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리 자작나무 숲
곧게 뻗은 자작나무는 고상하고 단아했다.
글·사진 남상학
▲1코스의 자작나무 숲길
11월 12일, 미세먼지 수도권 ‘아주 나쁨’, 영동지방 ‘보통’이라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아내와 함께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며칠 전, 좋은 벗님들과 가려다가 비가 와서 가지 못해 아쉬웠던 곳이다. 좋은 벗님들과 동행하지는 못 했지만 아무 계획 없이 갑자기 떠나는 여행은 또 따른 묘미가 있다.
▲자작나무 숲 안내판
원대리자작나무 숲은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 75-22에 자리한다.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서울에서 춘천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에서 내려서서 44번 국도를 탄다. 30여분 쯤 달려 신남을 지나고 3·8대교 못 미쳐 삼거리 오른쪽 길가에 ‘원대리 자작나무 숲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보이면 우회전한다. 편도 1차선 길은 인제종합장묘센터 앞을 지나 남전계곡을 끼고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간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산 언저리에 걸터앉았던 안개가 점점 옅어지더니 어느 새 아침 햇살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안개가 걷히자 하늘이 청명해 지고 마음까지 맑아진다.
▲임산물판매장에서 우측으로 난 원정임도(3.2㎞)를 걸어서 1코스를 걸었다.
▲임도로 오르는 곳곳에 쉼터가 있어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대리자작나무 숲 탐방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 건너에 있는 안내소를 겸한 산림감시초소, 임산물판매장에서 시작한다. 안내소에서 여러 등산로로 갈라지지만 그 어떤 길을 택해도 천천히 걸어 3시간이면 자막나무 숲을 만나고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산불조심 입산통제기간이어서 우측으로 난 3.2㎞의 임도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임도는 약 10~20도의 경사가 있으나 임도 치고는 잘 가꾸어 놓은 길이라 남녀노소 모두 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자작나무 숲길로 올라가는 임도가 잘 닦여져 누구나 오를 수 있다.
길은 초입에서 멀어질수록 조용해지고 깊어진다. 군데군데 뽀얀 속살 같은 하얀 살을 대범하게 드러낸 ‘나무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자작나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1시간 정도 걸려 땀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 해발 1,100m의 산 정상에서 자작나무 숲과 마주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수천 그루의 자작나무 숲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해발 1,100m의 산 정상에 오르면 바로 1코스 산책길로 이어진다.
물 흐르듯 ‘ㄹ’자로 만든 계단을 밟고 내려간 자작나무숲에는 순백(純白)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비밀의 숲 속에서 요정들이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다. 산림청은 원대리 원대봉(684m) 능선 약 138㏊(41만여 평)에 자작나무 70여만 그루를 심었다. 1990년대 초반에 조림되었으니 스무 살을 넘겼다. 나무의 가슴높이 지름은 평균 14㎝, 평균 높이는 10m다. 이 숲은 2012년이 되어서야 개방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2018년 10월 산림청이 국유림 명품 숲으로 선정된 바 있다.
▲자작나무 숲 속에는 자작나무 숲속 교실, 자작나무 움막 등 시설도 갖춰져 있다.
자작나무는 영화 속의 장면 - 광활한 겨울 들판의 하연 눈발을 달리는 시베리아의 기차 주변으로 스치는 늘씬한 나무들이었다. 그 기억 속 이색적인 장면의 나무들을 이 땅에서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 자작나무가 온산 가득히 마치 목책을 두른 듯 산허리를 감싸고돈다. 남쪽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북방에만 사는 눈을 닮은 자작나무. 하얀 수피는 글 쓰는 노트가 되고 화가에게는 도화지가 되고, 길을 걷는 이에게는 길동무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인들은 영적 능력을 지닌 신의 선물이라 여겼고 껍질에 소원을 쓰면 이뤄진다고 믿기도 했다. 기름을 머금은 나무는 워낙 불이 잘 붙어 타는 소리가 자작자작 해서 자작나무라 했다던가.
▲자작나무 숲에 들어서면 사방이 자작나무 뿐이고, 고개를 들면 뻥 뚫린 하늘을 엿볼 수 있다.
자작나무는 사시사철 아름답지만 가을 단풍 옷을 막 벗어던진 숲의 모습은 속살을 드러낸 맨몸처럼 군더더기 없이 미끈하다. 선비의 지조처럼 곧게 뻗은 자작나무는 고상하고 단아한 모습이 귀족과 다름없다. ‘텅 빈 충만’이랄까 여기저기서 하얀 알몸을 한 자작나무가 ‘자작자작’ 가을 얘기를 들려준다. 향긋한 나무 냄새가 코에 스며들고 머릿속은 하얗게 맑아진다.
귀인의 살결 같은 수피는 황홀한 은빛을 발산했다. 나무 아래에서는 이미 겨울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이 자작나무를 원형으로 세워 묶은 자작나무집을 원시인처럼 들락거리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 옆에 긴 자작나무를 나무의자 삼고 앉아서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자작나무숲에 들어서면 자작나무 코스(0.9㎞), 치유 코스(1.5㎞), 탐험 코스(1.1㎞), 힐링 코스(2.4km)가 있다. 힐링 코스를 제외하면 한 바퀴 둘러보는데 50여분이면 충분하다. 자작나무숲에는 전망대, 쉼터, 가로 숲길, 통나무로 만든 인디언 집, 생태연못 등 테마시설을 조성해 방문객에게 각종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여기에 유아숲체험원 등 유아의 신체·정신적 발달을 돕기 위한 산림교육프로그램 등을 운영,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사계절 찾는 이들이 많다.
불과 몇 시간이지만 자작나무 숲에서 보낸 시간은 세상 풍파에 시달려 상처받은 내 영혼의 찌꺼기들이 모두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두 팔을 벌려 모든 것 다 품어주는 치유의 능력을 지녔다고나 할까.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을 주신 조물주에게 무한 감사를 드리며 나오는 길에 시인 백석(1912~1995)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쓴 〈백화(白樺)〉란 시를 음미해 본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이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이 자작나무를 보며 더 꾸밀 것도 속일 것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내어 주는 나무라고 했다. 백석은 이런 자작나무가 사는 마을에 살며 소박함과 구수함이 밴 맛깔스런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가 좋아하는 메밀국수를 끓여내던 자작나무가 오늘은 이곳을 찾는 노년의 부부에게까지 순백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 한편을 선물한 것이 아닐까.
이제 겨울 문턱에 들어 선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도 자작나무 껍질을 닮은 눈이 하얗게 덮일 것이다. 자작나무숲은 겨울이 오면 겨울이 오는 대로 또 다른 시를 쓸 것이다. 지금의 낙엽풍경에 눈부신 하얀 살로 하늘높이 길게 뻗은 키다리 나무들과 어울리는 천사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원대리 자작나무숲 인근 옛날원대막국수(자작나무 술길 1113, 033-462-1515) 집을 찾아갔다. 사람들이 꽤 있었다. 평일인데도 이런 산촌에 사람들이 찾아온다니 꽤나 유명한 맛집인가 보다. 막국수와 감자전이 주 메뉴인데, 소박하고 담백한 맛이 자작나무를 닮아 있었다.
▲막국수, 감자전, 편육이 맛있는 옛날원대막국수
▲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으로도 불리는 '원대리자작나무 숲' 위치
* 자작나무 숲 운영시간
하절기 (05.16~10.31) 09:00~18:00 (15시부터 출입금지)
동절기 (12.16~01.31) 09:00~17:00 (14시부터 출입금지)
입산통제 기간 : 산불예방, 자연경관유지, 자연환경보전 및 그 밖에 산림보호를 위하여 2월부터 5월 15일까지, 가을철에는 11월부터 12월 15일까지 입산을 통제하니 유의해야 한다.
11월 1일부터는 원칙적으로 입산통제지만, 원정임도(3.2㎞) 구간은 탄력적으로 운영하니 출발 전에 사전 문의하시기 바람 (연락처 : 033-460-8030~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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