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이문열 “세상과 충돌… 나의 봄은 짧고 겨울은 길어”
▲이문열 작가는 새로 출간할 ‘둔주곡 80년대’가 우리 사회의 불협화음 통과 구간인 1980년대를 다룬 작품으로, 3부로 이뤄질 이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소설 작업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곽성호 기자
이문열 소설가
주변선 순수소설 쓰라지만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기에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6·25때 월북한 아버지 몰락
어머니의 공산당 상처 영향 20대부터 좌파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쉽게 보수에 올라타서 보수자처 한건 신중치 못했다
글쓰기는 나 자신의 길 찾기
나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있어, 갈길 멀고 해는 지고 있는 듯
이문열(71) 작가는 최근 두 개의 뉴스를 전했다. 하나는 1979년부터 함께한 민음사와의 40년 동행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이었고, 또 하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그의 문학사숙인 경기 이천의 ‘부악문원’을 찾아 정치적 의견을 들었다는 뉴스였다. “그 시절 이문열이 없었으면 한국문학은 너무나 참혹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이자 2000년대를 전후해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된 ‘보수논객’이라는 두 정체성에서 각각 발신된 소식이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출발과 정점 그리고 다급히 뒤따라온 논란과 화려한 명성으로부터의 퇴각이라는,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민음사 시절을 마무리하고, 옮겨가는 알에이치코리아(RHK)에서 올해 말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1969년으로부터 50년, 1979년 동아일보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면서 중앙 문단에 등단한 지 40년이 되는 올해에 내놓는 노작가의 만년작이 궁금했다.
소설가이자 보수논객인 그를 향한 긴 질문 리스트를 들고, 지난 1일 부악문원을 찾았다. 리스트의 한쪽은 오랜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문학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지닌 소설가를 향한 질문이었고, 또 한쪽은 우리 시대와 정치에 대한 질문이었다. 일흔을 넘긴 이즈음 보수논객이라는 이름 때문에 소설가로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소회 같은, 솔직한 심정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꽤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이고, 사람의 삶에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회성, 시대성은 많은 경우 정치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정치의 한가운데에 있었다”며 ‘소설가의 삶’과 ‘보수논객의 길’은 결국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의 뒤로 숨을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자신의 삶이었다고 말했다. 노작가에게 자전적 신작 소설 ‘둔주곡 80년대’부터 한국 현실 정치에 주는 거침없는 조언까지 들었다. 인터뷰는 최근의 뉴스인 ‘민음사와의 이별’에서 시작됐다.
―1979년 ‘사람의 아들’이 민음사가 주관하는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시작된 민음사와의 40년 동행을 마무리했는데.
“오히려 너무 늦었다. 너무 오래 있다 보면 타성이 생겨 서로 어긋나는 것이 생긴다. 나는 옛날 그 민음사를 생각하고 출판사 잘못도 실수도 아닌데 섭섭해할 수 있고, 그들은 그들대로 왜 저 사람이 와서 짜증을 부리나, 심술을 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큰 이유가 아니다. 오래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를 갔을 때 건물 앞에 출판사와 오래도록 함께한 헤르만 헤세 사진이 굉장히 크게 걸려 있는 걸 보고 감동했던 적이 있다. 그때 작가들이 출판사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기록을 세워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출판사와 40년을 했으니 이만하면 됐다. 절판된 책도 내고, 새롭게 개정판도 내며 내 인생도, 소설도 정리해보고 싶다.” 새로 함께한 RHK와는 10여 년 전 양원석 대표와 미국 판권과 관련해 만난 인연이 있다. 또 출판계에서 이문열이라는 보수 논객이 갖는 좁은 정치적 입지와 100권 가까운 저작의 규모도 있어 출판사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2017년 여름부터 지난해 여름까지 ‘신동아’에 연재한 ‘둔주곡 80년대’의 경우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문학잡지 두 곳이 작가의 연재 요청에 응했다가 며칠 뒤 내부 반대라며 정중히 거절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 작가는 신동아에 연재한 13회 분량에 3, 4회를 더해, 올 연말 2권 분량의 책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이어 4권을 더해 3부 6권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소설은 대구매일신문 편집 기자로 일하며, 동아일보에 중편으로 당선돼 일약 주요작가로 급부상한 뒤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자리 잡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축으로 1980년대 불협화음의 시대 풍경을 담아낸다. 이는 10살부터 22살까지 자아형성기를 다룬 자전적 연작 소설 ‘변경’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둔주곡 80년대’가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통과해온 세상을 정리하는 마지막 고리라고 밝혔다.
―‘둔주곡 80년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나.
“둔주곡(푸가)은 주된 가락이 있지만 여러 개의 선율, 보통 네댓 개의 성부가 어우러지는데, 가다 보면 불협화음 공간이 있다. 80년대는 심각한 불협화음의 시대였다. 사회 정치적으로는 근대화, 산업화, 부의 축적 이런 것이 한 덩어리였고 자유화, 민주, 평등이라는 또 다른 덩어리가 있었다. 이들이 부딪힌 불협화음 공간에서는 완전히 세상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은 이 같은 80년대가 정리되며 불협화음이 하나로 조율되는 과정이다. 다만 자연스러운 화성이 아니라 강한 선율이 다른 것들을 부정하고 제외하며, 억지스럽게 한 가락으로 조율돼 가는 그런 불편한 느낌이다.”
―책이 재간돼 나오면 다시 젊은 독자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읽히길 바라는 작품은.“
그런 게 있을 거 같지 않다. 세상이 바뀌고 감정적 수요도 달라졌다. 우리 시대는 종합 인문학적 사고, 교양주의에 대한 수요와 인기가 있었다. 나는 가장 운 좋은 시대, 내 기질과 맞는 시대에 글을 썼다. 그때와 같이 쓰더라도 세상이 변해 수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단절의 시대다. 그저 어떤 사람들은 추억으로 볼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옛날에 그랬다던데 하며 들여다보고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01년,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한 칼럼으로 전례 없는 책 장례식까지 치르게 되면서 작가로선 많은 것을 잃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소설은 이문열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격찬’과 ‘혹평’이라는 극단적 논란 안에 있었던 시간은 어땠나.
“문단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인민재판의 단상에 올라갔다. 1990년 초·중반이후 문예지, 문학잡지에서 격식이 있는 평론으로 나를 다룬 적이 없다. 목적을 가지고 공격하려는 글은 있었지만 정식 리뷰로 이뤄진 것은 없었다. 철저하게 공식적인 평단에서는 ‘무(無)’. 즉, 없는 사람이었다. 때론 주변에서 소설만 쓰라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다.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이야기다. 삶의 양태를 재료로 삼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성, 시대성이고, 이는 많은 경우 정치와 연관을 맺는다. 좋은 세상이 되면, 정치소설이 없어지겠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언제나 정치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다. 누구는 순수소설을 쓰라고도 했지만 순수소설이야말로 정치성을 빼기 위해 무한한 정치적인 고려가 들어간다. 우리 시대의 삶을 그린다면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평론가 강유정은 ‘이문열 중단편전집’에 실린 평론에서 “이문열 소설의 근간은 세계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 가운데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문제적 인물, 그 인물의 팽팽한 정신적 모험과 유랑”이라며 “그의 소설 속 인물의 행위는 현실에 대한 이념적 탐구와 병행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과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 작가는 “소설가가 만드는 주인공은 나와 멀리 있을 수 없다. 내 체험이나 내 기억과 멀리 있을 수도 없다”고 했다.
―아쉬움은 없나.
“세상과의 충돌은 피해갈 수 없었다. 내가 쉽게 보수란 이름에 올라탄 것, ‘나 보수야’라고 한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월북한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나는 빨리 좌파라는 의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좌파에 대한 친근감이나 호의 같은 것은 이미 20대 초반에 사라졌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아버지의 몰락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고, 어머니가 개인적으로 공산당, 특히 북한 공산당에 대한 나쁜 기억을 많이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보태서 우리에게 그들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회생활 이전에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확고했다.” 박헌영 계열로 6·25전쟁 이후 잠깐 서울 중앙위원을 했던 이 작가의 아버지는 알려진 대로 서울 수복 후 가족을 두고 홀로 월북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떤 소설가였다고 정리할 수 있는지.
“재수 없는 시대에 태어난 재수 없는 소설가. 재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봄은 짧고 겨울은 길고. 봄의 추억은 달콤하고.”
―달콤한 추억은.
“태어나 누구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몸이 자라 성년이 되지만 모든 사람이 정신적으로 성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끝내 성년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어른이 되는 징표 중 하나가 이야기하기, 말하기인데,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감흥을 줬다. 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표정, 어쩌다 보내주는 갈채, 감탄에 대한 기억들이 가장 달콤한 추억이다. 이 같은 감각은 예전에 연극을 몇 편 했을 때 가장 실감 나게 느꼈다. 1980년에 실험극장에서 ‘사람의 아들’을 각색해 올린 적이 있다. 기립박수를 받는데 진짜 감동을 받았다. 소설책은 100만 권을 팔아도 기사나 소문, 혹은 인세를 통해 짐작하는 것 이외에 실감이 안 난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내가 머릿속에서 만든 주인공들이 무대 위에서 말하고 돌아다녔다. 내가 만든 허구의 세계가 진짜 세계로 실현되는 것이 충격적이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열광하는 것은 더 큰 감동이었다. 관념이 아니라 내 앞에서 작동하는 세계, 전혀 달랐고, 울림은 대단했다. 그래서 연극을 잘하지도 못하면서 네댓 편 각색했다. 마지막이 명성황후이다.” 다만 그는 ‘보수논객’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선 특별한 유감은 없지만 상대 진영의 프레임에 덮어씌움을 당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했다.
▲ 최근 들어 자신이 싸워온 상대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는 이문열 작가는 추상적으로 말하면 그 상대가 닫힌 사회, 광기의 사회였다고 돌아봤다. 곽성호 기자
―선생에게 씌워진 보수 프레임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에서 보수라고 하는 것은 무색한 의미의 보수가 아니라 못된 반동분자로서의 보수로 여겨지기 쉽다. 보수라는 말 속에는 반동이라는 말이 절반 이상 포함돼 있다. 세계의 변화를 안 받아들이고 되받아치는 것이 반동인데, 때론 악질적이고 정치적으로 나쁜 행위가 된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는 지금 그렇게 돼 가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보수라는 말을 들으면 중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수 꼴통을 떠올린다. 내가 1990년 초반에 프랑스에서 비평가 세 명, 작가와 교수 각각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당신들은 보수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낱말이 떠오르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이들은 신중함, 성실함을 떠올렸고, 제일 비판적인 것도 고집스러움이었다. 프랑스가 진보적인 나라이고, 작가, 평론가라면 진보적인 이들인데 보수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지 않아 놀랐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비교적 중간층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봤다. 그때는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반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낡은 보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지금 보수가 해야 할 제일 큰일은 보수의 진정성, 보수의 개념부터 확실히 하고 가는 것이다. 보수라는 이름 자체도 맞는지 모르겠다. 너무 두루뭉술하고 함의도 좋은 것부터 나쁜 것까지 두루 포함돼 선명하지 않다. 진보는 비교적 선명한데 보수는 복합적이고 그 속에 잡다한 것이 너무 많이 실려 있다. 마치 다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실은 낡은 배 같은 느낌이다. 여러 잡동사니를 실은 배. 그 안에는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못할 보수도 있다. 이것까지 다 짊어지고 가면 너무 무겁다. 짐을 덜고 선명성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자기규정부터 먼저 해야 한다. 아무리 낡고 큰 배지만 쓸어 담을 것과 안 담을 것을 구분해서 배의 톤수를 줄이고 정예화할 필요가 있다.”
―보수의 가장 핵심 가치는.
“가치라기보다 보수의 태도라는 말이 더 선명하다. 쉽게 말해 보수는 ‘그래도 지킨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 있어 온 세계가 완전히 부정당하지 않고, 있을 만하다고 증명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세상을 개선하는 데 애를 썼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한 번에 몰아쳐 보수의 가치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현대사에서 해방된 식민지 국가들 중에서 우리나라는 몇째 안에 들어가는 성공 케이스다. 쓸모가 없는 보수 반동만 살았다면 이 세상이 만들어졌을 리 있었겠나. 이에 비해 진보는 그러나 우리의 희망, 더 나은 세계는 앞날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보수와 진보의 균형은.
“좌우 양 날개, 새의 날개처럼 둘 다 필요한데, 보수든 진보든 극단화되지 않아야 한다. 진보가 극단화되면 제일 무섭다. 역사적으로 가장 파괴가 광범위하고 잔인하게 일어난 것이 극단적인 진보의 시기이다. 반대로 가장 광범위하게 썩어 무너지는 것은 극단화된 보수에 의해서다. 이 경우는 모두 서로 피해야 한다. 지금은 진보의 필요성이 강한 시대지만 보수가 지나치게 부정되면 그것은 결국 진보가 극단화되는 길이다. 진보의 극단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보수는 보수의 값어치와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에 주는 충고라면.
“2년 동안의 진지 구성이나, 방어전에서 졸렬한 방법이 많아서 전략전술에서도 실패했다. 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수 세력 회복을 말하는데 보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정예화시킬 필요가 있다. 털어낼 건 털어내야 한다. 오늘날 보수가 불신당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털어내기가 있어야 한다. 과감하게 자기 쇄신을 해야 한다. 실망한 상황은 심히 유감스럽지만 어쨌든 일패도지(一敗塗地)하지 않았나. 국민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 나도 마음 놓고 그들을 위해 울거나 분노할 수 없는 것이 씁쓸하다.” 이 작가는 보수재건 깃발의 핵심을 꼽는다면, 최소한 몰락한 전 정권의 부활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복귀는 한국 보수 우파의 재건에 끝이라고 조언했다. 박하게는 말할 수 없으나, 어쨌든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절차가 법관들에 의해서 진행됐다며 억울한 춘향이 옥살이라고 보거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간다면 망하는 수순이라고 했다. 그는 언젠가 본 2차대전 영화 속에 나오는 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약 아군이 진지를 오폭한다면 그것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할 수 없다며, 털어내지 못하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2004년에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맡았다. 다시 현실 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있는가.
“그때는 50대 초반이었고 세상도 모르고 겁이 없어서 해봤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금 그걸 왜 하겠나. 물론 나 스스로 10년 동안 파트너를 자청했으니 그 정분으로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나 역시 현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질문만 많고 답이 없는 상태다. 이런 상태로 참여해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부와 여당에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 사람이 여러 말을 하는데 말해봐야 하나 더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걱정되는 것은 좋게 말하면 호도이고, 나쁘게 말하면 연막인데 하는 일과 자신들이 표방하는 것 사이에 지나친 거리가 없기를 바란다.”
―남·북·미 회담을 어떻게 봤나.
“국제 회담은 어차피 큰 나라들이 몰려서 하는 거니까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란 말이 떠오른다. 태산이 울리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흔들거렸는데 나중에 보니 쥐새끼 한 마리 나오더라는 말이다. 하지만 결말과 평가는 미래에 속한 것이니 쥐가 나올지 뭐가 나올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으로선 ‘태산명동’만 봤을 뿐이다. 좋은 결말이 나오면 엄청난 것이 되어 이번 회담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남북문제를 풀기 위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면.
“이미 큰 방향으로 확고하게 많이 진행됐기 때문에 뒤늦은 징징거림 같은 것이 될까 걱정이지만 징징거림이든, 늙은이의 걱정이든 간에, 진행된 과정에 대해 걱정이 많다. 남북문제는 굉장히 많은 사람의 운명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야 한다. 다만 나를 달래고 있는 것은 예전부터 ‘대동지환(大同之患)’이라고, 다 같이 당하는 화는 화가 아니라고 했다. 잘 되면 다 좋고, 나빠도 다 나쁘다. 나 혼자 중뿔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화복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당장으로 보면 재앙이지만 오랜 세월 지나면 복이 될 수도 있다.”
―1997년 소설 ‘선택’이 여성을 폄하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은.
“나쁜 것은 고치고 털어내야겠지만, 남성과 여성이 어쨌든 같이 살아야 한다면 조금은 인내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유튜브 보나요.
“재미있는 영상은 즐겨 본다.”
―요즘 한국소설은 어떤가. 젊은 후배 소설가들 작품을 많이 읽나.
“3∼4년 전까진 문학상 심사를 하다 보니 많이 읽었는데, 요즘에는 잘 읽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젊은 작가들이 내게 책을 많이 보내 줘 읽는다. 책을 보내면서 내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말을 할 때면 내 가슴도 싸늘해진다. 최근 들어 우리 문학이 삭막해졌다. 예심에서 결심으로 올라오는 작품들은 이름을 가리면 모두 비슷하다. 심사를 하다 보면 다 잘 썼는데 이름 가리면 누구 건지 모르겠다. 기교도 서로 비슷해서 차별성이 없다. 주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엔 작가들이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소설을 썼는데, 요즘에는 주제조차 서로 비슷하다. 독자 입장에선 새로운 게 없다. 늘 듣던 얘기만 듣고, 보던 얘기만 보게 되는 셈이니 말이다. 생산자들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산에 과연 문제가 없는지 검토할 때다.”
소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현실정치를 거쳐 다시 문학으로 돌아갔다. 유려하고 음악적인 문장, 정확한 묘사, 치밀하고 완벽한 구성, 해박한 지식과 상상력…. 이 모든 것을 담아낸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나 ‘전통회귀적 보수주의’ ‘세련된 문체의 교양소설’ ‘허무적 보수주의’‘실존주의적 허무주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거부로서 ‘자유주의’, 그 극단으로서 ‘아나키즘’ 혹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등 평단으로부터 다양한 규정을 받아왔다. 어느 규정이 그래도 가까웠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스스로 어떤 작가라고 자부하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세상을 다 알고 규정하거나 결정지은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길찾기라고나 할까. 길 위에서의 길찾기, 혹은 작가가 되어서 길찾기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인공들을 통해 찾아보고 싶었던 길들을 이리저리 변주해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여러 가지를 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그는 여전히 지금도 길 위에 있다고 했다. “내가 지금부터 글을 쓴다고 해도, 5∼6년 정도면 더 쓰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생산력은 한창때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그는 그래도 신작도 내놔야 하고, 1500만 부가 나간 ‘삼국지’를 비롯해 옛날 작품들을 다시 손볼 예정이라고 했다. ‘호모 엑세쿠탄스’ 등 너무 허망하게 평가된 작품들은 다시 개작할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술을 끊고, 운동도 매일 한 시간씩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일모도원(日暮途遠)’같다고 했다. “갈 길은 멀고 해는 지고.” “때론 내가 이제까지 무엇과 싸워 왔을까 생각한다. 상대는 끊임없이 바뀌었는데 나 혼자 계속 싸움을 해온 느낌”이라는 작가는 “아마 특정한 상대라기보다는 닫힌 사회, 광기의 사회와 싸워 온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대와의 불화, 문우들과의 불화”로 이천 부악문원으로 내려온 지 어느덧 35년. “지금 생각하니 폐퇴해 서울로 다시 올라간다는 생각은 안 하고 여기서 노인이 됐다”면서도, 글 쓰는 후배들을 위한 문학사숙인 부악문원은 어떻게든 끝까지 꾸려 나가겠다고 했다.
▲소설가 이문열 약력
△1948년 서울 생(본명 이열)
△안동고 중퇴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중퇴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 가작 당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새하곡’ 당선
△1979년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일약 주요 작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급부상
△주요 작품 ‘젊은 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1986~1998),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시인’(1991), ‘호모 엑세쿠탄스’(2008) 등과 평역서인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등을 통해 3000여 만 부 판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호암상 등 수상
△세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외대 석좌교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 등 역임
△2004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활동
“지독한 단문단답의 시대… 제대로 묻고 천천히 답했으면”
이문열이 독자들에게
‘예전에 옳았다고 해서 지금도 옳은 건 아니다’
젊은세대에게도 똑같아
긴 인터뷰를 끝내며 이문열 작가에게 독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이 작가는 “우리 시대는 단문단답의 시대”라며 “단문단답에 익숙해지지 말고 늘 물어보고 살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들어 갈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지는데, 답을 구하기 어렵다며 생각의 방향이든 가는 길이든, 제대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그것도 디지털 빅데이터, SNS시대, 밖에서 보내는 신호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지독하게 ‘단문단답’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묻는 것도 제대로 하고, 답도 길게 했으면 좋겠다. 질문과 답 사이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며 “요즘 사람들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 오늘 바로 지금, 3분 내, 5분 내에 즉시 답해달라고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때론 빠른 것이 중요하고, 짧은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우리 삶에는 그렇지 않은 것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발전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들이 순간적인 전기처럼 들어오는 영감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댓글, 데이터, 수에 속지 말라며, 이에 대한 맹신이 결국 드루킹 사건 같은 일을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이와 함께 그는 ‘광장으로 회귀’하려는 우리 시대의 징후에 대해 우려했다. “그리스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는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경험한, 속도가 빠른 시대였다. 하지만 직접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 속에서 숙의와 숙려의 시간으로 발전해 갔다”며 “왜 역사를 다시 거슬러가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광장주의의 직감에만 의존하면 이는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고, 비판했던 인민재판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이 같은 속도의 시대, 마치 발신과 수신의 과정이 단순화돼 매우 밀접해진 것 같지만 오히려 깊은 차단이 생겨 절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지점이 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세대의 인식 차이도 이 같은 ‘차단’ 중의 한 현상이다. 그는 “예전에도 세대 갈등은 있었지만 요즘처럼 적대적인 경우는 없었다. 노인들을 보고 ‘틀딱’ ‘노인충’이라고 하거나, 반대로 젊은이들을 몹쓸 아이들로 취급해 말하는 것 등은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 중에서 지금이 제일 심하다”며 “바뀌는 세상 속에서 어른들이 먼저 ‘예전에 옳았다고 지금도 옳은 것은 아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인터뷰 = 최현미 문화부장
<출처> 2019. 7. 5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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