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부안 매창공원, 조선 시대의 명기(名妓) 매창(梅窓)의 시를 음미하다.

by 혜강(惠江) 2017. 6. 14.

부안 매창공원

 

조선 시대의 명기(名妓) 매창(梅窓)의 시를 음미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89 / 063-580-4434

 

· 사진 남상학

 

                                                

 

 

 

 

 매창공원은 매창이뜸 주변에 조성된 공원으로 이계생의 시와 묘로 꾸며진 시문학 공원이다. 조선의 여류시인이자 명기인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추모하여 조성한 부안의 매창공원은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있다, 이 공원에는 매창의 묘, 매창의 시비, 매창을 기리는 시비,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그리고 명창 이중선(李仲仙)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매창의 묘는 지방기념물 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류시인 이매창

 

 

 이매창은 조선 중기의 기생이자 여류시인이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 또는 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매창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글을 배웠고,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는 기생 신분이되었다. 시조와 한시, 가무와 거문고·가야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명기로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기생들은 이름만 있었지만 매창은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그를 집적댈 때에는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醉客執羅衫 

   羅衫隨手裂 

   不惜一羅衫

   但恐恩情絶 -증취객(贈醉客)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平生學食東家

   獨愛寒梅映月斜

   時人不識幽閑意

   指點行人枉自多 -증취객(贈醉客)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매창은 천한 신분의 기생이었어도 몸을 아무에게나 내맡기지 않았으며, 기품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대표적인 시 “이화우(梨花雨) 흣날닐 제 울며 쟙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이화우(梨花雨)>는 그녀가 사랑한 유희경(劉希慶)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그만큼 그녀는 당대 최고 시인이었던 유희경(劉希慶)과 사랑을 나누었고, 김제 군수로 내려왔던 이귀(李貴)와 인연을 맺기도 했으며, 그 당시 최고의 문호라 할 수 있는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과도 교분이깊었던 사람이었다. 

 

 

유희경과 사랑에 빠졌던 매창

 

 

 매창과 유희경의 만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루어졌다. 당시 시인 유희경과 백대붕의 명성이 전국에 자자했고, 부안 기생 이매창의 이름도 한양의 풍류가에 회자되고 있었다. 1591년(선조 24년) 초봄, 48세의 유희경은 서울을 떠나 명기 계생이 있다는 부안으로 향했다. 그것이 애틋한 로맨스의 서막이었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빠져들었다. 28년의 나이차는 숫자에 불과했다. 유희경은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날 유희경은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일찍이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시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사 참 모습 대하고 보니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구나. 

   曾聞南國癸娘名

   詩韻歌詞動洛城

   今日相看眞面目

   却疑神女下三淸 -증계랑(贈癸娘)

 

  유희경은 매창을 무산 신녀에 비유했다. 무산 신녀란 초나라 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속에 나타나 교합했다는 절세 미녀다. 유희경은 매창이 그 신녀처럼 신선이 사는 삼청, 즉 옥청·상청·태청에 내려온 것 같다며 상찬했다.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 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날부터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혼탁한 세상사를 잊었다. 그들에게 세속의 체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희경은 당시 천민이자 상례전문가로서 궁중이나 양반가에 초상이 나면 득달같이 달려가야 하는 몸이었다.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웠던 두 사람은 훗날 다시 만나 열흘 동안 시를 지으며 회포를 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유희경이 2년 뒤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 방년 21세,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매창은 이제나 저제나 그가 돌아올까 애를 태웠다. 하지만 유희경은 몇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임이 가을이 짙어만 가는데도 소직이 없자 매창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조를 지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내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梨花雨)

 

  흔히 ‘이화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 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 ‘이화우’라고 표현했다. 따스한 남쪽에서 자라는 봄날 흩날리는 배꽃은 남도의 여인에게 정한을 표현하는 매개물이었다. 순결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정말 잘 어울리는 색조였다. ‘이화우’로 표현된 그 사랑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추풍낙엽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애절한가.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마음 속 그리운 정  말로는 다할 길 없어

   밤새 생각다 보니 머리카락 반이나 세었구나.

   신첩의 괴로워하는 이 심정 아시려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이 손가락을 보옵소서.

   相思都在不言裡 

   一夜心懷鬢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圓  -규원(閨怨)

 

이 시 모두 이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다.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손가락이 마를 정도였을까.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녀의 시들은 떠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구슬 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春冷補寒衣

   紗窓日照時

   低頭信手處 

   珠淚滴針絲 -자한(自恨)

 

 매창이 이러할 진대 그립기는 유희경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매창이 살고 있는 부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회계량(懷癸娘)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란다. 그렇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사이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두 계절 동안은 서로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다. 그런데 이렇듯 불현듯 다시 보자고 떠난 두 사람은 서로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매창에게는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었을 유희경을 그리워하면서 편지글을 써서 보내며 서로의 정한을 달래었을 것이다.

 

   말은 못해도 너무 그리워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가락지 좀 보시구려.   

   相思都在不言裡 一夜心懷鬢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減舊圍 -규원(閨怨)

 

 사무친 그리움에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니 흰머리가 내려앉았다 했다. 그리고 그녀의 여리고 꽃다운 고운 손은 나이 들어 손에 낀 가락지마저 헐거워졌으니 그녀의 마음은 어찌했을까? 이러한 매창의 시에 유희경도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써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유희경의 시에도 매창에게 주는 시가 10여 편 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는 두 사람이 얼마나 간절하게 사모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15년만인 1607년, 서른다섯의 매창은 예순세 살의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정인은 그녀의 꺼져가는 불길을 되살려주지 못했다. 서로 만난 두 사람은 눈물 흘리며 두 손을 부여 쥐었지만 유희경으로서는 예전처럼 연인과 자유로운 로맨스를 즐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행여 고약한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자신은 물론 자손들에게까지 흠결이 미칠 것이니 어쩌랴. 그런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로부터 3년 뒤, 유희경은 멀리서 매창의 부음을 들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유희경은 허전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香魂忽駕白雲去 碧落微茫歸路賖

  只有梨園餘一曲 王孫爭設玉眞歌 -도옥진(悼玉眞)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양옥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 현종과 양귀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매창이 죽은 뒤에도 유희경의 생애는 2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승승장구하는 노년을 보내면서 그는 재가 되어버린 그 시절을 돌이켜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한때의 풍류였다. 신석정 시인이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扶安三絶)’로 꼽았던 유희경과 이매창의 비련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귀(李貴)와의 교제

 

 

 그러나 화살 같은 세월 속에서 매창이 유희경만 학수고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10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줄곧 유희경만을 그리며 살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 1557-1633)였다. 그는 율곡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절의가 곧아 나중에 인조반정에 앞장서 공신이 된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에게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그 만남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환해(宦海)를 떠도는 이귀의 입장을 어찌하겠는가. 두 번째 남자마저 떠나보낸 매창은 사랑의 덧없음, 인생사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깊이 받아들였던 듯하다.

 

 

허균과의 우정

 

 

  실의에 빠졌던 매창은 허균(許筠, 1569~1618)을 만나면서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1601년 6월,허균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던 때부터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허균의 《조관기행》에는 허균이 매창과 조우했던 날의 상황을 적고 있다.

 

 “1601년 7월 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함께 얘기를 나눌만 했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렸기 때문이었다.”

 

  유희경의 눈에 매창은 선녀였지만 허균의 눈에는 시들어가는 재주 많은 퇴기일 뿐이었다. 그는 매창을 한 여자로 보기보다는 그냥 친구로 여겼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시문을 함께 지으면서 삶에 대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매창은 유희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것이다. 허균은 그리움에 메말라버린 그녀의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불교의 참선(參禪)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고독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했다.

 

 몇 달 뒤 허균은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돌아온 허균은 형조정랑, 수안군수 등을 거쳐 공주목사에 이른다. 이때에도 허균은 매창에게 편지로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보다 더 깊은 우정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젊은 날 심혼을 바쳤던 유희경에게 머물러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鷓鴣)'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산자고'는 당대(唐代) 남쪽 지방에서 부른 악부시로, 떠난 임을 그리는 슬픈 가락의 노래다. 여기서 ‘자고(鷓鴣)새’는 뜸부기다. 뜸북뜸북 우는 이 새를 중국에서는 ‘行不得’ 즉 ‘가고 파도 못 가네’라고 우는 새라고 생각했다. 자고새는 그리움을 뜻하는 새이다.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보듯 허균은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표현하고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蓬山秋色方濃 歸與翩翩

   娘必笑 惺惺翁負丘壑盟也

   當時若差一念 則吾與娘交

   安得十年膠漆乎  到今知秦淮海非夫

   而禪觀之特有益身必矣

   何時吐盡  臨楮椿慨然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卷21, 己酉 九月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매창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한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된 그는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머물며 유유자적을 즐겼다. 이때 허균과 재회한 매창은 스스럼없이 이전의 우정을 나누며 기꺼워했다.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헤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妙句土甚擒錦 淸歌解駐雲

  桃來下界 竊藥去人群

  燈暗芙蓉帳 香殘翡翠裙

  明年小挑發 誰過薛濤墳 -애계랑(哀桂娘)

 

  허균은 매창을 사랑했지만 잠자리를 같이한 사이는 아니었고, 정신적인 교감만 나누었다고 한다. 허균은 매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시에 밝고 글을 알며, 노래와 거문고를 잘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허물없이 친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않았다. 이

 제 그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니 나는 슬픈 눈물로 그대를 전송한다. 꽃다운 넋이여, 고이

 잠들라"

 

  그는 슬픈 노래로 매창을 보냈다. 그리고 매창의 흔적을 찾아 부안의 산야를 헤맸다. 비록 기생이지만 매창의 재주와 인간적 향기를 아껴 우정을 나눈 허균은 매창이 세상을 떠난 지 8년 후인 광해 10년(1618) 8월 24일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 중기 문신이며 소설가인 교산 허균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 시대 대표적 걸작 소설 《홍길동전》과 《한년참기》, 《한정록》 같은 책을 남겼다.

 

 

매창의 작품

 

 

 작품으로는 가사와 한시 등 70여 수 외에도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1668년(현종 9)에 구전하여 오던 작자의 시 58수를 모은《매창집(梅窓集)》이 있다.

 

 생애 많은 시를 남겼으나 거의 없어지고 현재 전하는 것은 시조와 한시 58수뿐이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중에 「추사(秋思)」·「춘원(春怨)」·「견회(遣懷)」·「증취객(贈醉客)」·「부안회고(扶安懷古)」·「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다. 그는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그의 작품은 그녀가 죽은 13년 뒤인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그녀가 남긴 시 중에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58편의 작품을 모아 개암사라는 사찰에서목판본으로《매창집(梅窓集)》을 펴냈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매창의 무덤

 

 

  매창은 유희경과 재회한 3년 뒤, 1610년 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 봉덕리에 그녀가 생전에 즐겨 타던 손때 묻은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 이라고 부른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인 1655(효종 6)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던 것을 글자의 마멸이 심하여 부안의 풍류모임체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191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묘비 앞면에는 ‘名媛李梅窓之墓(명원이매창지묘)’라 썼고, 뒷면에는 이매창의 생졸년(生卒年)과 이매창의 시·문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비석이 오래되어 다시 세운다는 간단한 내용이 새겨져있다. 부풍시사에서 매창의 무덤을 돌보기 전까지는 마을의 나무꾼들이 서로 벌초를 해오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을 할 때에도 그들은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고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지금 매창공원에는 매창의 시비 외에도 매창을 그리는 시비들이 세워져 있다. 그녀가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전라도 땅 후인 중에 시조시인인 이병기는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 시를 읽다보면 구절구절이 매창 생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羅衫裳(나삼상)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가람 이병기의 '매창뜸'

 

 

명창 이중선의 무덤

 

 

 매창의 묘 바로 곁에는 남도명창 이중선(李中仙, 1903-1935)의 묘가 있다. 이중선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 명창이다. 전북 남원(현재 전북 남원시)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정확한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1899-1943)의 동생이자, 판소리 고수 이화성(李化成)의 누나이다.

 

 20대에 언니 이화중선과 함께 전북 고창군 풍류객들의 모임인 율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30세(1932) 무렵 대동아창극단이 함경남도 원산에서 공연했을 당시, 이화중선이 이도령 역, 이중선이 춘향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이영민(李榮珉, 1881-1962)은 『벽소시고(碧笑詩稿)』에서 이중선과 이화중선 자매를 아울러 양가선(兩歌仙)이라 칭하기도 했다.

 

 1935년 임종원이 창단한 대동창극단(大東唱劇團)에서 강남중·신영채·홍갑수·이화중선·박초선·박초홍 등과 함께 주로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단가 〈호남가〉<춘향가〉 중 '옥중상봉 대목',〈적벽가〉중 '군사설움 대목' 등의 유성기 음반이 전한다. 이화중선과 〈춘향가〉 중 '사랑가' ‘자진사랑가’를 병창(竝唱)으로 남겼다.

 

 

끝 마무리

 

 

 지금 매창의 이름으로 불리는 부안의 공동묘역은 수천 평에 이르는 매창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소중한 문화유적지로서 훌륭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공원 곳곳에 매창과 관련된 시비 등이 세워져 있고, 부안예술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부안사람들은 해마다 매창의 제사를 지내고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려왔다. 기생신분이면서도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붙였던 여인. 한 여인의 시집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예가 세계사에 없다. 매창이 간 지 350년 후 부안사람들은 부풍율회를 중심으로 김태수, 김민성, 김형주, 양규태, 김원철 님 등이 매창의 생애와 문학을 알리기에 앞장섰고, 소설가 정비석, 부안의 목가시인 신석정, 최승범 교수 그리고 젊은 후학들 다수가 힘을 보태고 있다.

 

 

매창공원 구성도 

 

 

매창공원에 인접한 부안문화관

 

 

매창공원 한켠의 부사의 탑

 

 

매창공원 산책로

 

 

 

 

 

 

 

 

 

 

매창공원 안에 있는 매창의 시비

 

 

유희경이 매창에게 보낸 시도 돌비에 새겨 매창공원 안에 세웠다.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는 허균의 시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그의 작품을 칭송한 후대인의 시비(위로부터 이병기,정비석, 송수권, 김민성의 시비

 

 

 

매창의 묘와 해설판

 

 

매창의 고결한 넋인듯 해당화 한 송이가 길손을 맞이한다.

 

 

 

매창공원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묘는 명창 이중선의 것이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