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구도(構圖)
- 신 석 정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어날 지구(地球)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 《조광(朝光》 (1939. 10월호)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이 발표된 1939년은 일제의 수탈이 극도에 달한 시기였다. 막다른 시대적 상황이 목가적인 시인에게도 암울한 절망 속에 빠지게 하였다. 이 시는 조국을 빼앗긴 어두운 시대에 느끼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노래한 절규에 가까운 저항시이다.
먼저 제목을 보자. 왜 ‘슬픈 구도(構圖)’인가? 나라를 잃은 백성인 ‘나’는 이미 온전한 생명을 가진 존재일 수 없다. 따라서, 납작한 평면적 ‘구도’ 속에 갇힌 ‘그림’ 속의 ‘나’를 객관화시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슬픈 구도(構圖)’는 식민지 지식인의 비극적 상황을 회화적으로 표현했으리라.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 인 ‘슬픈 구도’는 외롭고 절망적 상황이다. 이 외로움과 절망의 상황의 정체는 무엇일까. 둘째 연에 그 원인이 엿보인다. 그것은 화자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지구’ 차원의 문제이다. 2연의 내용, 즉 화자가 외로운 것은 ‘꽃 한 송이 피어’ 내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그리고 ‘노루 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모든 교감이 끊어진 공간에 화자 홀로 남겨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의 외로움과 절망감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다.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다. 그런 밤에는 ‘별’로 상징되는 이상 세계조차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극한의 절망적 상황인 것이다. 그야말로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이다.
이 작품은 비교적 짧고 형태상으로도 단순하다. 그러나 반복과 열거, 점층적 표현을 통해 현실의 절망감을 더욱 심화시켜 표현은 더욱 뚜렷하며 강렬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런 표현 방법은 일제의 억압이 가중되는 시기의 절망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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