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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충북 괴산,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자취를 찾아

by 혜강(惠江) 2015. 3. 9.

 

충북 괴산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 홍명희의 자취를 찾아  


 

글·사진 남상학

 

 

 

 

▲도로변에 새운 홍범식 고택 표지판

 

 

  산고수청(山高水淸) 의 고을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일대에는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지은 벽초(璧初) 홍명희(1888~1968)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항일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옥고를 치렀고, 언론인, 소설가, 사회운동가로도 활동한 선생은 월북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면 안 되는 월북 문인이 되었다.

 

  월북 문인 해금 조치에 따라 1980년대 중반 국내에 다시 소개된 <임꺽정>은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홍명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산천, 괴산 읍내 일대에는 홍명희 생가를 비롯하여 그가 살았던 옛집, 제월대와 절벽 위 ‘고선정’이라는 정자에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홍범식 고택인가, 홍명희 생가인가?  

 

 

 

 

  괴산읍 동부리(임꺽정로 16, 450-1번지)에 있는 홍범식 고택은 작가 홍명희(1888-1968)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홍명희의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로 있던 1910년에 일본이 나라를 강제로 빼앗자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 순국한 인물이다. 고택 옆에는 홍범식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홍범식 고택은 조선 영조 때인 173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1800년대 중반에 증축했고, 1920년에 주인이 바뀌었다.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야 한다는 뜻이 모아져 1997년 ‘홍범식·홍명희 생가 보전위원회 괴산 모임’이 만들어졌다. 약 3,300㎡ 대지에 안채, 사랑채, 아래사랑채, 중문, 대문채, 장독대, 광채, 김치광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고택은 전형적인 조선 중부지방 양반집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있으며 중문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고 있는 구조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이다. 안채 앞에 ‘ㅡ’자형 광이 있어 위에서 보면 ‘ㅁ’자 형태로 보인다. 사랑채는 좌측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적으로 뒷산의 자연경관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조화시키며 오밀조밀한 내부공간을 연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좌우대칭의 평면구조를 갖는 중부지방의 살림집의 특징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홍명희 선생 등이 1919년 3월 19일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괴산 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기도 하다.  

 

 

 

 


   홍범식 고택은 월북인사의 집이라 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아 오랜기간 방치 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는데 소설 임꺽정이 정식 출간된 후에야 복원될 수 있었다. 1984년 당시 '괴산 이복기 가옥'이란 이름으로 지정(중요민속자료 146호)됐으나 소유자의 요청으로 1990년 문화재 지정이 해제됐다가, 2002년 12월 충북도 민속자료 14호로 다시 문화재 지정을 받으면서 '홍범식 고택'이란 이름으로 등록됐다. 지역 안팎에서는 '홍범식 고택'보다는 '홍명희 생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문화재 당국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애국지사 홍범식의 이름을 내걸었다.


  앞서 1998년에는 괴산지역 예비역 장교동우회가 '소설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 생가'란 이름으로 고택 앞 도로변에 안내판을 설치했다가 이듬해 안내판 한 면에는 '의사 홍범식 생가'로, 다른 면에는 '소설 임꺽정 저자 생가'로 수정됐으나 그 뒤 이 안내판마저도 철거됐다. 홍명희의 이름은 그렇게 지워졌다. 
 

  해방 후 홍명희는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독립당 대표로 활동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자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북에 남았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됐다. 광복 직후 남이 아닌 북을 선택한 그의 과거 행적으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토록 동부리 고가는 부친 홍범식과 아들 홍명희의 이름으로 혼용되고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 조부 홍승목은 친일파로, 부친 홍범식은 순국열사로, 아들 홍명희는 독립운동가·북한 부수상 등 풍산 홍씨 3대의 굴곡된 가족사를 엿보게 한다.

 

괴산 만세운동유적비  

 

 

  홍명희 등 애국인사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적비

 


  고택을 나와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큰길 왼쪽에 큰 느티나무가 보인다. 그 나무 아래 만세운동유적비가 있다. 괴산군은 3·1만세운동을 충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고 좌우합작운동인 신간회(新幹會) 지회도 1927년 11월 26일 괴산군에서 지회가 가장 먼저 창립되는 등 일제강점기 충북지역 독립운동의 발원지였다.

 

  홍명희 선생 등은 1919년 3월 19일, 유적비가 세워진 이곳(괴산읍 읍내로15길 46,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215-4)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던 괴산장터였다. 벽초 홍명희에 의해 주도되었던 운동은 다음 장날엔 동생 홍성희에 의해 지속되었고, 그 뒤 장날마다 만세운동이 연속되었다고 한다.

 

  조선헌병대사령부의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에는 이날 700명이 시장에서 시위를 벌여 주동자 4명을 붙잡았고, 조선총독부경무국의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에는 충북에서 처음으로 이날 괴산 장날을 이용, 600명이 경찰서를 습격해 주모자 7명을 검거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도 3월 19일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홍명희·이재성·홍용식·홍태식·심형택·김인수 등 일반인과 곽용순·이병석·윤명구 등 학생이 경찰에 붙잡혔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3월 19일 괴산 장터에서 시작한 시위는 충청북도 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되어 4월 9일 제천 송학 시위까지 1개월 동안 적어도 35회의 만세시위가 충북 곳곳에서 잇달아 일어났다.

 

  유적비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3월 19일 괴산 장날에 맞추어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의 의미를 되새겨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괴산 만세운동의 지도자인 홍명희의 이름은 1985년 설립 당시에는 빠져있었다가 1998년에 다시 넣었다고 한다. 굴곡진 역사의 반영이 유적비에도 드러나 있다.

 

제월리 홍명희 옛집(제월리 365번지)

 

 

      지난 여름에 촬영했던 사진


 

   홍명희 선생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일로 1년 6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옥에서 나온 선생은 동부리 집에서 3.8km 떨어진 괴산읍 제월리로 이사를 했다. 아무 표시도 없는 대문 없는 집 마당에 들어서면 바로 옛 건물 한 채가 나온다. 옛날 집 본채에 딸린 사랑채 건물이다. 본채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데 그 자리에 작은 정원을 꾸몄다. 정원 한쪽에 ‘우리문화기림회’가 1993년 4월 24일에 세운 표지석이 이곳이 홍명희 선생이 살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선생은 1924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은 민족의 선각자로서 겨레의 수난기 延專(연전) 교수와 時代日報(시대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고 대하소설 '林巨正(임꺽정)'을 쓴 璧初(벽초)께서 태어나 자란 옛집이다.' 

  표지석의 전문(全文)이다. 이날 표지석 건립은 우리문학기림회와 괴산문학회 회원 10여 명이 참석하여 조용히 치러졌다. 그러나 선생은 1928년부터 <임꺽정>을 집필했으니, 괴산에서 살 때는 작품활동과 큰 연관이 없다. 하지만 선생의 강인한 품성과 문학성 감성을 키워준 것은 고향 괴산의 자연이다.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 


  벽초 홍명희 선생이 10년에 걸쳐 집필한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서 민족문학사에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는 대하소설이다. 홍명희는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임꺽정>을 연재했다. 몇 차례나 연재 중단을 거듭하다가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1940년 《조광》지에 발표하였으나 결국은 완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임꺽정>은 미완성작이기는 하나, 이미 발표된 것만도 원고지 13,000매 이상 되는 방대한 양이며 미완성 부분은 전체의 10분의 1정도라 추측되므로 이를 제외하고도 충분히 그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이다.

 

  소설 <임꺽정>은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가장 방대한 규모의 작품으로 조선 중기 연산군 대와 중종 대에 걸쳐 황해도를 근거지로 활약했던 조선 최대의 화적패 임꺽정의 활약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연산군 시기 교리 벼슬을 지내던 이장곤이 귀양가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고 임꺽정의 부하 중 한 명인 천하의 모사꾼 서림이가 관군에 잡혀들어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하루라도 연재가 중단되면 신문사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임꺽정 26 - 의적

 

                                             

  <임꺽정>은 봉단편 · 피장편 · 양반편 · 의형제편 · 화적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단편 · 피장편 · 양반편에서는 화적패가 출몰하지 않을 수 없는 당시의 혼란상을 폭넓게 그려나가면서, 임꺽정의 일생을 중심으로 하여 그와 연관된 이봉학 · 박유복 · 배돌석 · 황천왕동이 · 곽오주 · 길막동이 · 서림 등 여러 인물의 이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의형제편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마침내 의형제가 되어 청석골에서 조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화적편은 그 후 이 집단이 벌이는 일련의 활동상이 그려져 있다. 연산군, 조광조, 이순신, 보우 등 역사적 인물을 비롯해 갖바치, 황천황둥이 등 수많은 인물들이 당시 격변 많은 조선 역사를 배경으로 종횡으로 활약하고 있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쓰면서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고 했다. 서양문학을 흉내 낸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 정서가 풍부히 담긴 소설을 쓰려 했다는 뜻이다. <임꺽정>은 출판되자마자 전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우리 근대문학의 고전이라는 정평을 얻었다. 글의 분량이나 내용으로도 다른 작품보다 월등하게 뛰어나 최고의 대하소설로 인정받았다. 이 소설은 길기도 긴 만큼 등장인물도 많고, 그 등장인물들의 배경과 활동 무대 역시 종횡무진 거칠 것 없이 펼쳐진다.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토속어 구사가 뛰어나며, 근대 서구소설적 문체가 아닌 이야기식 문체를 통해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재사인 작가가 구연하는 한 판의 길고 긴 이야기이다. 18, 19세기에 융성했던 야담(野談)과 민간풍속 · 전래설화 · 민간속담 등을 풍부하게 살렸다. 아마도 홍명희는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국내외 동횡무진, 나라 잃은 설움과 조국의 독립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려 하였을 것이다.

 

  <임꺽정>은 해방 직후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지만, 그가 월북하여 북한의 실력자로 활동하는 바람에 남한에서는 상당 기간 금지가 되었다가 월북문인 작품 해금 조치에 따라 1980년대 중반에 해금되어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종화, 황석영, 김훈 등 유명한 역사소설가들에게 <임꺽정>은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임꺽정>을 논한 저서와 논문도 100종이 넘는다.

 

홍명희 문학비 건립 
 

 

           제월대 주차장 옆에 세운 홍명희 문학비

 

 

   제월리 집 부근에 선생이 즐겨 찾던 제월대가 있다. 제월리 집에서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 제월대까지는 약 1km 거리다. 선생은 제월대 아래를 흐르는 괴강 물줄기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사색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그곳에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문학비가 있다.

 

  제월대 주차장 한쪽에 홍명희 선생의 문학비가 보인다. 홍명희 선생의 월북과 북한에서의 행적 등으로 인해 문학비 건립 자체를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강하게 대립했다. 
 

  1998년 10월 17일, 홍명희가 고향에 내려와 괴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소나무 울창한 제월대와 고산정에 서서 망국의 한을 달랬을 그곳에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건립됐다. 홍명희문학제 공동 주최측인 충북민예총, 충북작가회의, 사계절출판사가 중심이 된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가 건립한 이 문학비는 이듬해 괴산지역 보훈단체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철거 위기에 놓였다. 이 사태는 괴산경찰서 중재로 문학단체와 보훈단체가 문학비를 철거하지 않는 대신 문학비 뒷면 동판 내용을 수정하는 쪽으로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제5회 홍명희문학제 때 다시 부착된 동판에는 홍명희가 월북해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있을 때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다는 내용이 삽입됐다.

 

   문학비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썼다. 이후 이 문학비는 그 자리에 지금까지 남아 있지만, 그의 문학을 기리는 홍명희문학제는 고향에 여전히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제월대와 고산정

 

 

  제월대 언덕 위에 선 정자 고산정

 

  

  주차장 위 보기 좋은 소나무 우거진 숲에 고산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고, 절벽 아래 괴강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 이 모든 풍경을 제월대라고 부른다. 제월대는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된 곳이다. 제월대에 있는 고산정의 원래 이름은 만송정(萬松亭)이었다.

 

  제월대 절벽 위에 자리잡은 고산정은 1596년(선조 29)에 충청도 관찰사 유근이 세운 정자다. 유근은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만송정과 고산정사를 짓고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은거했다. 숙종 2년에 고산정사는 불타 없어지고 만송정만 남았는데, 유근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그의 호를 따서 고산정으로 칭하게 되었다. 충북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고산정은 1978년 충청북도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이 원이 쓴 현판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단층 정자로 마룻바닥을 따라 평난간을 둘렀다. 처마 밑에는 이 원이 쓴 ‘孤山亭(고산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는 명나라 사신이었던 주지번이 1606년(선조 39)에 쓴 '호산승(湖山勝集)집' , 웅화가 1609년(광해군 1)에 쓴 ‘고산정사기’등의 편액이 있다. 달천강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을 자랑한다.

 

 

 

제월대 아래로 흐르는 괴강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강가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강 쪽으로 내려가 제월대를 바라보니, 위쪽 까마득하게 고산정이 보인다. 위에서 괴강을 내려다보아도 장관이요, 아래서 제월대를 바라보아도 장관이다. 그래서 이곳에 고산정을 짓고, 시심을 일깨운 것이 아닐까? 흰 눈이 쌓인 겨울 경치는 또 다른 정자의 풍취를 느끼게 만든다.

 

 홍명희 선생도 이 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갔을 것이다. 물줄기 굽이쳐 흐르는 그곳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아마도 소설 <임꺽정>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1. 찾아가는길
* 자가운전 : 중부고속도로 증평IC → 증평 → 괴산읍 → 동부리 홍범식 고택

* 대중교통 : 서울→괴산 : 동서울터미널에서 1일 17회(06:50-20:10) 운행, 2시간 소요, 괴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홍범식 고택까지는 걸어서 10분. 홍범식 고택에서 홍명희 옛집까지는 약 3.8km. 홍명희 옛집에서 제월대까지는 약 1km. 대중교통이 불편해 생가와 옛집, 제월대를 돌아보려면 택시를 이용하는 게 좋다.



2. 주변 음식점
다래정 : 산채정식, 버섯찌개 / 괴산군 괴산읍 동진천길 165 / 043-832-1246

주차장식당 : 올갱이국 / 괴산군 괴산읍 읍내로 282 / 043-832-2673
우리매운탕 : 매운탕 / 괴산군 괴산읍 괴강로느티울길 8-2 / 043-834-0005
괴산올갱이해장국 / 올갱이해장국 /괴산군 칠성면 괴강로 553 / 043-832-448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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