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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배경 통영, '딸들의 비극’까지 품었을까

by 혜강(惠江) 2018. 9. 15.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배경 통영 

 

 

맑고 푸른 ‘한국의 나폴리’ '딸들의 비극’까지 품었을까

  

 

글·사진 = 김진 동화작가 

 

 

 

 

 

▲  통영 서피랑에서 내려다본 강구안 전경. 푸르고 맑은 바다색을 가진 통영에서 박경리를 비롯해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등은 주옥같은 작품의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간창골에 자리잡은 김약국의 집, 서문고개 너머 셋째딸 용란의 집  
강구안엔 뱃놈 기두의 목소리가 

영아 살해한 첫째·노처녀 둘째·미치광이 된 셋째·익사한 넷째  
통영 떠돌던 悲劇 모아 묶어내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고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첫 문단이다. 소설은 이 문장들로 시작해 한 장을 먼저 통영이라는 도시의 묘사에 바친다. 세세하고 속도감 있는 묘사는 통영을 그린 듯이 생생하다. 

 통영에 실제 가보지도 않고 통영의 빛깔을 쉽사리 떠올리는 것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 덕분이다. ‘조선의 나폴리’라는 비유에서 떠오르는 푸르디푸른 하늘과 바다가 눈에 훤히 그려진다.  

 박경리 선생의 문학적 토대는 통영이다. 정신적 곳간도 통영이다. 통영의 골목, 선창, 바다, 섬과 사람들은 박경리 선생의 작품들 곳곳에 배치되어 숨 쉬고 있다.

 ‘김약국의 딸들’은 1900년부터 1930년 전후까지의 통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통영의 토호인 김약국 사람들의 몰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삶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김약국의 딸들이 겪는 비극은 둘째 딸 용빈이 그를 사모하는 강극에게 털어놓는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났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 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배가 침몰되어 물에 빠져 죽은 거예요.”

 용빈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넷째 딸 용옥이 배가 침몰되어 죽은 데에는 비극적인 상황이 숨어 있다. 셋째 딸 용란(발광한 동생)을 맘에 두고 있는 기두와 결혼한 용옥은 남편에게 냉대를 받고 외롭게 살았고, 시아버지의 겁탈을 피해 남편이 가 있는 부산으로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배 사고로 아들과 함께 죽었던 것이었다.

 어릴 적 이 소설을 읽고, 그 비극적 삶을 감당하지 못해 오랫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삶은 전체적으로는 비극이라는 아주 어두운 명제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그들의 비극을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그들의 비극이 보편적 삶의 단면이라는 것과 그 보편적 비극에서 삶의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애는 아픔이나 슬픔, 고통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서피랑 공원 입구에 새겨진 박경리 작가의 글.


 

소설에서 강극은 용빈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퍽 오래된 얘기군요. 그것을 본 기억이 희미하지만 후일에 그 얘기를 몇 번 아니 수백 번 들었어요. 저의 아버지는 혁명가도 아니었고 우국지사도 아니었어요. 다만 부자였지요. 그 아버지가 왜놈들에게 타살된 거예요. 머슴이 시체를 말에 태워가지고 왔더군요. 지금은 아슴푸레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게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 누이가 지금 왜놈하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용빈 씨 혼자만이 비극을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니죠.” 

 어쩌면 박경리 선생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당신만이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당신의 삶만이 특별히 비극적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와 같은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처참한 비극에 비한다면 나의 비극은 얼마나 가벼운가, 하는 위안을.

 박경리 선생의 표현대로 ‘북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육로’를 따라 통영에 들어선다. “벼랑 가에 얼마쯤 포전(浦田)이 있고, 언덕빼기에 대부분의 집들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는 소설 속 풍경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큰 건물과 상가들이 들어앉은 풍경으로 변신해 있다. 이 작품은 1963년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속 풍경은 소설에서 묘사된 통영 포구와 ‘언덕빼기의 송이버섯 집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통영은 세병관(洗兵館)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성문이 있었다. 세병관은 1605년(선조 38년) 완공한 조선 삼도수군 통제영 본영(三道水軍 統制營 本營)의 중심 건물이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통제영에서 온 것이다. 한때 이곳은 통영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었고, 박경리 선생은 이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세병관 너른 마루에 앉아 통영 시내를 내려다본다. 오른쪽은 서포루와 뚝지, 왼쪽으로는 동포루가 멀리 작은 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병관을 똑바로 걸어 내려가면, ‘뱃놈’ 기두(넷째 딸 용옥의 남편)의 거친 목소리가 들릴 듯한 강구안(육지로 바다가 들어온 항구)이 나온다. 소설에서는 이곳 풍경을 ‘푸른 가스등이 포장 밑에서 흔들리고, 항만에 배가 들어오면 부둣가는 순식간에 고함 소리와 뱃고동 소리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무리로 혼잡을 일으키는 곳’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강구안 바다는 안온하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돌아온 고깃배들은 항구에서 평안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거북선의 모형도 여러 척 있어 임진왜란 한산섬 앞바다에서 왜군을 전멸시킨 격전을 떠올리게 한다.  

 항구 앞에는 유명한 충무김밥을 파는 식당과 꿀빵집, 카페들이 줄을 지었고, 중앙시장 안에는 수산물이니 공산품까지 없는 게 없다. 과거 이곳은 ‘싸구려 화장품이며 비눗갑, 혁대 등 주로 뱃사람, 섬사람을 상대로 파는 잡화’가 풍성한 장터였음을 알 수 있다.

 중앙시장에서 다시 세병관 방향으로 나오면 가파르게 언덕을 향해 뻗은 도로가 나오는데, 그 도로 오른편이 간창골이다. 옛날 관청이 있는 고을이라고 해서 관청골인데, 아마도 경상도식으로 발음하다 ‘간창골’이 된 듯하다. 이 간창골에 김약국의 집이 있다. 그리고 도로를 따라 쭉 가파르게 걸어 올라가면 서문고개가 나온다. 서문고개 꼭대기에는 자그마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마을 입구에는 ‘서문고개’ 표지석이 있고, 박경리 선생의 육필 원고를 돌에 새겨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옆 골목으로 조금만 가면 박경리 선생의 생가가 나온다.  

 서문고개 너머는 용란이가 아편쟁이 연학이에게 시집와 살던 대밭골이다. 아편쟁이 연학이에게 맞아 한밤중에 친정에 찾아오면, 친정어머니인 한실댁은 용란이를 데리고 서문고개를 넘곤 했다. 

 “서문 밖에는 안뒤산의 한 줄기인 뒷당산이 있는데, 그 뒷당산 우거진 대숲 안에 충무공을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소설 속 기술처럼 서문고개를 넘어 아래로 내려가니 충렬사가 나온다. 통영읍이 시로 승격될 때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 한때 충무시로 불릴 만큼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많다. 한산대첩 전적지인 한산도와 이순신공원과 동상 등이 있어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충렬사 맞은편 마을에 ‘박경리길’이 있다. 좁은 골목을 걸어 들어가면 박경리 선생의 문장들이 이 벽에 적혀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며 골목을 걷는다. ‘나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싶다’는 박경리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으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의 깊이가 전해져 온다. 불행한 출생,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 그리고 암 선고 등 고통은 끊임없이 그를 찾아왔지만 그는 그 고통을 딛고 견뎌냈다.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 
 ‘문학은 삶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모든 학문은 삶의 현장이며 삶은 모든 학문의 기초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골자입니다.’ 

 

 뼈에 새겨질 만큼 엄중한 박경리 선생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골목을 빠져나가면 서피랑이 나온다. 서포루에 올라 간창골과 세병관, 강구안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멀리 동피랑 언덕도 바라본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바람 속에 실려 온 ‘김약국의 딸들’의 비극적 삶을 생각한다.  

 선생은 통영에 떠돌던 비극적인 이야기를 모아 한 집안의 이야기로 묶어 냈다고 한다. 욕망에 충실하고 솔직했기 때문에 불행했던 여인들의 삶을 통해 실은 여성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와 시대의 문제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남성중심의 억압된 구조 속에서 학대당하고 억눌려야 했던 여성들의 비극을 박경리 선생은 김약국의 다섯 딸을 통해 깨우쳐 준다. 

 ‘조선의 나폴리’라고 할 만큼 푸르고 맑은 바닷빛을 가진 통영. 박경리를 비롯해 시인 유치환, 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 수많은 예술가의 도시이자 백석, 정지용 등 예술가들이 사랑한 도시 통영은 문학뿐 아니라 섬세한 수공업이 발달한 도시다. 통영소반, 통영갓, 통영의 나전칠기는 예로부터 이름이 높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생선 배나 찔러 먹고 사는 이 고장의 조야하고 거친 풍토 속에서” 그처럼 섬세하고 탐미적인 문화예술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바닷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오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 아버지에 대한 증오… 詩로 고독을 달래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박경리(사진)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출생이 불합리했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애정이 없는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게 적의에 찬 감정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선생은 자신을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주십사고 애원한 어머니를 경멸했다고 한다. 선생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인한 고독 속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에 매달렸다. ‘아궁이며, 이불 속이며 노트를 감추어 가면서 매일 일기같이 시를 썼고, 시는 위안이었으며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1945년 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행도 씨와 결혼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50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6·25전쟁 통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죽고,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잃게 된다.  

 

 

 
 

  이후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발표돼 문단에 나왔다. 이어 단편 ‘불신시대’ ‘영주와 고양이’ ‘암흑시대’ 등의 문제작을 계속 발표했다. 1962년 ‘김약국의 딸들’에 이어 1963년 단편 14편을 모아 소설집 ‘불신시대’를 펴내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64년 6·25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시장과 전장’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 ‘토지’ 집필을 시작해 1994년 완간에 이르기까지 25년간 유방암 선고와 사위 김지하의 투옥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지 전체를 탈고해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했으며 1999년 강원 원주에 토지문화관을 세웠다. 환경과 생명사상에 관심이 많아 2003년 4월 문화와 환경 전문 계간지 ‘숨소리’를 창간(2004년 말 폐간)하기도 했다. 2008년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까지 썼던 시를 담아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를 발표했다.

 1957년 현대문학상, 1959년 내성문학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 1991년 인촌상, 칠레 정부 선정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기념메달(1996), 금관문화훈장(2008) 등을 받았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1999)으로 선정됐다. 

 

 

 

<출처> 2018. 7. 27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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