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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by 혜강(惠江) 2020. 2. 16.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 석 정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고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 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조선일보(1933.11.30.)


 <시어 풀이>

어머니 : 사랑의 화신인 절대자

녹색 침대 : 푸른 잔디

 

 

이해와 감상

 

 1933조선일보에 발표되었으며 1939년 인문사(人文社)에서 발행한 시집 촛불에 수록되었다. 320행의 자유시로 한국시의 높은 격조의 아름다운 시 율조를 보여준다. 그리고 자연을 절대적 가치를 지닌 이상적 모델로 삼아 어머니를 청자로 설정하여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아들의 목소리 형식을 취하여 자연에 대한 동경과 동일화의 소망을 긴 호흡의 리듬을 구현하여 낭만의 세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통일된 심상, 비교적 긴 호흡의 명상적 리듬, 차분한 정서로 자연 친화적인 심정이 잘 표출되고 있는 전형적인 목가적(牧歌的)인 서정시다.

 

 1연에서는 사라져가는 저녁 해가 아직 남아 있는 배경이 제시된다. 그러나 명상(冥想)의 새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오기 때문에 아직 촛불을 켜지 말라는 부탁을 어머니에게 드린다. 2연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저녁 해 속에서 공존하는 것들에 대한 유대감이 나타난다. 1연이 주로 하늘과 관련된 공간에 대한 것이라면 2연에서는 지상과 관련된 공간에 대한 내용이 펼쳐진다. 3연에 이르러 시간은 보다 더 늦어지지만, 아직 촛불을 켜지 말라는 부탁은 지속된다. 촛불을 켜지 않은 상황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마지막 행에서 이윽고 나타난 별을 바라보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것은 이상향(아름다운 전원)에 대한 동경이거나 전원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편의 동양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을 노래하는 주체는 혼자 있는 주체가 아니라 가족이 모여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사는 동양적 삶을 보여 준다. 이상향의 여러 표상들과 생명의 요람인 어머니의 이미지가 결합되면서 공동체적 삶 속에서 추구하는 평화로운 세계가 표현되었다.

 

 신석정은 어린 시절 당시(唐詩)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것이 단순하게 외국 문학의 영향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 근대 서정시의 전통과 시 정신을 새롭게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촛불도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밝은 이미지를 나타내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나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그것이 자연과의 유대감을 저해하는 요소에 착안하여 신석정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신석정의 시는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주는 강한 인상을 동양적 서정, 노장(老莊)적 초탈의 자세로 노래하여 독특한 미감을 아로새긴다.

 

 

작자 신석정(辛夕汀, 1907~1974)

 

 전북 부안 출생. 본명 석정(錫正). 부안 출생.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1930년 서울로 올라와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아 1년 동안 불전을 배웠으며, 이때 회람지 원선(圓線)을 편집했다. 6·25전쟁 뒤 태백신문사 고문을 지냈고, 전주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전북대학교에서 시론을 가르쳤다. 그 후 김제고등학교 교사, 1963년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24년 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시 기우는 해를 발표한 뒤, <선물>(시문학,1931)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문예월간, 1932) 봄의 유혹(동방평론, 1932) 등 초기에는 목가적인 전원에 귀의하여 생()의 경건한 기쁨과 순수함을 노래했다. 그뒤 잡지 시원》 《조광등에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을 펴냈고, 19472번째 시집 슬픈 목가를 펴냈다. 시집 슬픈 목가1935~43년에 쓴 시 33편으로 꾸며졌다. 6·25전쟁 이후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그밖에 시집으로 빙하(氷河)(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 등을 펴냈는데, 이중 산의 서곡은 이전의 시풍과 달리 현실과의 갈등을 노래한 시들로 꾸며졌다. 저서로 중국 시집(1954) 매창시집(1958)과 이병기(李秉岐)와 함께 펴낸 명시조감상(1958) 등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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