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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by 혜강(惠江) 2019. 6. 24.

 

 

인천 연안부두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오고가는 이들의 갖가지 사연이 서린 곳

 

 

·사진 남상학

 

 

▲인천 연안부두 해양광장 유람선 대합실에 우뚝 선 전망대

 

 

 인천 연안부두는 서해 도서로 운항하는 여객선의 출발지이다. 우렁찬 뱃고동 소리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곳, 연안부두는 해양도시인 인천 중구의 상징이며, 중국의 연안도시를 카페리로 연결하는 동시에 연안 미지의 섬으로 떠나는 여객터미널이 존재한다.

 

 

 

인천 연안부두 해양광장 표지석과 전망대에서 본 광장

 

 

 따라서 연안부두는 수많은 여객선과 물류가 이동한다. 백령도, 대청도, 연평도, 덕적도, 자월도, 이작도, 승붕도, 풍도 등으로 떠나는 사람들과 찾아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그런가 하면 아라뱃길, 팔미도 등으로 유람선이 출항하며 남항부두에서는 바다낚시 배들이 출항한다.

 

 

 

 

▲연안부두에는 연안여객선과 낚싯배, 유선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7천여㎡ 규모의 연안부두 해양광장에는 전망대, 야외공연장, 물놀이 터, 홍보영상관, 지하주차장을 갖추고 있어 시민들을 위한 쉼터 역할을 한다. 광장에는 봄~가을 매일 밤 돌고래 분수쇼가 이루어지고 주말에는 야외공연장에서 각종 음악회가 열린다.

 

 

▲연안부두 해양광장은 파도 모양을 형상화한 테크를 만들어 운치를 더했다.

 

▲연안부두 해양광장의 야외공연장

 

▲연안부두 광장의 물놀이 시설(홍보 팜플릿에서 가져옴)

 

 

▲연안부두 해양광장의 분수대

 

 

‘연안부두’ 노래탑

 

 

'연안부두' 노래탑

 

 

 연안부두 해양광장의 유람선선착장 입구에는 조운파 작사, 안치행 작곡의 ‘연안부두’ 노래탑이 서 있다. 가고 오는 사람들이 분주한 항구는 으레 삶의 애환이 넘치는 곳으로 작사자 조운파 선생은 그런 감정을 노래 가사에 담았다.

 

“어쩌다 한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

 

바람이 불면 파도가 울고/ 배 떠나면 나도 운단다

안개 속에 가물가물/ 정든 사람 손을 흔드네

저무는 연안 부두 외로운 불빛/ 홀로 선 이 마음을 달래주는데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

 

 

 

▲연안부두 전신주에 앉아 어딘가를 주시하는 갈매기들  

 

 

 ‘연안부두’의 작사가 조운파는 노래 작사 배경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가 원래 충청도 부여 출신이긴 한데, 학생 시절에 전학을 와서 인천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종종 연안부두에 앉아서 바다를 보내면서 시간을 보내고 했는데, 그 시절에는 인천 연안부두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고, 그래서 고깃배나 섬을 오가는 조그만 배들이 많이 드나들었거든요. 물론 간혹 외국을 오가는 배들도 있었고. 그래서 거기 앉아 있다 보면 이별하는 사람, 감격적으로 해후하는 사람, 망망대해를 그저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또 한 쪽에는 생선 파는 사람, 손님 소매를 끌어당기는 작부, 그런 모습들을 항상 보곤 했죠. 그런 다양한 삶의 애환, 로맨스, 절망, 눈물과 기쁨, 그런 것들이 가슴에 새겨져 있다가 나중에 노래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한 번 써보게 된 것이죠."

 

(SK 와이번스 용틀임 마당 '김은식 칼럼' - 야구장의 삼십년 합창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중에서)

 

 

 

 

 

 

 이 노래는 1979년 김트리오가 부른 대중가요이지만 응원가로 더욱 유명하다. 스포츠와는 무관한 가사를 갖고 있지만,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팀들은 물론 인천고, 제물포고, 인하대 등 인천의 학생 스포츠 팀들까지 오랫동안 응원가로 사용해 유명해졌다.

 

 어쨌든 연안부두는 부두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풍경과 모습 때문에 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드나드는 배를 멍하니 바라보거나 하릴없이 광장 한 모퉁이에 앉아 갈매기와 함께 놀기도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으로 명명되다.

 

 

▲광앙 입구에 중세 러시아 건축 양식인 비잔틴 양식으로 세워진 2개의 거대 기둥

(문주)

 

 

 그런데 연안부두 해양광장은 2011년에 와서 러시아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그 이유는 2010년 9월 인천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우호협약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천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우호협약을 맺게 된 데는 1904년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러일전쟁 당시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제정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 바랴크호(Varyag)와 크레츠호(Koreets)는 일본군의 급습을 당해 큰 손상을 입게 되었고, 적군에게 함선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항복 대신 자폭을 선택해 스스로 인천 앞바다에 침몰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후 인천은 러시아의 요청에 의히여 제물포해전에서 당시 사용되었던 깃발을 러시아에게 임대해 주게 되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인천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도시는 우호도시로 결연을 맺고 교류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러시아 함대 바랴크호(Varyag)와 크레츠호(Koreets)가 자폭한 현장인 인천 연안부두 해양광장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으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표지석

 

 

▲연안부두 해양광장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으로 명명된 경위 설명

 

 

 광장의 입구에는 중세 러시아 건축 양식인 비잔틴 양식으로 세워진 2개의 거대 기둥이 자리 잡고 있어 러시아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 설치된 러시아의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

 

 

 광장 안으로 들어서면 러시아의 전통 인형인 마트료시카가 전시되어 있다. 마트료시카는 러시아말의 어머니란 뜻을 가진 "마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풍요와 다산을 상징한다. 이 인형은 인형 안에 조그만 인형이 반복해서 겹쳐있는 형태의 독특한 형태이다. 인천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에 전시된 마트료시카 역시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겹 겹치는 인형의 형태를 볼 수가 있다.

 

 

러시아 승조원 추모비

 

 

러시아 승조원 추모비

 

 

 또 광장에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한 러시아 바랴크(Varyag)함 승조원의 추모비도 있다. 순양함 <바랴크>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러시아 선원들의 영웅적인 희생 100주년 기념으로 2004년 2월 인천시에서 설치한 것이다.

 

 러시아는 해군 수병 추모비 건립을 위해 모스크바에서 대리석을 직접 공수하고 러시아 최고의 조각가인 ‘안드레이발라쇼브’를 인천에 파견해 건립비를 제작했다. 추모비에는

 

<순양함‘바랴크’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러시아 선원들의 희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2004년 2월 11일>

 

 이라는 문구가 국어, 영어, 러시아어 등 3개 국어로 새겨져 있으며 추모비 뒤편에는 거친 파도 위에 러시아 해군 수병의 모자가 떠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조물 1점도 함께 건립됐다.

 

 

순양함‘바랴크’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선원들의 희생 100주년을 기념추모비

 

▲추모비에는 러시아 수병의 모자와 컵 등이 조각되어 있다.

 

▲러시아 선원 희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에서 보내온 추모글

 

▲러시아 순양함 바랴크 호 추모비 안내문

 

 

 매년 주한 러시아대사관 주최로 이곳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이런 이유로 연안부두 해양광장은 러시아인들에게 용감하고 영웅적인(heroic) 이야기가 있는 곳으로 기억되고 있어 러시아 관광객들의 필수코스로 꼽힌다. 2013년 11월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인천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3년 1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인천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방문 기념 

 

 

 한편 러시아는 이에 대한 답례 차원으로 2018년 10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론슈타트 요새에 인천광장을 조성하여 두 시와 양 국가 간의 지속적인 우호 교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배호의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노래비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를 부른 배호의 노래비

 

 또한 인천 연안부두 해양광장에는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를 부른 배호를 기리기 위해 2011년 10월 그의 흉상과 함께 노래비가 세워졌다. 노래비는 배호 흉상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가사를 적은 비석, 오른편에는 배호의 사진과 일대기를 담은 비석으로 구성됐다.

 

 "보슬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오고가는 연락선에 사랑도 운다.

기막힌 사연만 남은 항구야/ 조수처럼 왔다가 가는 사람아

아~아~아 인천항 부두에 비만 내린다.

 

이별도 서러운 인천항부두/ 떠나가는 뱃머리에 사랑도 운다.

갈매기 짝 잃은 인천항구야/ 고동처럼 울다가 가는 사람아

아~아~아 인천항 부두에 비만 내린다."

 

 배호는 인천과 인연이 많은 가수다. 1942년 중국 산둥 성에서 광복군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 후 1946년에 귀국하여 처음 정착한 곳이 인천이다. 이후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평 미군 부대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가수로 성장한다.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가사

 

 1963년 데뷔했지만 무명 신세를 떨치지 못하다가 1967년 ‘돌아가는 삼각지’로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에도 특유의 호소력 있는 중후한 저음으로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비 내리는 인천항 부두’ 등의 대표곡을 선보이며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그러나 신장염으로 1971년 29살의 나이로 요절하며 짧고도 강렬한 생을 마감했다.

 

 또 연안부두 해양광장 인근에는 인천항1국제여객터미널과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인천종합어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인천종합어시장에는 사시사철 늘 사람들로 붐빈다. 좀 더 싱싱하고 저렴한 가격에 생선과 젓갈을 사려는 이들이 이곳을 즐겨찾기 때문이다. 또 수협에서 직영하는 회센타 (일반시중가의 60~70%선)가 즐비하고 해수탕도 여러 곳 있다. 최근에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인천 연안부두 주변 약도

 

 인천항1국제여객터미널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인천항 연안부두 팔미도유람선 매표소와 전망대

 

▲유람선매표소

 

인천종합어시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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