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의 시인 박인환(朴寅煥)
- 1950년대 젊은 시인의 슬픈 자화상(自畵像)
글·사진 남상학
아차산 산행을 계획할 때 나는 애초부터 아차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망우산까지 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 망우산공원묘역에는 애국지사 및 유명인사의 묘역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안장된 한용운, 방정환, 박인환의 묘를 꼭 보고 싶어서였다.
▲시인 박인환의 묘는 망우리 애국지사묘역의 뒤편에 있어서 지도를 보고 찾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이다. *
시인 박인환, 망우리 묘역에 잠들다.
산행의 끝자락 힘겨운 다리를 끌고 묘역에 도착하여 한용운, 방정환의 묘는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박인환의 묘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애국지사 묘역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박인환의 묘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놓치고 만 것이다. 마침 길 가는 젊은 여자에서 물었더니 어디선가 본 듯한데 진행방향으로 계속 올라가면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말뿐이다. 그녀의 말대로 한참을 가다보니 다행히 길가 왼쪽에 박인환의 시비가 있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을 새긴 것이었다. 그리고 시비의 뒷면에는 그의 연보를 간략하게 새겼다.
1926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
1945 광복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하여 종로 낙원동에서
서점 '마리서사'를 경영
1946 <국제신보>에 ‘거리’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
1948 동인지 ‘新詩論’(신시론) 제1집 발간
1949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5인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고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을 받음. 동인그룹 ‘후반기’(後半紀)를 발족시킴
1955 <박인환 선시집> 출간
1956 <세월이 가면><죽은 아포롱><옛날의 사람들에게> 등을 씀
▲ 이 시비는 묘역 아래쪽 길가에 있다. *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묘는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시 물어보니 머리를 흔들고 지나간다. 포기할 수 없어 길 따라 올라가서 샛길로 접어들어 북쪽으로 한참을 돌아가서야 비로소 묘를 찾을 수 있었다. 거리로는 도로에서 불과 100m도 안 되어 보이지만 길도 없고 경사가 심해서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다. 길이 제대로 안 된 것을 보면 주변 묘들도 찾는 이들이 별로 없는 듯하였다.
오래되어 낮게 주저앉은 봉분 앞에 ‘詩人朴寅煥之墓’라고 쓴 시비에는 그의 마지막 무렵의 작품인 「세월이 가면」의 한 대목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의 글귀가 세월에 씻기고 깎여 겨우 글자를 알아볼 정도로 적혀 있었다.
▲ 망우리에 있는 박인환의 묘와 묘지석, 묘지석에는 '세월이 가면'의 한 대목이 적혀있다.
내가 유독 박인환의 묘에 관심을 둔 것은 첫째로, 그가 아깝게도 31살 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갔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월(素月)이나 이상(李箱)보다는 좀더 살았지만 단명했다.
박인환의 생애와 문학
그(1926~1956)는 일제 강점기에 강원도 인제군 상동면 159번지에서 태어나 11살 때인 1936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런 연유로 강원 인제군에서는 자기 고장 출신인 시인 박인환의 시비를 인제읍 합강리 소공원에 세우고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강원도 인제읍 합강리 공원에 세운 박인환의 시비
그는 고향에서 8살 때인 1933년 인제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11살때인 1936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 종로로 이주해 덕수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1939년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에 경기중학교를 자퇴하고 한성학교 야학을 다니다가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1944년에 졸업했다.
이해 곧바로 3년제였던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상경해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열었다. 그 때 그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문학에 눈을 떴다.
1948년 이정숙(李丁淑)과 결혼한 후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에서 살았다. 1948년 자유신문사에서, 1949년 경향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한 그는 1950년 6.25 전쟁 이 일자 피난을 가지 못해 9.28 수복 때까지 서울에서 숨어 지내다가 12월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가서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여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대한해운공사에 취직한 것은 1952년이었고, 1953년 7월에 서울 세종로 옛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심장마비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떴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금 그가 결혼하여 살던 광화문 집터에는 박인환 시비가 있다. <박인환 선생 집터>라고 쓴 그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이곳은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1926-1956)이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하였던 장소이다. 1955년에는 <박인환 선시집>을 냈으며, <목마와 숙녀>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광화문 교보문고 뒤쪽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집터 표지석,여기서 그는 1946년부터 1956년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짧은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넓은 계층에 걸쳐 널리 회자되는 작품을 썼다는 점이다.
그가 문단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46년, 그는 <국제신보〉에 시〈거리〉를 발표해 문단에 나왔다.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그 후 〈남풍〉(신천지, 1947. 7)·〈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김수영·김경린·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체험한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어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갈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와 숙녀> 전문
이 시에는 ‘술’이라는 글자가 다섯 번 등장한다.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 이 상황 속에 우울하고 비참했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를 끌어들여 버어지니아 울프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輓歌) 형식으로 써 나갔다. 이 글에서 그는 절망적인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박인환의 시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센티멘탈’의 감성 속에 숨겨진 50년대 서울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언뜻 보면 작품 속에 문명의 이미지들로 가득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자주 단절적이다. 문명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박인환의 그의 감상주의 때문에 철저한 모더니스트가 되지 못했다. <목마와 숙녀>의 동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감상주의 즉 센티멘탈리즘이다. 박인환은 동인지 ‘신시론(新詩論)’과 동인 그룹 ‘후반기(後半紀)’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모더니스트를 자임했으나, 그의 모더니즘은 거의 감상주의에 감염돼 있었다.
그러면 왜 그는 감상에 빠져 절망을 노래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의 가혹한 현실 인식 때문이었다. 해방직후 외세의 진주로 인한 신식민지적 문화의 침투와 민족문화 내지는 민족정신의 대립, 그리고 6.25전쟁의 파괴와 살육에 대한 절망과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의 선택해야 했던 실존적 갈등이 그를 좌절과 허무감으로 내몰았고, 저항할 힘이 없던 그는 하나의 돌파구로서 우울한 센티멘탈리즘의 세계 속에 안주하게 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감상에 버무려 절망을 어루만진 것이라고나 할까? 시인 정끝별은 말한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세련된 감각과 지성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이라 할지라도 1950년대의 전쟁과 비극, 퇴폐와 무질서, 불안 · 초조 등의 시대적 고뇌를 그는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우수(憂愁)의 시인이었다.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작품에서 풍기는 「버리고」「떠났다」「떨어진다」「죽고」「버릴 때」「보이지 않는다」「시들어 가고」「희미한 의식」「서러운」 등의 패배주의적 감상은 그의 많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삶이 여느 다른 친구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박인환은 훤칠한 키에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용모였다. 그는 몹시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도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은 외제 초콜릿 색 싱글에 버버리 코트를 걸치고, 붉은 넥타이에 커피색 양말, 검정 박쥐우산을 들고 다녔다.
그가 즐겨 마시는 술도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죠니 워커를 가려 마셨다. 그런가 하면 즐겨 찾는 명동 살롱에서는 샹송을 즐겨 불렀다. 그는 월급의 대부분을 옷을 장만하는 데 썼다. 계절에 따라 코트와 양복을 바꾸고 영국 신사처럼 멋을 내며 명동을 돌아다니던 사람이 박인환이었다.
생활의 찌듦을 드러내지 않고 멋의 가면을 쓰고 명동을 누볐기에 박인환에게는 '댄디' ‘명동 백작’ ‘명동 신사’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다. 그런데 혹자는 그의 이런 생활을 ‘겉멋’이 들었다거나, 가당치도 않은 ‘허세’라고 힐난하기도 했다. 허무와 손잡은 그는 어쩌면 정신적 귀족주의자(?)를 자처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제 박인환문학관 앞뜰에 세운 조각상은 평소 박인환의 차림새를 형상화한 것이다.*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리던’(목마와 숙녀) 시대의 상황 속에서 박인환은 그 모든 죽음을 부정하고, 로맨티스트로 변색(變色)하고 멋과 기쁨의 삶을 누리며 버티고 싶어 한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구차스러움을 벗어던진 멋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가면이 아니었을까? 혹자는 그의 남다른 멋 때문에 오늘 우리는 박인희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세월이 가면>을 만나고, 읊조리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의 생애의 끝 무렵에 쓴 작품을 보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시인가? 세기의 로맨티스트였던 박인환은 명동의 어느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불현듯 한 편의 시 <세월이 가면>을 써 나갔다. 설(說)이 분분하지만 <세월이 가면>은 1956년 외상값을 독촉하는 막걸리집 '은성'의 여주인 이명숙에게 즉석에서 써준 시였다. 옆자리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李眞燮)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 옆집에서 술을 마시던 현인(나애심이라는 설도 있다.)이 와서 악보를 보며 노래를 했다. 모두 취중의 일이다.
사연 많은 여자의 인생을 담은 노래에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인 여주인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외상값 안 줘도 좋으니 그 노래는 부르지 말아 달라"고. 그 후 이 노래는 현인을 거쳐 박인희의 노래로 더 유명해졌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이 시를 쓰기 전날 그는 그의 첫사랑 옛 애인이 묻힌 망우리 공동묘지를 찾았다고 한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라며 노래한 그는 이 작품을 쓰고 일주일 후인 1956년 3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가면>은 세상 떠나기 불과 며칠 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첫 시집엔 없고, 20주기에 맞춰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에 실려 있다.
박인환은 세상 떠나기 3일 전인 3월 17일에 천재시인 이상(李箱) 추모의 밤이 있었는데, 이날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던 그는 끼니를 거르기도 했다는데, 그런 상태에서 빈속에 계속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 됐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의 죽음에서 나는 문득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술 권하는 사회>의 마지막 대목이 떠올렸다. “조선 사회가 나에게 술을 권한다”는 주인공의 탄식 말이다. 이것은 바로 1920년대의 모든 지식인의 공통된 탄식이요, 우리민족의 탄식이었다. 주인공의 아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듯이, "가 버렸구먼, 가 버렸어." 하며 밤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며 절망적인 어조로 말한 것을.
그의 죽음에 문인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시인 박인환이 죽던 날, 문인들은 박인환의 시신 둘레에 빙 둘러앉았다. 누군가가 박인환이 좋아하던 조니워커 병을 꺼내 죽은 박인환의 입에 넣어주고, 자신도 마셨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박인환의 입에 술을 부어주고 자신도 술을 마시며 슬퍼했다. 그들은 생전에 같이 어울렸던 사람들이다. 친구의 슬픔 앞에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 복받쳐 올랐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시대의 아픔을 온몸에 지고 대신 살아준 술친구가 없는 세상이 허전했을 것이다.
많은 문우들과 명동의 친구들이 모인 그의 장례식 날, 모윤숙이 시 낭독을 하고 조병화가 조시를 낭독하는 가운데 많은 추억담과 오열이 식장을 가득 메웠다.
“ … / 너는 누구보다도 멋있게 살고 멋있는 시를 쓰고 언제나 어린애와 같은 흥분 속에서 인생을 지내왔다 / 인환이, / 네가 없는 명동, 네가 없는 서울, 서울의 밤거리, 네가 없는 술집, 찻집, 영화관, 참으로 너는 정들다만 애인처럼 소리 없이 가는구나. / … ”
절친이었던 조병화가 눈물과 함께 낭송한 조시처럼 그는 ‘정들다만 애인처럼 소리 없이’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났다. 누구보다 멋있는 삶을 살았던, 멋있는 시를 썼던, 아니, 누구보다도 멋있게 전쟁 후의 피폐함을 버텨냈던 박인환을 이제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고.
망우리 묘지로 가는 그의 관 뒤에는 수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따랐고, 울음소리가 망우리 묘지에 가득 퍼진 가운데 그의 무덤가에 생시에 박인환이 그렇게도 좋아 했던 조니워커 한 병이 뿌려졌고 관 위에는 수십 갑의 카멜 담배가 던져졌다.
박인환의 가까운 선후배들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그해 추석에 그의 무덤 앞에 아담한 비석을 하나 세워주었다. 앞면에는 한자로 ‘시인 박인환지묘’라는 묘비명 아래에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세월이 가면>의 일부 구절,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를 새겼고, 뒷면에는 그의 짧은 행장을 적었다.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 묘비 뒷면의 글자들은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우에 깎여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만약 박인환의 겉멋, 허세가 아무 의미 없는 ‘잘난 척’에 불과했다면 이렇게 많은 문인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도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인식이 떨어진, 서양시의 모방’이라는 평가 속에 묻혀졌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가락에 실려 애송되는 노래 자체가 아니라 작품으로서 평가받는 일이다. 여기서, 한때 박인환의 친구였던 김수영(金洙暎)이 한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영은 그가 쓴 글에서 박인환을 싫어하는 이유를 이렇게 썼다. “사람이 죽어 가는데, 가난과 굶주림에 쓰러져 가는데 ‘한 잔의 술을 마시고...’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초기에는 모더니스트로서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했으나, 4·19혁명을 기점으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썼다. 두 사람의 시작은 같았으나 마지막 길은 정반대였다.
고향 인제에 세워진 박인환시인문학관
다행히 나는 얼마 전 여행길에서 강원도 인제를 지나다 박인환시인문학관 표지판을 발견하고 잠시 둘러보았다. 산촌민속박물관 옆에 별채로 지은 아담한 건물이다. 박인환을 기념하고 그의 문학을 연구할 목적으로 인제군에서 그의 고향 인제에 준공한 것이다. 한창 내부를 꾸미는 중이었지만 앞뜰에는 박인환 모형의 조각상, ‘책 읽는 목마’도 설치해 놓았다.
박인환조각상은 시인이 코트를 입고 바람을 맞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모습인데 코트 안으로 들어가 앉으면 센서에 의해 시인의 대표작과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책 읽는 목마’는 시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에 나오는 목마의 이미지를 살려 아이들이 작은 도서관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인제군은 그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시인 박인환의 거리를 조성해 놓았다.
▲강원도 인제에 건립한 박인환시인문학관, 박인환의 조각상과 '책 읽는 목마'도 보인다.
▲강원도 인제읍의 박인환문학의 거리에서 *
망우리 산을 내려오는 내 눈앞에 비운의 시대 명동 살롱에 앉아 샹송을 부르며 술을 마시던 박인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디선가 50년대 젊은 시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나의 환청 때문일까?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지나서 옛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이름마저 잊혀진다 해도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이 남아 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역설인가? 한 젊은 시인의 애절한 사랑 고백을 가슴에 담고 산을 내려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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