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올바른 세계관
바울이 쓴 로마서… ‘로마의 평화’를 죄악의 세계로 바라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 320년 '로마 검투사간의 결투'. 이탈리아 보르게제 공원에 있는 모자이크 작품. 로마 검투사 레티아리우스가 세쿠토르를 찔러 죽이고 있다.
성경에는 모두 66권의 책이 있다. 이 책들 가운데에 우열이 있겠느냐만, 그래도 가장 손꼽히는 책이 있다면 ‘로마서’일 것이다. 바울이라는 당시 유대교 대 학자가 저술했으며, 기독교 교리의 초석 같은 책이다. 책 제목에는 그런 신학적 주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이 로마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했던 서신이었음 만 나타낸다. 책 제목에 언급된 ‘로마’는 이 책을 이해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일까?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이다. ‘로마의 평화’를 뜻한다. 로마 제국이 최소한의 군사적 행위를 하며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유지했다고 여겨지는 1~2세기 즈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런 연속적인 평화가 인류 역사상 매우 드물게 있었던 일이라고 본다. 바로 이 시기에 바울의 로마서는 제작되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야 한다. 로마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어느 누구든지 의롭게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적은 글을 직접 읽어 보자.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서 1:16-17)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민족에게만 향한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신념에 비추어 보자면, 이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예수를 비롯한 초기 예수 추종자, 그리고 바울도 모두 유대인이었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열심히 드렸던 유대교적 제의나 율법 준수는 필요 없고 어머니나 아버지도 꼭 유대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민족이나 인종에 상관없이 어느 누구든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것이 구원의 관권이 된다. 로마서는 이렇게 매우 개인적인 인간의 영적 구원을 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로마서가 적혔던 때, 로마 제국은 영화로운 팍스 로마나를 즐기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영화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콜로세움과 글래디에이터(로마 검투사), 마차 경기, 로마 원로원, 시저와 브루투스,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으며, 이 힘으로 넓은 지역을 통치했다. 그들의 선진 헬라 문명과 철학은 잘 닦여진 로마의 도로와 기구들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는 이와 같았다. 이 시기에 예수는 태어났고,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매우 영향력 있는 종교로 성장해 나아갔다.
로마서는 사실 이와 같은 로마의 실정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로마의 사회를 말하면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세계관이 무엇이어야 할지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바라보는 로마는 죄악의 세계다.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1:29-31)
위에 나열된 단어들은 로마의 영화를 상징하는 콜로세움과 정확히 부합하는 색채를 띠고 있다. 도망갔다 잡혀온 노예들과 전쟁 포로, 검투사들이 오직 로마인들의 유희를 위해 흉악하고 무자비하게 살해된 곳이 여기다. 이런 죽음을 즐기는 이들에게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5:8) 타인의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이던 곳에서, 타인의 유익을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죽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로마 사람들에게 실로 생경스럽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기독교는 역사적 유산인 로마서를 성경, 즉 하나님의 계시로 여긴다. 이는 로마서가 말하는 예수의 죽음과 로마의 죄악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보편 적용이 되어야 함을 적극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가 지금도 당신을 구원으로 초청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로마 제국처럼 악하다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시는가?
세상과 철저히 결별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악한 속성은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로마 제국 안에서 예수가 자신을 희생하고 인간을 구원하려 했던 것처럼, 기독교는 온갖 노력을 다하여 사람들을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로마서는 개인의 영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올바른 세계관도 이렇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 바다 속 '먹이 피라미드'. 포악한 소수 강자들이 다수 약자를 소모하는 구조다.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구출하는 구원 행위는 모세의 삶에 전조된 바가 있다. 성경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에는,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 피라미드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 노역하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한 이야기가 나온다. 흥미롭게 생각해 보자면, 이 피라미드 모양이 상징하는 바가 의미 있다. ‘먹이 피라미드 (The Food Pyramid)’라는 개념이 있다. 먹이 피라미드에서 채소나 과일 같은 식물은 피라미들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해 있다. 반면 포악한 육식 동물들은 맨 위에 있다. 먹이 피라미드 속에서는, 상위에 속하는 소수 강자들이 살기 위해서 나머지 다수를 소모한다. 이집트에서는, 상위에 속하는 소수의 이집트 왕궁이 있었으며 바닥에는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소모되었던 히브리 노예들이 있었던 것이다.
로마 제국도 먹이 피라미드 안에 파악된다. 특권을 누리는 상위의 강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로마인들 위에 군림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로마의 노예 수는 일반 시민의 10배였다고 한다. 억압받던 이들이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상위층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팍스 로마나는 사실 진정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화는 군림하는 소수 상류층만 누리는 것이었고, 대다수의 시민은 그 아래 착취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가 악한 도시라고 묘사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도 먹이 피라미드 안에 있다. 친구와도 경쟁하여 이겨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뒤처지고 동료로부터도 착취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 피라미드 구조 속 어느 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층으로 가기 위해 이웃과 친구를 밟으며 올라서고 있다. 우리가 진실하다고 여기는 가치와 행복을 주변인들과 평화롭게 나누며 살아가기 어렵다. 이웃은 나의 적이거나 먹잇감이다. 먹이 피라미드는 이집트나 로마에만 있던 것이 아니며,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도 그러하다.
소위 선진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해도 안전하지 않다. 여전히 세상은 이웃과 경쟁하여 이기고 앞서 나가기를 종용한다. 이를 부추기는 ‘악’은 우리 사회의 여러 정책이나 교육, 이념의 옷마저 입고 사회를 흉흉하게 만든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하지 않던가.(고린도후서 11:14)
반면 성경은 말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태복음 22:39)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세계관이 달라야 한다. 기독교인에게는 순응하기 보다는 저항해야 할 세상의 법칙이 많다. 그리고 그 세상의 법칙으로부터 이웃을 구해내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다. 마치 모세와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먹이 피라미드 안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를 밟고 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뒤쳐져 있는 동료들이 올라서기 위해 자신이 그들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사회 안에서 연약하고 뒤쳐진 이들을 돌보고 끌어주는 사람, 약자의 친구가 되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출처> 2018. 12. 1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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