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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 일반

제주서 사랑하던 여인과 헤어진 박목월 '이별'의 노래 남기다

by 혜강(惠江) 2018. 5. 6.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4>박목월(1915~1978)

 

제주서 사랑하던 여인과 헤어진 박목월 '이별'의 노래 남기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이철원 기자


 

 청록파라는 이름으로 세 시인이 있었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이 세 사람은 동인(同人)이었다고 할 수 있고, 내가 보기에 동인이면서도 개성은 뚜렷하게 달랐다. 조지훈은 다분히 불교적이었다. 그런 내용의 시도 여러 편 남기고 갔다. 박두진과 박목월은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살았지만 박두진이 투쟁적이었던 데 반해 박목월은 매우 서정적이었다.

북에 김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박목월이 있다고 정지용 시인이 칭찬할 만큼 그는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시인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박목월의 시는 1946년 출판된 청록집 첫머리에 실은 '님' 이었다.

 

 내ㅅ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내ㅅ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밤마다 홀로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기인 한밤을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어느 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님과 하늘이 비치리오."
 
이 시는 역경과 좌절에도 여리고 따뜻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 연상되어 읽을 때마다 매우 큰 감동과 위로를 받는다. 6·25사변 중에 나는 부산에 피란 가서 진명여고 영어 교사로 취직했다. 허술한 창고를 하나 얻어 교사(校舍)로 꾸미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때였다. 유명한 바리톤 조상현이 같이 그 학교에서 근무하였는데 전쟁 중인 1951년에도 가을은 왔다. 조상현이 학생들에게 박목월이 시를 쓰고 김성태가 곡을 붙인 '이별'이라는 노래를 가르쳤다. 한 교실에서 합창하면 창고 교사 전체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그런데 이 노래가 3절에 가면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해서, 가을이 되면 언제나 그 노래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고 내 젊은 가슴이 울렁거린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어찌하여 박목월이 그런 시를 써서 가을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를 울리는 것인지 잘 모르지만, 그 노래를 자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였다. 근년에 여류 시인 추은희가 나에게 들려준 비화가 하나 있다. 박목월이 제주도에서 사랑하던 어떤 여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 시를 적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박목월에 대하여 더욱 애절한 느낌을 가지게 됐지만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져볼 기회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박목월의 본명이 박영종이라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몇 되지 않는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학력은 일제 때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누구도 그의 학력에 대해 따지지 않는다. 시인에게 무슨 학력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중등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지만 홍익대학, 한양대학교에서 국문학 교수로 일했다. 특히 한양대학교 총장이었던 김연준은 박목월을 좋아해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도 수여하고 그를 교수로 채용했을 뿐 아니라 문과대학장 자리도 마련해 줬다. 한국인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선명하고 정다운 언어로 우리를 위로한 시인이 박목월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는 경남 고성 태생이다. 백일이 됐을 때 부모가 안고 경주로 이사 가 박목월은 경주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신라 천년의 꿈이 서린 그 아름다운 고장에서 산천초목을 바라보며 시상을 키웠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시인 박목월의 꿈과 희망, 환희와 애수, 그리고 향수, 그 모든 것이 기독교적 향기를 품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는 대구에 있는 계성 학교에 진학하여 처음에는 경주에서 대구까지 기차로 통학했는데 이것이 하도 힘에 겨워 자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취하면서 돈이 떨어져 담임선생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학교 온실에서 묵어도 된다고 하여 당대 최고 시인이 될 박목월은 밤마다 하늘에 빛나는 별을 온실에서 쳐다보며 시상을 더욱 키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제가 그 말기에 조선어 말살 정책을 강요하던 때에도 박목월은 계속 시를 썼다. 그는 쓴 시를 마루 밑에 감추었다가 밤마다 다시 꺼내어 쓸 정도로 시 쓰기에 정성을 다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박목월은 처음에는 동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얼룩송아지'가 박목월 작품이고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으로 시를 쓴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고 한다.

그는 1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으로 정식 등단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양대학에서 그의 추모전을 열었는데 그때 저명한 국문학과 교수인 그의 맏아들이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나는 한양대학교 앞을 지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한양대에서 받은 월급으로 우리를 먹여 살렸다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한국인이 백세 수를 누리기를 바랐던 시인 박목월은 한참 더 시를 써서 이 백성을 위로해야 할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ㅅ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내ㅅ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그의 애달픈 꿈, 어리석은 꿈이 어찌 박목월 혼자만의 꿈이었을까. 나도 그 꿈을 안고 구십이 넘은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그의 그 꿈은 모든 한국 젊은이의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출처> 2018. 5.  5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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