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시인 등단 50주년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속
서정적 시(詩)로 문학청년 갈증 달래줘
이경택 기자
▲ 합대나무골 집터를 찾은 신대철 시인.
신대철(申大澈) 시인은 194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강설(降雪)의 아침에서 해빙(解氷)의 저녁까지’가 당선돼 문단에 등단, 올해로 등단 50주년이 됐다. 시집으로 ‘무인도를 위하여’(1977),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2000),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2005), ‘바이칼 키스’(2007), ‘극지의 새’(2018), 산문집으로 ‘나무 위의 동네’(1989)를 펴냈다.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는 1970∼1980년대 민주화 구호와 최루가스로 얼룩진 대학가에서 문학청년들의 갈증을 달래준 한줄기 샘물 같은 시집이었다.
시인의 작품에는 살아온 여정이 짙게 배어 있다. 대학 시절 충남 청양의 칠갑산에 들어가 화전민 생활을 했고, ROTC 출신 장교로 군에 복무할 때는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책임자였다. 그는 GP를 총괄하면서 임시로 대북 방송원고를 썼으며 때로 안전소로(安全小路)를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갈 수 있도록 북파 요원들을 안내했다.
그의 시가 서정적이면서도 고독과 불안, 공포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것도 그 같은 삶과 무관치 않다.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국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2년 제4회 ‘백석문학상’, 2006년 제1회 ‘박두진문학상’, 2008년 제19회 ‘김달진문학상’, 제8회 ‘지훈상’(문학 부문)을 받았다.
미루나무·멧새가 살던 외딴숲… 나의 숨구멍이었다
▲ 충남 청양 칠갑산 합대나무골 집터 옆의 미루나무. 1963년 신대철 시인의 부친이 심은 것으로 수령이 50년도 더 됐다.
1968년 신춘문예 당선 두 달 후 軍 입대…
최전방 GP서 근무, 민족이 처한 분단 현실 느껴
대학 1학년때 가정 풍비박산, 주소·이름없는 합대나무골서
가족과 함께 화전 일구며 살다 1974년 도립공원 되며 쫓겨나
소로 ‘월든’ 읽고 깊은 유대감, 자연의 피를 받아 살았던 생활
그가 내 처지였다면… 의문도
새 시집 ‘극지의 새’ 뒤편에 ‘극지일기’ 일부를 실었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50년 만에 내 시의 처음과 끝이 정리되는 것 같다. 남은 일기 속에 스민 시적 자아는 일기 속에 그대로 묻어도 좋으리라.
시를 쓰기 시작한 지 벌써 50년이 됐다. 나는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후 두 달 만에 군에 입대했다.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전방 분위기는 초긴장 상태였다. 민족주의보다는 국가주의와 이념 문제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북한 124 부대원처럼 모래주머니를 차고 매일 5㎞ 구보를 하고 비상이 걸리면 20㎞ 행군을 했다.
최전방 GP에 배치되면서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 현실을 구체적으로 느꼈다. GP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분계선에 매여 살았다. 도로정찰조가 아니라면 벙커에서 앞마당을 드나드는 것 말고는 방송을 하고 자고 먹고 지키는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단조로운 일상에 끊임없이 사건이 터졌다. 지뢰밭에 철모를 떨어뜨리거나 총기 오발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 집터 옆의 개복숭아.
얼마 전 펴낸 새 시집 ‘극지의 새’ 뒤에 붙은 ‘극지일기’는 이런 GP의 구체적인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시도 일기도 아닌, 일상 체험의 퇴적물 같은 단순한 글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문제에 부딪히게 됐다.
사건도 없고 변화가 없는 날은 에피소드를 정리하면 됐지만 사건이 생긴 날은, 그것도 내가 직접 체험한 사건은 아무리 상세하게 써도 뭔가 부족했다. 사람을 구하러 지뢰밭을 향해 내딛는 한 발은 언어로는 그냥 한 발이지만 생사를 가르는 한 발이기 때문에 같은 발이 아니라 다른 발, 다른 발이면서 왼발이고 오른발이며 고독이고 불안이고 공포였다.
마침내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멀어지고 일기를 끝낸 뒤에도 한없이 변용됐다. 내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면 사물과 언어가 마찰 없이 잘 맞물려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체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현장에 기대면 언어의 의미가 톤 하나만 낮춰도 충분히 있는 그대로 표현됐다.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의 앞부분 서정시들도 GP의 이면적 정서에서 울려 나온 것이다. 긴장될수록 가족이 그리웠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아 나가고 싶었다. 긴장된 생활이 계속되고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유롭게 살던 때가 그리웠다.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체험한 일들은 고통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GP의 극한 생활을 통해서 합대나무골과 GP는 하나로 통합됐다.
▲ 으름
독자들은 ‘무인도를 위하여’ 앞부분과 뒷부분을 분리해 읽고 있지만 사실 그 시집 내용은 동전의 앞뒷면이나 다름없다. 그땐 혼자 안전소로를 찾아 분계선을 향해 내려갈 때도 합대나무골 오두막에서 마을로 내려가던 산길을 생각했고 강가에서는 어린 시절 처음 본 백마강을 떠올리기도 했다.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첫 시집을 내기 위해 일기 속에 등장하는 내용을 분리해 완성시키다보니 앞부분은 서정적인 시편이 주축을 이루게 됐고 뒷부분은 분단 상황이 강조됐다.
그러나 첫 시집은 어느 내용이든 인간의 극지이며 이념의 극지인 비무장지대의 산물이다. 비무장지대에서 10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나는 민족과 이념, 그리고 애국심과 적이라는 관념적인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했다. 기독교적인 신념을 가진 오웬같이 ‘적’을 벗으로 생각할 순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민족 감정이 앞섰다. 적개심으로 가득 찬 북쪽 방송을 들은 날은 ‘적’이라는 말이 꿈속까지 따라와 괴롭혔다. 그때마다 합대나무골 가족들을 생각하며 잠들었다.
충남 청양의 칠갑산 합대나무골은 당시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주소도 없는 이름 없는 골짜기였다. 대천에서 폐병 고치러 온 사람이 두 칸짜리 오두막을 짓고 3년을 버티다 떠났다. 1963년 가정이 풍비박산돼 오갈 데 없던 나는 대학에 1년 휴학계를 내고 합대나무골로 들어갔다. 빈 오두막집에 몇 번 오르내리다가 그곳을 거처로 삼고 화전을 일구고 고구마를 심었다.
사방이 막힌 곳이라 답답하긴 해도 밭을 부칠 만한 작은 개활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빈집과 옹달샘이 있었다. 앞에 있는 구수골은 습했고 벌통골은 벌통이나 놓을 정도로 협소했고, 안골 빈집은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소태나무골은 이미 큰 개간밭이 있었다.
생활이 가능해지자 아버지와 할머니가 합대나무골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흩어졌던 동생들이 하나둘 모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루나무와 개복숭아 나무와 노랑턱멧새도 한가족으로 살게 됐다. 청머루와 으름이 뒤엉켜 익어가던 숲속. 푸른 물소리도 새나가지 않게 긴 동굴을 이루던 덩굴들. 사람 이름보다 먼저 떠오르던 참나무, 고로쇠나무, 물푸레나무들. 무엇이든 정붙여 함께 사는 게 행복했다. 지붕 틈새로 별빛과 달빛이 스며들어도 형제들은 세상을 잊고 그런대로 자연에 적응하며 지냈다. 지붕으로 박 넝쿨도 올리고 천마도 캐러 다니면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넷째 관철이는 여기서 사행천을 따라 천장리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벌통골에 흑염소를 풀어 놓고 100여 마리를 혼자 키우기도 했다.
▲ 미루나무 둥치의 이끼
그런데 산 밖 출입이 잦으신 아버지는 읍내에 나갔다가 오래된 신문과 뜬소문을 갖고 들어오셨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공 때 이야기부터 우리 가족이 파탄에 이르게 된 동기까지 밤늦도록 할머니와 이야기하셨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 놓으시고 소원을 빌었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밤이 오는 것도, 아버지가 오랜만에 오시는 것도 두려웠다. 6·25 때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총성이 들렸다. 악몽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누군가를 만나 아무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밤마다 30리 밖에 있는 어슬티 재석이네 뒷산에 갔다 돌아왔다. 대부분 못 만나고 돌아왔지만 한번은 우연히도 그를 만나게 됐다. 그가 이따금 올라오는 뒷산 바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그가 꿈결처럼 올라왔다. 그냥 날이 샐 때까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재석이는 마음이 복잡해지면 동네 저수지에서 수영을 한다고 했다. 저수지 이쪽에서 저쪽까지 지칠 때까지 왕복한다고 했다. 이 당시의 갈등 상황을 연작으로 표현한 시가 ‘처형’ 연작시다.
나는 이 연작시들을 통해 암울한 기억에 처형된 자의 상처받은 영혼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를 쓰면서 암울한 기억을 처형시킨 자의 고통도 끼어들었다. 그래서 이 연작시는 자연스럽게 갈등 구조를 지닌, 극화된 시가 됐다. 지금도 처형의 대상을 최소화하고 처형만 남기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내 의도가 어떻든 단순히 시적 자아의 삶의 변화를 극화시킨 시로 읽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여하튼 ‘처형’이라는 시를 몸속에 지니고 살면서 합대나무골 생활은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처형’ 이후 ‘흰 나비를 잡으러 간 소년은 흰 나비로 날아와 앉고’ ‘박꽃 ’ ‘칠갑산’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강물이 될 때까지’ ‘사람이 그리운 날’ ‘맥’ ‘수각화’ 연작 등 30여 편을 집중적으로 썼다. 모두 비무장지대에서 습작시로 써 두었던 시들인데 합대나무골에서 쫓겨난 뒤 마무리한 시들이다. 1974년 칠갑산이 도립공원이 되면서 화전민들은 20만 원씩 받고 다들 쫓겨났다. 우리 가족은 합대나무골을 떠난 뒤 그곳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일 때문에 나 혼자 한두 번 드나들었을 뿐이다.
합대나무골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소로의 ‘월든’을 보고나서다. 1979년 나는 아이오와 국제창작 계획에 참여하게 됐는데 모든 문학 토론이 그렇듯이 날이 갈수록 토론은 대결 구도로 진행됐다. 문학의 자율성과 현실 참여 문제는 제3세계권 작가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쟁점화되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그들은 모두 문학 자체보다는 민족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정치적 미래에 대한 검토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세미나는 작품 논의보다는 문인들의 사명감에 관심이 집중됐다.
세미나가 계속되는 동안 나는 민족의 분단 상황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내 체험 문제로 돌아왔다. 첫 시집을 내놓고 다시 시의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소로의 월든 호수가 보고 싶었다. 외형적으로는 그의 숲속 생활이 나와 유사한 자연 생활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가족이 흩어진 가운데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짐승처럼 산으로 쫓겨 들어간 것이고 그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실험적으로 숲에 들어간 것이다. 첫 시집을 낸 뒤 자연에 대한 생각은 점차 시인의 삶의 조건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자연 생활에 대한 명상적인 글은 잊히지 않았다. 아마 자연 속에서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유대감을 가졌을 것이다.
소로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소로처럼 합대나무골에서 단 몇 주만이라도 그렇게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하기 위해’ 살고 싶었다. 그해 11월 중순, 콩코드에서 월든 호수까지 걸어갔다. 마을에서 불과 2.2㎞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바람이 매웠다. 1시간가량 걸어 오두막 터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산에 분지같이 호수가 들어앉아 있었다. 오두막 집터에 내리는 햇빛과 호수에 비친 자작나무와 오솔길이 인상적이었다.
소로는 여기서 일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일 년에 6주만 일하고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를 꿈꾸며 인간답게 생활하기 위해 산책하고 독서하고 명상하고 글을 쓰며 지냈다. 그는 자연의 피를 받아 인간의 피로 살았다. 그가 만일 몇 남매의 가족과 함께 이 호숫가에 들어와 12년 동안 살았다면 숲속 생활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것도 실험적인 오두막 생활이 아니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박새들이 흩날리듯 자작나무에서 자작나무로 옮겨갔다. 그 새들을 따라갔다. 소로의 집터가 점점 멀어지고 자작나무 숲만 남았다. 1979년 11월 중순, 나는 ‘월든’을 떠나면서 시 속에 남은 합대나무골도 서서히 떠났다. 그 뒤 민주화 과정이 이뤄지면서 ‘실미도’ ‘마지막 그분’ 등 기억 속에 억눌려 있던 시편들을 발표했다. 우리 삶의 근원적인 힘을 되찾으려고 알래스카와 몽골과 바이칼도 드나들었다.
‘빗방울화석’ 시인들과 함께 백두대간과 정맥을 타며 관폭정과 만물상 앞에서 ‘백두대간 금강산 시화전’도 열었고 공동체험시집 ‘혼자 걸어도 홀로 갈 수 없는’ 도 냈다. 첫 시집 이후에 나온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바이칼 키스’ ‘극지의 새’ 등은 우리 삶의 족적을 따라가 본 시집들이다.
청머루와 으름나무는 여전히 덩굴을 이루고 열매를 익히는데 나는 50년이 지나도록 시 한 알 제대로 맺어 보지도 못했다. 시간이 소멸되면 공간만 남는 듯 문득 합대나무골 얼음 숨구멍이 떠오른다.
평지 끝에서 산속으로 쫓겨 들어온 그해 겨울, 물소리도 끊긴 옻샘에서 얼음 숨구멍을 쪼던 까만 물까마귀와 마주쳤네. 물까마귀는 나를 깊이 지켜보았고 나는 한눈팔며 주춤거렸네. 더 쫓길 데 없어 아주 몸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네. 몸속, 기어들면 영혼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네.
겨울 가고 겨울
바위틈에 물까마귀 언 발자국만 남기고
사람도 산도 잊고 한데에서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전문
글·사진 = 신대철 시인
<출처> 2018. 9. 7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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