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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 일반

천상병,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

by 혜강(惠江) 2018. 11. 25.

 

천상병(1930~1993)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천상병 일러스트

▲ 천상병 (일러스트= 이철원)

 

 

 

 천상병을 알고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 드물게 나타나는 기인이라고 일컫는 인물들을 나는 그리워한다.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삼각산에 들어가 글을 읽던 김시습이 책을 다 태워버리고 미치광이 짓을 하며 살았다고 들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는 한마디로 널리 알려진 김삿갓 또한 많이 흠모했지만, 그가 살았다는 유적지를 한번 둘러보았을 뿐이다.



 1967년 속칭 동백림간첩사건이 터졌을 때 유럽 등지에서 혐의자들을 잡아오려고 혈안이 된 정보원들이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천상병의 이름을 그 사건을 계기로 기억하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종로에서 마주친 것이 처음 만남이었다. 나를 알아보고 "선생님, 돈 가진 게 있으면 이백원만 주세요"라며 미소 짓던 그가 시인 천상병이라는 사실을 나도 알아보고, 그에게 천원 한 장을 건네준 것이 우리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는 동백림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6개월이나 고문을 당하고 겨우 풀려났지만, 그로 인하여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앞으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하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좀 더듬기는 했지만 매우 교양 있는 말로 언제나 형님처럼 나를 대하여 주었다.

 

 그를 초대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내 집에 와서 그는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대강 알려 주었다. "선생님, 저는 전기 고문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정자가 다 죽었답니다. 그래서 결혼은 해도 애를 낳지는 못한답니다." 그는 투박하게 말을 이어갔다. 억울하게 짓밟힌 비참한 젊은 날을 살아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순진하다 못해 순결하였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에게 신세 지는 것이 싫어서 천상병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잘사는 형제들에게도 손을 벌리는 일이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막걸리 한두 잔 살 수 있는 돈이면 족하였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한잔 나누는 것도 못 하고 집에 있던 '조니워커' 양주 한 병을 그에게 선사하면서 "술을 몹시 좋아한다며?"라고 했더니 멋쩍은 웃음만 보여주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천상병은 언젠가 이런 시를 읊은 적이 있다. 제목은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 시 한 수를 읽으면서 나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그는 얼마 뒤에 내 집에 또다시 찾아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 지난번 주신 양주는 제가 한 모금도 못 마셨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이건 비싼 술이니 팔아서 막걸리나 마시는 게 옳다'고 하여 저는 맛도 못 보고 그 술을 아내가 팔았답니다."

 그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였다. 중학 5학년 때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강물'이라는 시를 '문예'라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1952년에는 '갈매기'가 시인 모윤숙의 추천으로 또다시 '문예'에 게재되어 시인으로서의 추천받는 일이 완료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서울상대에 입학하였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학생 때부터 영어에 능하던 그는 미군 통역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영어 서적들을 여러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가 정식으로 취직하여 직장을 가져 본 것은, 뒤에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이 부산시장이었을 때 그의 공보비서로 2년간 근무한 기간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밀어닥친 동백림사건이라는 무서운 재앙은 그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려 그 아픔을 술로 달래다가 영양실조까지 겹친 술꾼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으나 그 사실이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친구들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시들을 유고집으로 발간하였으니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천상병은 언젠가 나를 만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생님, 예수님은 매우 가난하셨지요. 저도 가난합니다."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던 천상병이 목사들보다 훨씬 예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 한 수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1993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천상병은 훨훨 날아 하늘에 올라가면서 '고얀 놈들아, 그래도 내가 다 용서한다'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지고 멀리멀리 구름 헤치고 저 하늘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 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가을날의 하루하루가 처량하게만 느껴지지만 천상병이 살고 간 이 땅이기에 봄은 반드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출처> 2018. 11. 24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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