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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황홀한 사랑 노래한 아가서, 억압된 여성의 성 바로잡아

by 혜강(惠江) 2018. 11. 25.

진흙 속의 진주, 아가서

 

황홀한 사랑 노래한 아가서, 억압된 여성의 성 바로잡아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2005년 아론 에이프릴 작. 아가서 (Song of Songs-Last).

 

  아가서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성경에 묘사된 성(性)은 원시사회의 지독한 남성 우월적 색채가 짙게 입혀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자의 성적 즐거움은 성경에서 늘 음란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이렇게 억압되었던 여성의 성을, 다시 꽃처럼 활짝 피워 예쁘게 담은 책이 바로 아가서다.

 

 아가서의 기원은 결혼식 축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남녀의 생생한 사랑 행위를 각종 비유와 완곡한 표현으로 노래하는 시인데, 후대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사랑으로 해석되어 성경에까지 안착하였다. 그래도 하나님과의 사랑을 이렇게 까지 진하게(?) 표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지나치게 에로틱하다 하여 성경 목록에서 탈락할 뻔도 하였다. 하지만 아가서가 없었더라면, 성경은 성의 무덤 같았을 책이 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가서는 성경 안에 들여졌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오해될 수 있는 성경의 성을 바로잡아 주셨다.

 

 아가서의 언어는 완곡법의 ‘마술’이 걸려있다. 상상 할 수 있을 만큼, 경험한 만큼만 보인다. 아쉽게도 처녀 총각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 많다. 이들에겐 그저 심미적인 노래일 뿐. 아가서는 그 시작부터 신부가 조금도 주저 없이 사랑의 욕구를 노래한다.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임의 향내, 따라놓은 향수 같아. 임을 따라 달음질치고 싶어라. 나의 임금님, 어서 임의 방으로 데려가 주세요.”(아가서 1:2-4)

 

 신부의 성적 로망을 잘 보여준다. 입술, 달콤한 포도주, 향내, 싱그러움 같은 ‘볼 빨간’ 단어들의 향연이다. 빨리 방으로 데려가 달라는 간청으로 자기의 에로티시즘을 마무리 한다. 포르노물의 적나라함이 에로티시즘의 묘미를 잃어버렸다면, 아가서의 심미적 묘사는 이를 잘 살리고 있다.

 

 신부는 좀 더 과감한 표현을 망설이지 않는다. “나의 가슴 사이에 품은 유향 꽃송이 같은 내 사랑. 엔게디 포도원에 핀 헨나 꽃송이어라.”(1:13-14) 포도원은 아가서에서 여성의 성이나 성기를 일컫는 표현이다. 사랑하는 신랑이 자기의 가슴과 은밀한 곳에 꽃처럼 머물러 있다 한다.

 

 신부의 노래는 더 숨 가빠진다. “사내들 가운데 서 계시는 그대, 나의 임은 잡목 속에 솟은 능금나무, 그 그늘 아래 뒹굴며 달디 단 열매 맛보고 싶어라. 사랑의 눈짓에 끌려 연회석에 들어와 사랑에 지친 이 몸, 힘을 내라고, 기운을 내라고, 건포도와 능금을 입에 넣어주시네. 왼팔을 베게 하시고, 오른팔로 이 몸 안아주시네. 들판을 뛰노는 노루 사슴 같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흔들어 깨우지 말아다오.”(2:3-7)

 

 학자들은 솟은 능금나무, 열매, 건포도, 능금 등이 매우 성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순진한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독자 분들은 잘 아셨으면 좋겠다. 팔베개를 하고 안고 있으니, 무슨 장면인지는 분명하다. 이 사랑의 묘약에 취하여 깨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이 여인의 성적 바람임을 예쁘게 노래한다.

 

 여인은 자기의 성, 포도원이 무르익어 주체할 수 없다고 애교스럽게 표현한다. “여우 떼를 잡아주셔요.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밭을 짓밟는 새끼 여우 떼를 잡아주셔요.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2:15-16) 한창인 자기의 성을 다른 이(여우)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고 오직 임에게만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에스겔서나 호세아서가 묘사한 여자의 음란과 매우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 진한 성애는 단지 육욕이 아니라 임을 향한 애틋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은밀한 사랑을 나누고파 임을 찾아 헤매는 여인의 모습이 음란은커녕 사랑스러워 보인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 데 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물으며 지나치다가 애타게 그리던 임을 만났다네. 나는 놓칠세라 임을 붙잡고 기어이 어머니 집으로 끌고 왔다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이 방으로 들어왔다네.”(3:1-4)

 

1921년 파울 클레 작. 아가서 II (Aus den hohen Lied, II Fassung).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신랑의 신부 예찬은 아름답지만 너무 길어서 생략한다. 신랑이 탐하는 신부와의 사랑놀이가 이렇게 노래된다. “나의 신부여! 그대 입술에선 꿀이 흐르고 혓바닥 밑에는 꿀과 젖이 괴었구나. 옷에서 풍기는 향내는 정녕 레바논의 향기로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울타리 두른 동산이요, 봉해 둔 샘이로다. 이 낙원에서는 석류 같은 맛있는 열매가 나고, 나르드, 사프란 창포, 계수나무 같은 온갖 향나무도 나고, 몰약과 침향 같은 온갖 그윽한 향료가 나는구나. 그대는 동산의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어라.”(4:11-15)

 

 입술, 혀, 꿀과 젖, 석류, 창포, 향나무, 몰약, 더 나아가 동산과 샘, 생수가 솟는 우물, 흘러내리는 시냇물 등. 시각과, 촉각, 후각, 미각 등 인간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황홀한 사랑을 노래한다. 적나라하지만 심미적이어서, 완곡히 내비치는 그 묘사가 더 없이 에로틱하다.

 

 이 예찬에 여인은 한층 더 고조되어 이렇게 응한다. “북풍아, 일어라. 마파람아, 불어라. 나의 사랑하는 임이 이 동산에 오시어 달콤한 열매를 따 먹도록, 내 동산의 향기를 퍼뜨려라.”(4:16) 이 정도면 ‘에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심미적 색채로 빼어난 에로티시즘을 전하는 성경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 드디어 신랑과 신부의 몸은 서로 결합한다. “나는 자리에 들었어도 정신은 말짱한데, 사랑하는 이가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 ‘내 누이, 내 사랑, 티 없는 나의 비둘기여, 문을 열어요. 내 머리가 온통 이슬에 젖었고, 머리채도 밤이슬에 젖었다오.’ ‘나는 속옷까지 벗었는데, 옷을 다시 입어야 할까요? 발도 다 씻었는데, 다시 흙을 묻혀야 할까요?’ 나의 임이 문틈으로 손을 밀어 넣으실 제 나는 마음이 설레어 벌떡 일어나 몰약이 뚝뚝 듣는 손으로 문을 열어드렸네. 내 손가락에서 흐르는 몰약이 문고리에 묻었네.”(5:1-5) 설명 보다 침묵이 본문이 의도하고자 하는 가장 적절한 상상을 야기하리라 생각된다.

 

 사랑을 나눈 신랑이 그만 시인이 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난 신부가 침상 옆에서 발견한 듯한 쪽지에는 신랑이 이렇게 적어 놓았다. 엉큼함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한다면 눈살이 찌푸려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즐겁게 하는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내려서 자는 자의 입을 움직이게 하느니라.”(7:1-9)

 

 사실 매우 적나라하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에 비하여 그 문학적 상상력이 화려하고 즐겁다. 전자가 성기결합(intercourse)과 같은 적나라함이었다면, 아가서 구절들은 맛있는 에로티시즘의 진수성찬이다.

 

 성경은 그저 가리려고만 했던 오랜 교회 교육의 무게를 쉽게 던져버리질 못했다. 그 바람에 아가서와 같은 책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읽어야만 했던 책이다. 엄밀한 페미니스트들이 보자면 여전히 모자라는 바가 있겠지만, 아가서는 탈-남성주의적 성의식을 말하며 여성의 성을 자유롭게 해방시켰다. 음란이란 이름으로 억압된 성서의 성을 바로 잡아주는 고마운 책이기도 하다. 여느 묘사보다도 더 에로틱하면서도 그 품위를 지키고 있어서 고맙다. 저질 미디어가 토해내는 성 공해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해준다. 아가서는 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익한 교과서며, 그 황홀한 사랑을 하나님과의 사랑과도 연계하여보라는 하늘의 계시이기도 하다. (본 글은 필자의 저서 ‘구약의 뒷골목 풍경’ 일부를 수정 발췌한 것임.)

 

<출처> 2018. 11. 24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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