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교역 광장에 벌교의 상징과도 같은 꼬막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읍내 어느 골목을 걸어도 꼬막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찾을 수 있다.
▲보성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벌교꼬막빵집의 꼬막빵.
역 앞에서 골목 하나를 통과하면 ‘태백산맥길’이다. 여행객을 위해 일부러 조성한 길이 아니라 법정 도로 명칭이 그렇다. ‘만화세상’ ‘국제세탁소’ 등 허름한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간판도 있고, ‘아즘찬이’ 카페와 보성군 특산물 판매장 ‘매시랍게’ 등 지역 정서가 듬뿍 담긴 간판도 눈에 띈다. ‘아즘찮다’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알맞다’는 뜻이고, ‘매시랍다’는 ‘일하는 것이 빈틈없고 야무지다’는 의미의 전라도 말이다. ‘개구리문구점’ ‘크레파스미용실’도 정겹다.
건물 외관을 근대식으로 단장한 골목에서 상징적인 건물이 ‘보성여관’이다. 1935년에 지어 한옥과 일식이 결합된 2층 목조건물로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묘사된다. 개관 당시에는 5성급 호텔에 비유할 정도였다지만 세월이 흘러 살림집과 상가로 이용하다, 2012년 문화재청과 보성군이 ‘보성여관’으로 복원해 현재 온돌방 7개를 갖춘 숙박업소로 활용하고 있다. 투숙객이 아니어도 입장료 1,000원을 내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1층에는 벌교와 건물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장과 카페가 자리한다. 조정래 작가의 집필실도 조그마하게 재현해 놓았다. 소규모 공연과 세미나실로 활용하는 2층 다다미방도 둘러볼 수 있다.
▲벌교 중심부에 위치한 보성여관.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으로 등장한다.
▲입장료 1,000원을 내면 투숙객이 아니어도 보성여관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소설에서 ‘술도가’였던 ‘정도가’는 현재 꼬막음식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식당이다. 양조장이었던 시절 사용하던 대형 옹기항아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벌교에서 가장 흔한 게 꼬막 음식 전문점이다. 정도가 역시 꼬막 요리를 주로 판매한다.
보성여관 맞은편 ‘정도가’도 소설의 무대다. 지식인 청년 정하섭의 본가로 등장하는 술도가가 있던 곳으로 현재 꼬막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으로 운영된다. 일제강점기부터 3대에 걸쳐 실제 술도가였던 식당 안마당에 당시 사용하던 대형 옹기항아리를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소설에서처럼 식당 주인이 정씨인 점도 흥미롭다.
보성여관에서 몇 발짝만 옮기면 단아한 벽돌 건물인 옛 ‘벌교금융조합’이 나온다. 1919년에 지은 건물로 소설 속 송기묵이 일제강점기부터 금융 조합에 근무해 온 이력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벌교 농민상담소로 활용하다 현재는 내부를 전시실로 꾸며 작은 화폐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벌교천변으로 나오면 소화다리다. 철근 콘크리트 교량으로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지만, 다리를 세운 1931년이 일제 치하의 소화 6년이라 누가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소화다리로 더 알려졌다. 태백산맥의 등장 인물 ‘소화’와는 상관없는 이름인데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자연스럽게 소설을 연상하게 된다. 해방정국에서 좌우가 밀고 밀릴 때마다 이 다리 위에서 총살형이 자행됐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태백산맥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담한 벽돌 건물인 벌교금융조합.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소화다리 주변 벌교천에도 태백산맥을 테마로 여러가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벌교천 강변산책로에 ‘태백산맥’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소화다리를 중심으로 벌교천에는 강변산책로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그러나 하천만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듯 갈대가 무성하고 투명하지 않은 탁한 갯물이 흐른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흐름이 바뀌는 바닷물은 소화다리 상류 홍교까지 거슬러 오른다. 세 칸의 아치를 무지개에 빗댄 이름, 홍교(虹橋)의 역사는 조선 영조에 닿는다. 그전까지 이곳에는 뗏목다리가 있었다. 벌교(筏橋)는 바로 뗏목다리의 한자 이름이다. 영조 4년(1728) 대홍수로 뗏목다리가 유실되자 이듬해 선암사 두 스님의 지휘로 공사에 착공해 6년 후에 홍교를 완공했다. 선암사 승선교 근처 홍교비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다. 지금의 홍교는 막 공사를 끝낸 것처럼 말쑥하다. 1984년 외벽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했다.
정설은 없지만 ‘벌교 주먹’도 이 다리에서 연원을 찾는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이곳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낙안 들의 곡식을 외지로 실어내는 곳이었으니 돈이 넘치고, 사람이 몰리고, 자연스레 조직폭력배도 꼬였다는 게 ‘벌교 주먹’에 얽힌 첫 번째 설이다. 시장통에서 횡포를 부리는 일본 순사를 한 방에 때려 눕힌 전설적 인물 안규홍이 두 번째 설이요, 그악스럽던 일본 순사나 조폭도 꼬막만은 뺏어가지 못했는데, 벌교 사람들이 그만큼 억척스러웠다는 게 세 번째 해석이다.
▲아치형 무지개다리, 벌교 홍교. 18세기 초 뗏목다리가 떠내려간 자리에 처음 세웠고, 1984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소설 속 ‘김범우의 집’. 성채 같이 높은 담장만 봐도 저택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 ‘김범우의 집’ 대문.
▲‘김범우의 집’ 내부 아래채 담장은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다. 이 집에 친구가 있어 유년 시절 조정래가 자주 드나든 곳이기도 하다.
홍교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마을 언덕에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이 있다. 이 집은 실제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다. 높은 담장이 성곽처럼 둘러진 집안에서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일대에서 곡창이라 할 고읍 들과 낙안 들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나무에 가려져 있다. 대문과 중문을 차례로 지나야 본채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집이지만, 현재 아래채 담장은 허물어지고 창호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방치돼 있어 폐가처럼 보인다. 네 살부터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벌교에서 살았던 조정래 작가는 이 집 문간방에 친구가 있어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당시로선 구경조차 힘든 쌀밥 누룽지에 설탕을 뿌려 간식으로 주었다니, 친구보다 간식에 더 빠졌을 법하다.
소설에서 ‘김범우의 집’과 대비되는 집이 ‘현부자네 집’이다. 이곳에서는 간척으로 새로 생긴 중도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본래 박씨 문중 소유인 이 집은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특이한 구조다. 대문 위에 유리 창문으로 둘러진 누각이 얹혀 있고, 한옥을 기본 틀로 삼은 본채도 일본식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소화의 집’이 있다. 소설을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꾸민 유일한 구조물이다.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도 이곳에 있다. 생존 작가인 만큼 조정래 개인보다는 ‘태백산맥’에 중점을 둔 문학관이다. 전시관 2층에 관람객이 이어 쓴 필사본이 키보다 높이 쌓여 벽을 이루고 있다.
▲소설 속 ‘현부자네 집’. 실제는 박씨 문중 소유다. 대문 위에 창문을 갖춘 누각이 얹혀 있다.
▲현부자네 집과 태백산맥 문학관 사이에 있는 소화의 집. 벌교에서 유일하게 소설을 바탕으로 일부러 지은 집이다.
홍교에서 벌교천 하류까지는 ‘중도방죽’으로 이어진다. 중도(中島)는 일제강점기 제방 건설을 지휘한 일본인 나카시마를 이른다. 조정래는 소설에서 방죽을 쌓은 조선인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개돼지 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 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놈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쩌겄소.’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 밴 중도방죽 습지에는 지금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갈대 꽃이 눈부시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목재 산책로 주변으로 가을이 절정이다.
▲중도방죽 안쪽 갯벌에 갈대가 하얗게 피어 있다.
태백산맥만큼 소설 같은 이야기, 부용산 노래비
벌교읍 행정복지센터 옆에서 산자락으로 ‘부용산 오리길’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부용산은 해발 100m에 불과한 동네 뒷산 수준인데, 길섶에 세워진 ‘부용산 노래비’는 태백산맥만큼 소설 같은 사연을 품고 있다.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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