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학부 학생 한 명이 느닷없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고민이 되는 것이 있다며 내 앞에 종이를 들이민다. 알 수 없는 문자로 무언가 잔뜩 적혀 있었다. 학생이 말하기를, 얼마 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고대 문헌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성경의 창세기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과연 성경이 유일무이한 신의 계시가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산스크리트어나 문헌에는 문외한이라 정말 창세기와 유사한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내 책장에서 네댓 권의 책을 뽑아 보여주고 싶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창세기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주변 민족의 신화들을 담은 책이었다. 산스크리트어 문헌까지 보지 않아도, 성서와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이미 충분히 밝혀져 있다.
성서학과 기독교가 제일 앞서 흥왕했던 서구사회에서도 거의 19세기까지는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서구 강국들은 중동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이때 문서들도 많이 발견되었고, 해독하여 본 결과 내용이 성서 이야기들과 유사하여 당시 기독교인들을 꽤 당황시켰다.
특히 창조 이야기들이 주목을 받았다.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7일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흙을 빚은 다음 생기를 넣어 인간을 만드셨다는 창세기 1~2장의 기록은, 유대ㆍ기독교만의 유일한 이야기일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의 이라크 니느웨(Nineveh)나 십발(Sippar), 닙푸르(Nippur) 등지에서 발견된 수메르ㆍ바벨론 문명의 창조 이야기들은, 성경의 창세기 기록과 견줄 만큼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전혀 유사해 보이지도 않는다. 색다른 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벨론의 신화 ‘에누마 엘리시’에서는 마르두크라는 신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생기가 아니라 그가 무찔러 죽인 다른 신의 ‘피’를 섞었다. 창세기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능 있는 창조 행위가 부각된다. 하지만 에누마 엘리시에서는 혼돈과 공포의 세력을 무찌르고 왕이 된 마르두크를 찬양하고 기념하는 행사 가운데 하나로, 인간과 세상이 창조된다. 에누마 엘리시에서 타파된 혼돈과 공포는 창세기의 창조 직전 혼돈과 유비되기도 한다. 정말 엇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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