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시문학파기념관
김영랑의 생가, 그리고 세계모란공원
글·사진 남상학
▲정면으로 바라본 시문학파기념관
김윤식 생가 언덕에 새로운 명소 ‘세계모란공원’이 조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강진에서 하룻밤 묵게 되어 저녁식사 후에 이곳을 방문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보고 듣지 못한 새로운 시설들이 생겼으니, 여행은 다녀온 곳이라 해도 3년 후에는 다시 가보아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새로운 건물이 김영랑 생가 앞에 들어서서 발을 멈췄다. 시문학파기념관이다. 어느 한 개인의 시문학관은 도처에 많이 있어도 특정 문인이 아닌 유파 전체를 한 자리에 아우르는 문학관으로서는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1930년대, 순수 서정시를 이끈 시문학파기념관
시문학파기념관은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영랑 김윤식(永郎 金允植·1903∼1950)선생 생가 옆 1,521㎡ 부지에 연면적 600㎡ 복층 건물로 2012년 3월 2일, 『시문학』창간일에 맞춰 개관했다. 건물은 정원을 앞에 두고 안쪽으로 배치하였으며,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축했다. 기념관에는 각종 자료와 사진 등이 전시된 전시공간과 자료실, 세미나실, 소공원 등의 시설을 갖췄다.
정원의 좌우 벽면은 시문학파와 관련된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 먼저 크게 눈에 띄는 것은 1930년에 창간한 『시문학』1호의 표지와 ‘한국 현대시의 탯줄’이라는 제목 아래 시문학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고, 『시문학』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 정지용, 용아 박용철 등 시문학파 3인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시문학파 9인의 얼굴을 부조로 만들어 붙여 놓았다.
▲1930년에 창간한 『시문학』1호의 표지와 ‘한국 현대시의 탯줄’이라는 제목 아래 시문학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시문학』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 정지용, 용아 박용철 등 시문학파 3인상
▲정원 좌측 벽면에 붙은 시문학파 9인의 얼굴 부조
▲기념관 입구에 세운 시인들의 패널
시문학파기념관에는 제일 먼저 시문학파 시인들의 시적 이미지를 담은 영상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집중시킨 후 동선을 따라 시문학파의 탄생 배경과 시세계 관람을 통해 1930년대 문학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설치했다.
또한 1910년∼1960년대 한국 문단사의 큰 줄기를 살필 수 있는 '한눈에 보는 한국 시사'코너는 학생들이 꼭 알아두면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했다. 특히 기념관 건립 취지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전당' 코너는 영랑 선생을 비롯한 김현구, 정지용, 변영로, 정인보, 박용철, 이하윤, 신석정, 허보 등 시문학파 동인 9명의 유품과 친필, 저서, 사진 등을 전시해 이들의 삶과 문학세계를 체감할 수 있게 전시했다. 이로써 시문학파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82년 만에 동인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됐다.
또, '20세기 시문학도서관'에는 국내 유일본 『신문계』(1916)를 비롯해 학술문예지『여명』(1925)과 『여시』(1928) 창간호, 최초의 번역시집인 김억의 『오뇌의 무도』(1923), 『시문학』(1930), 『문예월간』종간호(1932) 등 5천여 권의 도서가 소장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현대문학』창간호(1955)를 비롯해 『자유문학』(1956), 『신문예』(1958)와 광주에서 발행된 『순문학』(1959) 등 각종 문예지 창간호 21종이 들어있어 1950년대 문단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한 눈으로 보는 한국 시사' 코너
▲시문학파의 탄생배경
▲시문학파의 삶과 문학세계를 체감할 수 있게 하는 전시물(이상의 실내 사진은 관람시간이 지나 입장하지 못하고 블로그 친구의 도움으로 여기 수록하였음)
* 시문학파기념관 개관이 갖는 의미
시문학파란 1930년에 창간한 『시문학』의 주요 시인들로서 순수시운동을 벌였던 문학동인회의 명칭이다. 당시 동인으로 참여했던 김윤식, 박용철,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 정지용이 참여하였고, 뒤이어 김현구, 신석정, 허보가 참여하였다.
이들 시문학파는 당시 세력을 키워나가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반발하여 문학에서 정치색이나 사상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였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등은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조화에 의한 자유시를 썼으며, 특히 시는 언어예술임을 내세워 언어의 조탁에 힘쓴 결과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그 중에서 김영랑의 시는 음성구조와 의미구조 사이의 조화와 긴장을 통한 창조적 리듬을 통하여 김소월 시보다 한 걸음 발전된 현대성을 느낄 수 있고, 정지용의 시에서는 은유와 심상을 1920년대 시와는 질적으로 다르게 의식적으로 다듬어서 참신한 감각을 보였다.
『시문학』지는 비록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됐지만, 시문학사에서 시문학파는 현대시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됐으며, 한국 현대시는 1930년대 시문학파 시인들이 분수령을 이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문학파기념관의 개관은 한국 문단사에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시문학》 창간 후기와 《시문학》지의 의의
* 시문학기념관이 강진에 세워진 이유
이런 문학관이 굳이 서울도 아닌, 지방도시 강진에 건립되었을까? 동인들의 출신 지역이 저마다 다른데도 말이다. 김영랑의 문학 세계에 있어서 고향 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시인의 생애에서 서울과 일본에서 보낸 유학 시절과 말년의 2년 정도의 서울 생활, 즉 대략 7년 정도의 시간을 제외하면, 40년 가까운 세월을 시인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생가에서 살았다. 이 고향 집은 그의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가 쓰인 산실(産室)이며, 강진은 곧 김영랑의 문학적 공간이다. 그러니 김영랑을 강진의 시인, 남도의 ‘향토 시인’이라 말해도 전혀 틀림이 없다.
그런 데다 시문학파의 상징적인 존재는 영랑 김윤식이므로 상징적 배경이나 의미로 보아 영랑의 생가가 있는 강진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문학파 결성을 실제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강진의 김윤식과 광주 송정리의 박용철이었고, 거기다 나중에 합류한 김현구도 강진 출신이었다. 이들은 시문학파 결성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문단에서 지명도가 높은 이들을 끌어들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 더하여 시문학파의 최종 결성 현장이 강진의 영랑생가라는 점 때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강진은 시문학파들이 자주 찾아 순수시 발전을 토론했던 정서적 고향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이런 이유로 강진군은 일찍부터 김영랑의 생가와 연결된 장소에 이들 전체를 묶은 시문학파기념관 건립을 과감하게 선점하여 추진했다. 그만큼 강진에서는 김영랑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지방도시인 강진으로서는 시문학파기념관 건립이 큰 호재였을 것이다. 이미 날이 저물어 문학관을 닫았기에 시문학파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사진 등을 보지 못한 아쉬웠지만 지인이 이미 이곳을 방문하고 촬영한 사진 몇 장을 여기 올린다.
▲강진은 시문학파를 이끈 김영랑의 고향이며, 강진군은 김영랑을 배출한 것에 절대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그의 문학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기념사업들을 펼쳐왔다.
영랑의 체취가 물씬, 영랑생가
▲영랑생가 배치도
시문학파기념관에서 올려다보면 바로 앞에 영랑생가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사립문이 인상적이다. 영랑생가는 야간에도 개장했다. ‘영랑생가’는 강진군청에서 멀지 않은 읍내 탑동, 나지막한 동산 중턱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다. 1948년 김영랑이 서울로 이사한 후 남의 소유가 됐던 것을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해 복원해 놓았다.(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52호)
생가의 본채는 초가집이지만 뼈대가 굵은 네모기둥을 사용한 규모가 큰 집이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사랑채는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없어진 문간채는 유족들의 고증을 얻어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한 공간이지만, 안채와 사랑채는 몇 군데 수리한 것에 불과해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모두 초가집이다. 그런 까닭에 다른 지역의 억지로 복원한 작가들의 생가, 차라리 ‘모형’에 가까워서 도무지 정이 안 가는 생가들과는 그 운치부터가 다르고, 당장 이곳에서 생활해도 될 성싶다.
생가 곳곳에 영랑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소재인 모란밭이 있다. 모란이 활짝 피는 4월 하순부터 5월에는 생가가 모란꽃으로 뒤덮인다. 시의 소재가 됐던 우물, 장독대, 작은 인조 연못, 돌담 등도 예전처럼 복원됐다. 생가 뒤로는 대나무 숲이 둘러쳐 있다. 또 김영랑의 대표적인 작품이 새겨진 시비들이 세워져 있어서 김영랑의 체취와 함께 그의 작품 속으로 안내한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시인이 “내 영혼의 얼굴”이라고 노래했던 바로 그 우물이다.
김영랑(金永郞, 본명 윤식)은 1903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박용철(朴龍喆) 등과 교류하면서 최초로 『시문학』 동인지를 만들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하였다. 영랑은 일제치하에서 설움 받은 내용을 시로 표현하고 자신의 젊은 정열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에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거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랑생가 시비에 적힌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읊어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주옥같은 시다. 시인은 ‘모란이 피’는 ‘봄’을 기다린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기에 모란은 활짝 피었다가 이내 져버릴 수밖에 없다. 모란이 피는 것에 대한 ‘기다림’ 이후, 모란이 지게 되면 찾아오는 ‘상실’은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만큼 큰 비애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화자는 이내 다시 기다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
더구나,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모란에 대한 반복적이면서도 순환적인 감정의 태도를 집약시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란이 피었다는 기쁨으로서의 ‘찬란함’과 이내 모란이 져버리는 것에서 찾아오는 ‘슬픔’을 동시에 드러낸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비범하다. 아름다운 언어로 순수서정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김영랑이다. 이 가옥은 건축적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영랑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하겠다.
▲시인 김영랑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영랑생가(조명이 되어 있으나 밤이어서 사진 상태가 좋지 않다)
야간에 더 아름다운 세계 모란공원
▲세계모란공원 종합안내도
2017년 4월, 강진의 명소 영랑생가 뒤편 언덕에 ‘세계모란공원’이 개장됐다. 영랑생가의 돌계단과 사립문을 통해서도 오를 수 있는 세계모란공원은 서정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주제로 한 국내 최대 규모의 모란공원이다. 약 1만5000㎡ 규모의 공원에는 한국을 비롯해 중국ㆍ프랑스ㆍ네덜란드ㆍ독일ㆍ영국ㆍ미국ㆍ일본 등 8개국이 원산지인 50여 종의 모란 2,700그루가 심어져 있다. 그래서 이름도 세계모란공원으로 명명했다.
세계문학공원 안에는 세계모란원과 모란 조형물, 영랑 청동상, 산책로, 정자, 폭포, 모란을 주제로 동서양 시비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갖추고 방문객을 맞이한다. 화려한 꽃을 자랑하는 모란은 봄에 잠깐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사계절 모란꽃을 피울 수 있도록 사계절 모란원을 갖췄다. 149㎡ 규모의 저온저장고에는 모란 종자가 보관돼 있다. 이 종자를 비닐온실(119㎡)과 유리온실(647㎡)에 옮겨 심어 사계절 내내 모란을 감상할 수 있다. 날씨나 계절에 상관없이 모란의 생장 과정을 관찰할 수 있어 교육 공간으로도 가치가 높다.
▲유리온실(647㎡) 안에서 자라고 있는 세계 각국의 모란들
세계모란공원이 문을 연다는 소식에 전국의 희귀 모란도 옮겨 심어졌다. 대구 경주 김씨 고택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것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감상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단다. 심겨 있던 일명 ‘한국 모란왕’이 대표적이다. 폭과 키가 2m에 달하는 데다가 수령이 350년이나 되는 귀한 모란이다. 한국의 모든 모란을 대표한다는 뜻에서 ‘모란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산의 한 시민도 작고한 아버지가 키우던 모란 2주를 기증했다. 각 150년과 80년 된 모란이다. 기증자는 전남 순천의 친정집을 정리하는 과정에 집 마당의 모란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던 중 강진에 여행을 왔다가 방문한 영랑생가에 매력을 느껴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 모란왕과 해설판
모란왕 바로 앞에는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서있고, 강진만을 등지고 모란왕을 바라보는 자세로 영랑 김윤식의 좌상(청동상)이 있어 강진만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도 좋다. 조형물은 벽천의 모란 조형물 및 김영랑 시인의 시, 세계의 모란 시를 골라 시비를 세우고 공원의 일부공간을 그 시에 맞춰 꾸몄으며 방문객들로 하여금 시를 눈으로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김영랑의 시 “오매, 단풍 들겄네”로 시작하는 김영랑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의 시비가 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 것네."
‘오매, 단풍 들겄네’ 가을을 느끼는 감회를 이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단풍 들었네’가 아니라 ‘단풍 들겠다’이다. 김영랑의 시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를 읽으면 마치 가을을 맞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연정의 감정이 물씬 풍겨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김현구 시인의 시비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는 석가산 옆에 설치하였다. 그의 시비에 새긴 시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를 옮겨본다.
한숨에도 불려갈듯 보-하니 떠있는
은빛 아지랑이 깨어 흐른 머언 산둘레
구비구비 놓인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렀습니다.
헤어진 섬돌에 떨든 햇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어슴어슴 들우에 깔리여 갑니다.
홋홋 달른 이 얼골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님이여 가이없는 나의 마음을 아르십니까
시인 김현구는 강진 사람들이 아끼는 시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1904년 강진에서 출생하여 1930년대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다.『시문학』과 『문학』등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나 생전에 자신의 시집을 발간하지 못하여 영랑 김윤식과 용하 박용철처럼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더구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에 사망하여 그가 쓴 유작(遺作)조차 망실된 것이 못내 아쉬운 시인이다.
시비 외에도 로버트 브라이 (미국, 1935~ ), 소동파(중국, 1037~1101), 서거정(조선 초기, 1420~1488), 임억령(조선중기, !496~1558) 등 내외 시인들의 '모란' 예찬의 시비들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모란공원은 모란뿐 아니라 야간 경관도 중요한 볼거리다. 영랑생가 옆 시문학파기념관을 지나 세계모란공원으로 향하는 입구 쪽 대나무 숲을 은은한 조명이 비춘다. 전망데크 쪽에는 반딧불이를 연상케 하는 조명을 설치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모란조형물에는 하늘로 향하는 레이저 빛을 쏜다.
▲영랑생가에서 세계모란공원으로 오르는길(계당 양쪽이 온통 대나무 숲이다)
▲세계모란공원의 조형물이 조명을 받아 아름답기 그지없다.
▲공원의 영랑청동상 옆에서 찍은 사진(필자)
둘러본 소감은 한 마디로 영랑의 문학적 감성을 느끼고, 아름다운 강진만을 조망할 수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공원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강진의 감성이 돋보여 강진뿐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명소로 떠오를 것이 예상된다.
가는길
시문학파기념관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4, 061-430-3186
영랑생가 & 세계모란공원 : 전남 강진군 강진읍 영랑생가길 15, 061-430-3185
강진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20분
강진 맛집
강진은 한정식으로 유명하다. 한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강진은 왕궁과 거리가 멀어 조선시대 사대부나 왕족들의 유배지가 되기도 했다. 이 때 유배를 따라온 수라간 궁녀가 궁중음식의 비법을 전하면서 강진 한정식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반찬은 구이, 전, 볶음, 편육, 조림, 지짐, 생채, 취채, 숙채, 튀김, 전골, 찜 등 다양한 식단이 맛깔스러운 한정식을 선보이고 있다.
예향(강진읍 오감길 2, 061-433-5666), 다강한정식(강진읍 오감길 2, 061-433-3737), 명동식당(강진읍 서성안길 5, 061-434-2147) 등이 유명하다. 우리는 다강한정식에서 푸짐한 식사를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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