿈과 이상을 지닌 플라타너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2연에서 인간은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라고 하여 누군가에게 은혜(위로)를 베푸는 존재임을 말한다. 특정한 대상을 향하여 사랑과 위로, 은혜를 베푸는 존재이며, 3연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로서 플라타너스가 길을 가는 에게 반려자요, 벗이 되듯, 인간은 서로 고독을 위로하며 그 외로운 길을 동행하여 준다고 한다.

 

 제4연에 오면,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절대자가 아니므로 그러한 소망을 실현할 수 없지만, 인간은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절대자가 아니므로 고마운 벗에게 의 영혼을 불어넣어 줄 수는 없지만, 지상에 있는 동안 서로의 고독한 영혼을 달래며 겸허하게 살아가자고 한다.


 그리고 제5연에 와서 플라타너스와 화자가 우리라는 말로 동일시되면서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라고 묻는다. 영혼이 쉴 곳, 즉 영혼의 안식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킨다. 이 말은 고독한 인생길을 가는 인간이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그러면서 마지막 6연에 와서 우리는 지상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서로를 지켜주는 이웃이 되겠다며, 5연에서 제시한 질문에 답하여 죽음을 맞은 인간이 안식할 그곳‘, 다시 말해 플라타너스와 시적 자아가 영원히 같이 있을 곳,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곳은 이상과 소망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별이 있고, 또 그 이상과 소망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 열린 길’’이 있기 때문이다. ‘먼 길을 외롭게 살아온 인간에게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먼 길을 돌아온 인간에게 구원의 빛인 동시에 통로인 동시에 이것은 화자가 바라는 지향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여정은 외롭고 고독한 것이었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인의 정신은 평소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살아온 그의 종교적인 신념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이 시를 대할 때, 단순히 고독한 삶의 동반자 플라타너스를 예찬하는 시라거나, 인간의 근원적 한계인 고독을 노래한 시라고 말해 왔다. 전자는 플라타너스가 예찬의 대상이 된 것이며, 후자는 인생의 고독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플라타너스는 고독한 존재인 인간의 반려자로 선택된 제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플라타너스'라는 반려자의 존재가 그 고독을 잠시 위로해 줄 수는 있겠지만 해결자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짊어진 고독은 타자에 의하여 해결되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삶의 영원한 동반자로 생각하며,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꿈을 지니고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봄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