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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서재필기념공원, 서재필 선생은 개화기에《독립신문》을 발간한 선각자였다.

by 혜강(惠江) 2019. 6. 6.

 

보성 서재필기념공원 탐방

 

서재필 선생은 개화기에

《독립신문》을 발간한 선각자였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서재필, 1898.10.16자 독립신문 논설)

 

 

 

글․사진 남상학

 

 

 

 태백산맥문학관 탐방을 마치고 보성 북부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보성군의 북부 지역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신문》을 제작한 서재필기념공원, 천년고찰의 대원사, 향토작가 전시관인 백민 미술관, 주암 호반, 그리고 승주 고인돌공원이 있어 이들을 연결한 교육문화관광코스로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주암호의 멋진 풍광

 

 

  서재필 기념공원은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1024 / 061-852-2815에 있다. 서재필기념관공원은 국도 15번과 18번이 만나는 보성 북부 주암호 부근에 있다.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달리다보면, 도로 위에 멋진 아치형 다리을 만나게 된다. 그 다리 양쪽이 서재필기념공원과 조각공원이다.

 

 

 

 

▲아치형 구름다리가 조형물처럼 멋있다.

 

 

서재필기념공원

 

 

 

▲서재필기념공원 안내도

 

 

 

 이곳은 주암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강건한 삶을 살았던 독립투사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1864~1951) 선생의 유혼이 머무는 공간이다. 서재필 선생이 태어난 문덕면 용암리 생가 앞에는 선생의 생전의 위업을 기리고 호국정신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4만6천㎡의 부지에 1992년 첫 사업을 시작하여 2008년까지 사당 건립, 송재로 개설, 독립문 건립을 통해 유적지로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각공원, 서재필기념관, 생가 등을 복원해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기념공원 안내도

 

 

▲서재필기념공원에 대한 설명

 

 

 기념공원 입구를 통해 들어서면 왼쪽으로 서재필기념관과 선생의 동상이 위치해 있고, 오른쪽에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을 실물크기로 본떠 만든 독립문이 있다. 

 

 

 

 

▲서재필기념관 전경

 

 

 

▲서재필 선생 동상

 

 

 

▲독립문

 

 

 

 또 앞에는 개화문이 있고, 그 뒤로 자강문과 송재사가 일렬로 서있다. 개화문을 통과하면 좌우로 선각재, 선양관이 자리를 잡았다. 가장 안쪽의 문인 자강문을 통과하면 송재사다.

 

 

 

 

▲정문격인 개화문

 

 

 

▲선각재

 

 

 

▲선양관

 

 

 

▲자강문

 

 

 

▲송재사

 

 

 

▲송재사 안에 걸린 서재필 선생 사진

 

 

 

  그런데 아쉬운 점은 기념공원이 관리가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옮겨 심은 소나무는 고사 직전이었고, 공원 구석구석이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보였다. 관리 주체의 각별한 관리가 필요함을 느꼈다.

 

 

서재필기념관

 

 

 

 경내를 둘러보고 서재필 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서재필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 들어가면 그의 삶의 전모를 각종 전시물과 생전의 유품 800여점과 기록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서재필기념관은 격변기의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활동한 서재필 선생의 독립 운동사를 한 눈에 만날 수 있는 국민교육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서재필기념관 입구

 

 

 

▲서재필기념관 평면도

 

 

 

▲기념관에 들어서면 서재필 선생이 반갑다며 팔짱을 끼고 전시실로 안내한다.

 

 

 

▲전시실로 들어가는 복도

 

 

 

▲1전시실

 

 

 

▲2전시실

 

 

 

▲'ㅁ자' 형태의 건물 가운데 작은 뜰에 세운 서재필 선생의 동상

 

 

 

송재 서재필은 어떤 사람인가

 

 

 

 

▲송재 서재필 선생의 초상화 액자

 

 

 

▲송재 서재필 선생에 대한 간단한 설명

 

 

 

 서재필 선생은 본관이 달성(達城)이며, 호는 송재(松齋)이고, 영어명은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이다.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한국 최초의 의사였다.

 

 

 

 

 

▲서재필에 대한 소개

 

 

 

 선생은 1864년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외갓집)에서 아버지 서광효(徐光孝)와 어머니는 성주 이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친가는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다. 서재필 선생은 6~7세 때 아들이 없던 칠촌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갔다. 양어머니는 그의 총명함을 눈여겨보고 서울에 있는 그의 동생 대관 김성근(金聲根)의 집으로 보냈다.

 

 

 

 

▲서재필 선생의 연보

 

 

 

▲서재필 선생의 연보에 따른 활동 내용

 

 

 

 서재필선생은 18세가 되던 해인 1882년 알성시(謁聖試:국왕이 문묘에 가서 제례를 올리거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시험을 치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을 선발하는 시험)에 합격해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를 지냈다.

 

  그 후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입학해 단기 군사훈련을 받으며 근대식 군대 조련법을 익히고 1884년 귀국했다.

 

 

 

개화운동의 거목(巨木)  

 

 

 

 

 

▲1전시실의 개화문 액자, 송재 서재필의 개화사상을 알리는 의미에서 여초 김용현이 쓴 글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그렇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1년만인 1884년 6월 8일 조선으로 돌아와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고, 김옥균, 윤치호, 박영효 등 개화파는 드디어 1884년 12월, 행동을 개시했다. ‘우정국’ 설립 축하연에 참석한  개화파는 ‘혁신정강 14조’를 선포했다. 수구파 대신 5명과 내시 1명 등 집권세력을 제거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주요 내용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 폐지, 문벌 폐지, 평등권의 수립, 탐관오리 처벌, 국가재건 등이었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청군의 지원을 받은 수구파에 밀려 개화파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났고,1884년 12월, 서재필 선생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참담하고 암울한 마음으로 조선 땅을 떠났다.

 

 

 

 

 

▲서재필 선생의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 선생은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1894년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 두 딸을 낳았다. 그동안 선생은 미국 땅에서고국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1893년 의사면허를 취득한 그는 서재필 선생은 1895년 12월 박영효 등의 권유로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발간

 

 

 

 

▲독립신문 제1호

 

 

 

  우리가 지키는 4월 7일,신문의 날은 서재필 선생이 중심이 돼 1896년 4월 7일에 선을 보인 독립신문 창간일에서 비롯됐다. 서재필 선생은 《독립신문》을 통해 조선과 조선민중 개화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헌신했다. 

 

  외세를 배격하고 관리들의 부패를 시정키 위해 앞장섰던 선생의 기개는 신문의 논설에 그대로 담겨 있다. 권력을 감시해 부당한 일을 비판하고 세계정세를 널리 알려 민중이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민중의 뜻을 모아 외세에 저항했다. 

 

 《독립신문》은 구한말 조선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다. 열강들의 조선침략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당시 조선민중의 힘을 한데 모아 나라를 지키는 힘이 됐다.《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추방된 후에도 잠시 발행되다가 창간된 지 43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발간된 총 호수는 한글판776호, 영문판이 442호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다.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는 당시의 조선사정을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 공사와 외국인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문판은 주한 외교관들과 교육수준이 높은 외국인들을 독자로 했던 만큼 세련된 문장과 높은 지성이 필요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윤치호와 호머 헐버츠, 아처 헐버츠 등은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조직, 독립문 준공

 

 

 

▲독립협회를 결성하다.

 

 

 

 그런가 하면 선생은 그해 7월 독립 협회와 독립문 등을 만들어 자주․민권운동을 전개했다. 조선민중의 각성과 민주제도 실현을 호소했던 선생의 충정은 독립협회  활동상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서재필은 고종과 친러 정부의 관리들에게도 눈엣가시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과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전제 군주제를 입헌대의군주제로 개혁하려고 했다. 고종은 서재필이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친러 정부의 관리는 이미 러시아와 함께 서재필 추방 음모를 꾸몄고, 러시아와 일본, 미국, 조선조정 모두가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의 추방

 

 

 

 

▲필라델피아에서의 독립활동

 

 

 

▲미국에서의 활동

 

 

 

  1898년 5월, 서재필 선생은 다시 추방되는 신세가 되었다. 선생은 1905년 일본이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조선의 국권을 빼앗자 이승만 등이 찾아와 조선국권보호운동에 앞장서 줄 것을요청하여, 이에 미국대통령에게 조선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1919년 한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 선생은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고, 한국독립을 위해 미국을 비롯 세계 각국이 협조해줄 것을 호소하는 등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으면서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41년 미국과 일본 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서재필 선생은 징병검사관으로 자원해 3년 정도 봉사했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이런 서재필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1945년 공로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한국인 최초의 서양의사 서재필

 

 

 

 

▲의사로서의 서재필 선생

 

 

 

  서재필 선생하면 독립운동가 혹은 《독립신문》발행인으로만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따라서 일반인들 사이에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의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서재필 선생은 조선 사람으로 제일 먼저 미국 시민권을 받은 사람이 되기도 했지만 제일 먼저 미국의사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선생은 워싱턴에 자리 잡은 오늘날의 조지워싱턴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컬럼비아의과대학에서 공부해 만 28세이던 1892년 의사가 됐다.

 

 

 

 

 

▲의사로서 서재필이 걸어온 길

 

 

 

▲의사로서의 활동

 

 

 

 우리나라에서 그를 ‘서재필 박사’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의사라는 뜻의 닥터가 박사로 번역됐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선생은 잠시나마 병리학교실 조교수로서 세균학을 연구했다. 당시 세균병리학은 오늘날 임상병리학의 전신에 해당하는 분야의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Hodger,G.R.) 장군 고문 맡아

 

 

 

 

 

▲55년만의 귀국

 

 

 

  서재필선생은 한국이 광복을 맞자 1947년 7월 미군정 최고고문 자격으로 일제의 압제에서풀려난 조국 조선에 돌아왔다. 선생은 귀국인사에서 “한국이 통일되는 그 날이 빨리 오게 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898년 5월 조선정부에 의해 추방된 지 50년만의 귀국이었다. 당시 미군정청 하지(Hodger,G.R.) 사령관의 고문 겸 남조선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된 것이다. 조국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을 위해 82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 땅을 밟은 것이다.

 

  다시 귀국한 서재필 선생은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역을 하면서 통일된 민주․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서재필 선생의 활동

 

 

 

  한때 정계에서는 서재필 선생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선생은 고령이라는 이우로 이를 사양하고 1948년 9월 11일 미군용선 하지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그리고 1951년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통렬 후보 추대요청을 뿌리치고 미국으로 떠남

 

 

 

▲서재필 선생의 사망을 알린 1951.1.11자 ‘메디아 뉴스’지

 

 

 

▲서재필 선생이 받은 훈장

 

 

 

  정부에서는 독립신문이 창간된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고, 1977년에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는 한편, 1994년 4월 8일 애국지사 추모사업으로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있던 선생의 유해를 봉환해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1996년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했다.

 

 

 

 

 

▲독립신문 및 서재필 어록

 

 

 

▲태극기의 다양한 모습(서재필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제정한 인물이다)

 

 

 

 

서재필 생가와 서재필조각공원

 

 

 

 서재필기념공원에서 나오면 2km 거리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서재필 선생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외갓집이다. 그리고 서재필기념공원에서 2km 거리의 길은 서재필의 호를 따서 송재로(松齋路)로 명명되었다.

 

 

 

 

 

 

 

 

 

▲생가

 

 

 기념공원 독립문 뒤로 난 고가도로를 넘으면 주암 호변으로 자리 잡은 서재필조각공원으로 갈 수 있다.

 

 

 

 

 

 

 

 

▲서재필조각공원의 작품들

 

 

 

 나는 서재필기념공원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서재필 선생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서재필 선생은 개화기에 갑신정변을 주도한 정치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인 동시에 선각자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한국인 최초의 의사로서 굴곡 많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나간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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