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문학관
전원시인 신석정(辛夕汀)의 문학을 찾아서
- 자연과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민족시인 시인 -
글 · 사진 남 상 학
▲전라북도 부안군부안읍 선은1길 10 / 063-584-0560~1
전북 부안에 가면 목가시인 신석정의 시 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2011년 10월 개관한 석정문학관은 신석정(辛夕汀, 1907~1974) 시인의 고향 마을인 부안읍 선은동에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1,573㎢의 현대식 건물로 아름답게 조성되었다.
신석정 시인의 생가 터와 마주보고 있는 석정문학관은 5권의 대표시집·유고시집·친필원고 등으로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상설전시실, 현실의식을 담은 다수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획전시실, 선생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만나는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5,000여점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키가 크고 코가 늘씬한 모습에 마도로스 파이프를 문 석정 시인의 사진과 함께 선생의 친필로 쓰여진 선생의 좌우명이 먼저 반긴다.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 - ‘저 의연한 산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마음을 배우자’라는 뜻이다. 신석정에게는 언제나 ‘전원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또 일제강점기와 분단, 전쟁,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을 도피한 지식인으로 비판을 받곤 했다.
그러나 실제 그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몇 안 되는 시인이었고, 역사의 고비마다 시로 시대를 비판하며 몸부림쳤던 인물이었다. 그는 좌우명도 현실에서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기개를 나타내는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로 삼았다.
상설전시실에는 박한영, 이익상, 이병기, 서정주, 김영랑,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김기림, 정지용, 박용철, 강은교 등 교류가 있던 시인 지인들과의 사진, 문집 등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대표시집인 <촛불>, <슬픈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소리>, 유고시집인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유고수필집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 등 친필원고 및 시집들이 전시되어 있고, 평소에 즐기던 담배 파이프, 안경, 사진기 등의 유품이 그의 작품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또 전시실 한쪽에 시인이 사용하던 유품인 책, 책꽂이, 책상, 병풍, 시계 등으로 서재를 재현해 놓아 생전의 문필활동을 엿보게 했다.
기획전시실에는 현실인식과 참여의식이 반영된 미발표시와 당대 스승, 선·후배, 동료들의 친필 서한이 전시되어 있다. 그만큼 문단 동료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것을 일 수 있다. 또, 신석정 시인의 작품 연보와 관람자 보관용 시 탁본대도 설치되어 있다.
(1) ‘촛불’ 시대 (1931.8-1937년.12)
(2) ‘슬픈 목가’ 시대 (1938.1-1943.10)
(3) ‘빙하’ 시대 (1946.3-1957.3)
(4) ‘산의 서곡’ 시대 (1957.3-1967.11)
(5) ‘대바람 소리; 시대 (1967.11-1971.1)
(6)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시대와 그 이후 (1971.1-1974.7)
영상세미나실에서는 학창시절의 에피소드, 시인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 등 석정 선생의 일생을 부안의 자연경관과 함께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목가시인 신석정의 문학과 인생
여기서 신석정(1907∼1974) 시인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신석정은 전북 부안(扶安) 출신으로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 釋靜·石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 부안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읍내 부안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 결혼을 하고,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하면서 고향의 전원 속에 파묻혀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투르게네프와 하이네, 타고르와 노장(老莊) 등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4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조선일보〉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시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신석정은 글쓰기를 포기할 생각으로 써놓은 시들을 불사르는 등 한동안 심한 좌절에 빠진다. 일찍 결혼한 까닭에 가난 또한 큰 짐이 되어 그의 발길을 무겁게 하였다.
1930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박한영의 가르침을 받아 1년 동안 불전을 배웠다. 박한영이라면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완주 출신의 승려이자 불교 지도자로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해 서정주와 조지훈 등에게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신석정은 강원에서 불교 공부를 하는 한편 30여 명의 젊은 학도들을 규합해 회람지〈원선(圓線)〉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교 자체에는 깊이 빠져들지 않고, 금강산으로 입산수도를 떠나자는 동료들의 청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 박용철의 권유로 잠시 서울에 올라온 그는 김영랑과 함께 1931년 <시문학>지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 그 해 <시문학>에 ‘선물’을, <동광>에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정지용 · 이광수 · 한용운 등과도 교유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낙향한 그는 부안읍 변두리에 뒤뜰이 넓은 초가를 한 채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 짓고 이곳에 거주한다.
낮에는 고구마 밭을 일구고 밤에는 독서와 시작에 매진한 신석정은 1932년 <문예월간>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삼천리>에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실을 지킬 수 있읍니까?' 등 청정하고 애수가 담긴 전원시를 꾸준히 발표해 주목받는다.
또,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문예월간, 1932.1)· '봄의 유혹'(동방평론, 1932.7~8)을 발표하였고, 이어 <문학>지에 ‘너는 비둘기를 부러워 하더구나’ 등 목가적(牧歌的)이며 서정적인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한국 최초의 전원시인(田園詩人)이 되어 생(生)의 경건한 기쁨과 순수함을 노래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그의 초기 경향을 잘 드러내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 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오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그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신석정,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일부(촛불)
석정에게 있어서 ‘그 먼 나라’인 자연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신앙이었다. 노작(勞作)의 흔적이 전혀 없는 나라,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나라를 동경하는 그의 모습이 처연하기까지 한다.
그 뒤에도 신석정은 1936년 <문장>에 '들길에 서서', <신동아>에 ‘돌’, <중앙>에 ‘송하 논고(松下論告)’, <조선문학>에 ‘눈오는 밤’, 1939년 <조선문학>에 ‘월견초(月見草) 필 무렵’ 등을 발표하고 같은 해 <인문평론사>에서 첫 시집 <촛불>을 펴낸다. 이어 1940년 <조광> 3월호에 시 ‘명상’과 ‘황혼’, 9월호에 ‘애가(哀歌)’, 1941년 <삼천리> 4월호에 시 ‘변산 일기 ― 중계, 사지 목재, 능가봉, 청림’ 등을 발표한다.
일제 말기에도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쓰기를 하는 그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신석정과 대조적인 시관을 갖고 있던 모더니스트 김기림(金起林)조차 “1933년도 시단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에서 그의 시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정지용 씨처럼 현대 문명 그 속에서 그 주위와 자아의 내부를 향하여 특이하고 세련된 시안(詩眼)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음모하는 목가시적인 신석정’을 잊을 수는 없다.” -김기림
그가 반세속적이며 자연성을 강조하는 시풍을 갖게 된 것은 노장철학(老莊哲學)과 도연명과 타고르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경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석정은 일제 암흑기에 이르러서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절필한 그는 얼마 뒤 꿈에 그리던 해방의 날이 오자, 그 감격과 회한을 이렇게 노래한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 신석정, ‘꽃덤풀’ <신문학>2호
그러나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거나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려던 꿈은 문단의 이데올로기 싸움과 혼란상으로 여지없이 망가지고 만다. 해방 뒤 문우이자 동서인 장만영은 여전히 궁핍을 껴안고 사는 그에게 서울로 올라올 것을 권했지만, 석정은 고향을 지키며 1946년 <신문예>에 ‘비의 서정시’, 1947년 <신천지>에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을 발표한다.
1947년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 막바지의 암흑기에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지 않고 서랍 속에 은밀하게 처박아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비로소 묶어 한 권의 시집을 펴낸다. 이것이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牧歌)>다. <슬픈 목가>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낭만주의 색채 위에 해방 직전의 암담한 현실과 고향 상실에 따른 슬픔이 짙게 묻어 있는 시집이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어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도 젖어 왼 몸이 젖어······
······
벙어리처럼 목 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신석정,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의 일부, <슬픈 목가>(1947)
1951년 신석정은 전주 ‘태백신문사’에 입사해 편집 고문으로 일하다가 3년 만에 그만두고, 1954년 전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1955년부터 전북대학교 및 영생(永生)대학에서 시론(詩論)을 강의했다. 1956년 그는 <현대문학>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 · ‘운석(隕石)처럼’ 등을 발표하며, 같은 해 <정음사>에서 또 하나의 시집 <빙하(氷河)>를 간행한다. 이 시기에는 6·25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에서도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한다.
1956년 <문학예술>에 ‘피가 도는 돌이 되어’ 등을 발표한 그는 1958년 이병기와 함께 <명시조 감상>을 펴내고, 1959년 <자유문학>에 ‘나에게 어둠을 달라’ 등을 발표한데 이어 1960년 6월 15일자 <전북대학교보>(78호)에 ‘4.19 혁명에 부치는 노래’를 발표한다.
한 발자국 내쳐 디딜 곳도 없고
돌아보면 짐승들만 요란히 울던
바로 징역 같은 이 절정에서
한 무더기 꽃으로 피던 우리들의
혁명을 잊지 말아라
(중략)
산의 의연한 자세로 하여
새 역사의 분수령에 서서
억압과 암흑을 물리치기에
구호를 입에 문채
더운피 흘리며 쓰러지던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
- 신석정의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의 일부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는 부정부패에 항거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혁명을 격려하는 글로 왜곡된 현실의 상황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 외에도 1960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교육노조 결성을 지지하는 시 ‘단식의 노래’ 와 ‘지옥’ 등은 현실참여의 대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5.16군사 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발표해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61년 이후에는 김제고교와 전주상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1962년 <자유문학>에 ‘무명(無明)의 항변’ · ‘영구차의 역사’, <문학춘추>에 ‘4월의 노래’ 등을 발표한다. 1967년 예순 살 때 그는 시집 <산(山)의 서곡(序曲)>을 펴내 이듬해 한국 문학상을 받는다. <산의 서곡>은 이전의 시풍과 달리 현실과의 갈등을 노래한 시들로 꾸며졌다.
이어 1970년 한국시인협회에서 시집 <대바람 소리>를 출간하고, 1972년 10월 <문학사상> 창간호에 시 ‘오한(惡寒)’과 산문 ‘시 정신과 참여의 방향’ 등을 발표한다. 1972년 문화 포장을 받은 데 이어, 1973년 한국 예술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전북문화상 심사를 하던 자리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신석정은 병석에서도 시 ‘가슴에 지는 낙화 소리’와 산문 ‘병상 수필’을 쓰지만, 1974년 7월 6일 예순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백목련 햇볕에 묻혀
눈이 부셔 못 보겠다
희다 지친 목련꽃에 비낀
4월 하늘이 더 푸르다
이맘때면 친구 불러
잔을 기울이던 꽃철인데
문병 왔다 돌아가는
친구 뒷모습 볼 때마다
가슴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백목련 낙화소리
- 신석정 ‘가슴에 지는 낙화소리’
5권의 시집 외에 역서(譯書) <중국시선(中國詩集)(1954)>, <매창시집(梅窓詩集)>(1958)이 있다. 전북 문총위원장(文總委員長), 예총위원장(禮總委員長) 등을 역임했다. 그가 숨진 뒤 같은 해에 유고 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나왔다. 석정은 4남 3녀를 두었으며 큰 사위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가 시인으로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석정이 떠난 후 1978년에 전주 덕진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으며, 1991년 8월에는 그의 고향인 부안군 변산면 해창 석정공원에 ‘파도’ 시비가 세워졌다. 그 후 ‘파도’시비는 2009년 9월 10일 지금 새만금 홍보관 내 ‘서두 터 정원’으로 옮겼다.
석정 시인이야말로 정지용, 김영랑, 김기림, 박용철 등과 더불어 '시문학' 동인 활동을 하면서, 늘 자연친화적 작품 세계를 추구해 왂다.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처럼 집요하게 추구한 걸출한 시인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그려내는 그의 맑고 고운 자연 시정은 우리 시사(詩史)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되뇌어 본다.
석정의 생가 청구원(靑丘園)과 시비(詩碑) 공원
문학관 정면 맞은편에는 신석정 시인의 시의 산실인 ‘청구원(靑丘園)’이 있다. 1931년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낙향한 지 2년 뒤 선은동에 집을 지어 스스로 ‘청구원’이라 이름 붙였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실린 신석정 고택은 기와지붕으로 현재의 초가 고택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임께서 부르시면’,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을 지었다. 청구원 시절 그는 ‘목가시인’, ‘전원시인’이라는 수사에 걸맞게 뜨락에 은행나무, 벽오동나무, 자귀대나무, 시누대, 파초, 산수유, 대나무 등 온갖 나무와 화초를 길렀다. 집 뒤에는 바람이 일지 않는 아늑한 숲길이 있고, 그 너머로 푸른 산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복원된 초가 고택만이 덩그렇게 복원돼 있다. 청구원 안방 벽에서는 평온한 표정의 시인을 볼 수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
그리고 청구원 앞뜰은 시비공원으로 조성하여 ‘기우는 해’, ‘고운 심장’. ‘가슴에 지는 낙화소리’, ‘망향의 노래’, ‘임께서 부르시면’, ‘단장소곡’ 등 작품을 산책길을 따라 감상할 수 있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님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님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님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조가 노래하고
이른 밤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님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임께서 부르시면’ 전문
이 시에도 목가적 전원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다. 자연 질서에 순응하려는 그의 마음이 반복과 변조, 직유와 도치법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석정공원과 신석정 시인의 묘
시인의 묘소는 행안면 역리 야산에 위치하며 마을 초입 벽에 데뷔작 ‘기우는 해’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쓴 ‘가슴에 지는 낙화소리’시화가 그려져 있다. 영월 신씨의 묘역을 공원화하면서 새롭게 단장했다.
▲신석정의 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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