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문학 일반

이육사의 ‘육사시집’ , 치열했던 육사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시, 깊은 울림을 주다

by 혜강(惠江) 2019. 2. 14.

 

이육사의 ‘육사시집’

 

치열했던 육사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시, 깊은 울림을 주다

 

김호기 교수 (연세대 사회학과)

 

 

 

경북 안동에 세워진 이육사 ‘청포도’ 시비.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역사를 내다보는 이 기획을 시작했을 때 이 지식인만은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에 대해 이제야 쓰게 됐다. 그 사람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다.

 

  이육사는 윤동주와 함께 더없이 어두웠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을 든 시인이다. 이육사와 윤동주는 사뭇 배경이 다르다. 윤동주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민족 의식을 키웠다면, 이육사는 유교 사상의 배경 아래 민족 의식을 내면화했다. 이육사가 전통적인 유교에만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유학과 의열단 활동에서 볼 수 있듯, 그는 근대적 사유에 익숙했고, 일제 식민주의에 맞선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이육사가 남긴 시 ‘꽃’의 제1연이다. 광복이 이뤄진 다음 1945년 12월 ‘자유신문’에 ‘광야’와 함께 발표된 유작이다. 이 시에 대해 그의 아우 문학평론가 이원조는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가형(家兄)이 사십일세를 일기로 북경옥사에서 영면하니 이 두 편의 시는 미발표의 유고가 되고 말았다. 이 시의 공졸(工拙)은 내가 말할 바 아니고 내 혼자 남모르는 지관극통(至寬極痛)을 품을 따름이다.”

 

 이원조가 지관극통이라 말했지만 ‘꽃’은 이육사의 삶을 상징한다. 하늘도 끝나고 비도 내리지 않은 무명(無明)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되찾는 광복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외려 그 꿈을 빨간 꽃으로 피우겠다는 절대 의지야말로 바로 이육사의 삶이었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육사 시인 생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본명은 ‘원록’, ‘원삼’이었고, ‘육사’는 그의 호였다. 스스로 ‘활’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조부에게 한학을 배웠고, 경북 예천, 대구, 일본에서 공부했다. 형제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중국에 다녀왔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육사는 한편으로 독립 투쟁에 관여했고, 다른 한편으론 시인으로 활동했다. 1932년 베이징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에 입교하고 이듬해 졸업했다. 수 차례 옥고를 치른 그는 1943년 서울에서 다시 검거됐고, 베이징으로 압송됐다가, 1944년 그곳에서 안타깝게 옥사했다.

 

 이육사는 1930년 조선일보에 시 ‘말’을 선보여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1935년 잡지 ‘신조선’에 ‘황혼’을, 1937년 동인지 ‘자오선’에 ‘노정기(路程記)’를 발표했다. 이후 그는 ‘문장’에 ‘청포도’(1939)와 ‘절정’(1940)을, ‘인문평론’에 ‘교목’(1940)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혔다.

 

 이육사가 시인으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국문학자 김학동이 편집한 ‘이육사 전집’을 보면, 그는 문학평론, 사회평론, 에세이 등 여러 편의 산문들을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쓴 사회평론들이었다. 그는 ‘국제무역주의의 동향’,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1935년과 노불관계(露佛關係) 전망’ 등 당대의 국제정세를 다룬 글들을 발표했다. 시인이라기보다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내는 평론들이었다.

 

 살아 있을 때 이육사가 아주 유명했던 시인은 아니었다. 193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들로는 정지용, 이상, 김기림, 백석, 이용악, 오장환, 서정주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그를 앞서 기억하는 까닭은, 그가 시와 삶이 일치했던 매우 드문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중∙고교 시절에 누구나 배우는 이육사의 대표작 ‘절정’이다. 이육사의 생애를, 이국에서 독립 투쟁에 헌신했던 이들의 고난을 증거하는 작품이다. 시든 소설이든 예술이 삶을 선행할 순 없다. 예술은 삶의 반영이자 계몽이다. ‘강철로 된 무지개’야 말로 일제 식민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진정으로 고결하고 의연했던 독립운동가 이육사의 삶 그 자체였다.

 

◇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

 

 ‘육사시집’은 1946년 아우인 문학평론가 이원조가 펴낸 것이다. 이후 판본이 거듭하면서 새롭게 발굴된 시가 더해졌다. 이육사가 광복 직전 중국에서 순국한 만큼 뒤늦은 시집 출간이 안긴 감회는 마음 시린 것이었다. ‘자오선’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 시인들인 윤곤강, 김광균, 오장환, 이용악이 공동으로 쓴 서문에는 짙은 비감이 담겨 있다.

 

 “육사가 북경 옥사에서 영면한 지 벌써 2년이 가차워 온다. 그가 남기고 간 스무여편의 시를 모아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 서울 하숙방에서 이역야등(異域夜燈) 아래 이 시를 쓰면서 그가 모색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그는 한 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 유작으로 발표된 ‘광야’ ‘꽃’에서 사람과 작품이 원숙해 가는 도중에 요절한 것이 한층 더 애닲음은 이 까닭이다.”

 

 

1938년 34세였던 이육사(오른쪽)가 경주 불국사를 방문한 사진. 신석초(가운데) 최용(왼쪽)과 동행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학동은 일제 강점기 아래 망국민의 울분과 비애, 항거와 저항, 그리고 광복의 염원과 의지가 이육사 시 세계의 본령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이육사의 내면을 지탱했던 사유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선비 정신이 하나라면,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민족주의가 다른 하나다. ‘교목’에서 노래하듯,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고 마음은 아예 뉘우침 없고’, 호수 속 그림자라 하더라도 ‘차마 바람도 흔들지 못하는’ 곧고 높은 나무야말로 이육사가 품고 있던 두 정신 세계를 생생히 보여준다.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꽃’의 제2연이다. ‘육사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다. 툰드라와 같은 일제 식민주의의 폭압적 지배 아래서도 이육사는 꽃이 피고 제비떼 날아오는 마침내 저버리지 못하는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는 우리 현대 지성사에서 가장 쓸쓸하고 참혹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절에 이육사라는 시인의 존재는 윤동주와 함께 참으로 다행스럽고 소중한 역사였다.

 

 

◇역사에 대한 예의

 이육사의 삶과 시와 독립투쟁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역사는 현상과 사건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 안에는 개인적∙집합적 주체의 꿈과 좌절, 희망과 절망이 함께 숨 쉬고 있다.

 

 우리 근대성의 역사는 봉건 지배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개인적∙집합적 주체들이 싸워온 역사였다. 지난 20세기 전반기의 역사는 일제의 지배에 맞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개인적·집합적 주체들이 투쟁해온 역사였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개인적∙집합적 주체들에 대한 기억이다.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

 

 ‘꽃’의 마지막 제3연이다. 드디어 광복이 이뤄져 꽃은 만발하고 그 기쁨을 마음껏 취하는 날을 이육사는 이렇게 꿈꾸며 고대했다. ‘광야’에서 노래하듯, 이육사는 ‘지금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뿌리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할’ 그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이육사의 삶과 시, 고난과 희망은 역사의 복합성과 이에 대한 해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역사를 통계 숫자로만 파악하고, 역사를 제도의 변화로만 이해하며, 그리하여 역사 속에 놓여 있는 개인적∙집합적 주체들의 꿈과 열망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일면적 해석이다.

 

 새롭게 열린 미래 100년에 우리는 지금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쳐야 할까. ‘나’에 앞선 ‘우리’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도 귀중하듯 ‘우리’도 소중하다. 역사 속을 당당히 걸어 온 우리 선조들의 삶과 꿈, 절망과 희망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출처> 2019. 2. 11 / 한국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