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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김유정문학촌에서 살펴본 소설가 김유정의 삶과 문학

by 혜강(惠江) 2014. 10. 14.

 

김유정문학촌

 

김유정문학촌에서 살펴본 소설가 김유정의 삶과 문학

 


글·사진 남상학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토속적인 작가로 꼽히는 김유정. 우리나라 철도역 가운데 유일하게 사람 이름을 따온 역인 김유정역에서 동쪽으로 400m 걸어가면, 김유정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자 그의 소설 배경이 된 실레마을과 김유정문학촌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경춘선 신남역이었으나 이름을 ‘김유정역’으로 바꾸었으며 청량리에서 하루에 아홉 번 기차가 다닌다. 김유정문학촌은 김유정역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다.

 


A. 실레마을의 김유정문학촌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 하여 '실레'라는 이름이 붙여진 마을 전체가 김유정 작품의 산실이자 무대이다. 금병산 자락의 실레마을은 김유정의 삶과 문학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병산 아래 잣나무 숲 뒤쪽은 《동백꽃》의 배경이다. 김유정기념전시관 맞은편 언덕에는 김유정이 움막을 짓고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 야학터 《안해》가 있다. 마을 가운데에는 실존 인물인 《봄· 봄》의 봉필 영감이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점순이와 혼례는 안 시켜주고 일만 부려먹는 데 불만을 느낀 '나'가 장인 영감과 드잡이하며 싸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옆으로 김유정이 세운 간이학교 '금병의숙'이 있고, 건물 옆에는 당시 김유정이 기념으로 심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김유정이 코다리찌개에 술을 마시던 주막터도 남아 있다.

  멀리 한들마을의 팔미천에는 《산골 나그네》 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뒀던 물레방앗간 '산골 나그네' 터가 있다. 이들 작품들과 함께 《총각과 맹꽁이》,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산골》, 《만무방》, 《솥》, 《가을》등 소설 12편이 이곳 실레마을을 무대로 한다. 이곳에 김유정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이들 장소를 연결하여 걷는 실레이야기길을 걸어보는 것이 좋다. 

  2002년 8월 6일 개관한 김유정문학촌(촌장 전상국)이 있다. 나지막한 뒷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김유정문학촌은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문학 작가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의 문학적 업적을 알리고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고향인 실레마을에 조성한 문학공간이다. 

  입구에는 마을의 지도와 함께, 각각의 장소가 배경이 된 작품 설명이 명시된 안내판이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 기념관 앞으로 그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사후 57주기를 기념해 세운 동상이 있다. 생가에는 연못과 정자, 우물, 외양간, 뒷간, 디딜방아, 장독대가 그 시대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다. 또 앞마당에는 대표작인 《봄· 봄》을 펼친 책과 《동백꽃》의 내용 중 닭싸움하는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이상하게도 그의 유물이 없다. 막역한 친구였던 안회남(安懷南)의 월북과 함께 고스란히 남쪽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유물이 없어도 충분히 김유정을 느껴볼 수 있다. 먼저 잔잔한 목소리로 김유정의 일대기를 설명하는 비디오물을 감상하며 그의 불행한 삶과 그 속에서 꽃피운 예술세계를 접한 후, 김유정이 태어난 해부터 사망할 때까지 연대별로 당시 한국 문학의 흐름을 파악해볼 수 있다. 닥종이 인형으로 《봄· 봄》의 한 장면을 재현해 놓고 있는데, 인물들의 표정이 재밌다. 김유정문학촌은 우리나라 문학관 중에 가장 활발하게 작품 속의 모티브를 활용한 체험행사를 지속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소재지 : 강원 춘천시 신동면 실레길 25
*지   번 :  춘천시 신동면 증리 868-1(실례마을) 
*전   화 : 033-261-4650


 

 

 

 

B.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의 삶과 문학

 

1. 불우했던 어린 시절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부친 김춘식과 모친 심씨 사이에서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김유정 일가가 춘천 집은 그대로 두고 소작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한 게 1914년이었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1915년) 숨을 거뒀다. 김유정의 나이 7살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7년, 김유정의 나이 9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유근(裕根)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했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형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잡기에 탕진하는 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2.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박록주



  어머니를 여읜 그는 휘문고보 시절 친구인 안회남(安懷南)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니는 미인이다”하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그리움은 연희전문 시절까지 이어져 연상의 여인에 대한 짝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뒤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인 박녹주(朴錄珠)였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남도창을 하는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 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 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학교를 그만둔 데다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 형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혜화동 언저리의 허름한 방에서 고통 속에 지내던 그는 1930년에 폐결핵 판정을 받고 이듬해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갔다.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김유정은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1927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3. 금병의숙을 세우다.


  그가 고향에 내려간 것은 남은 재산을 마지막으로 탕진하고 있는 형을 상대로 재산분배를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 위한 일도 겸해 있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둘째 누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매형 정씨의 꾐으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유정이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고,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록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셨던 것이다.

  박록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 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봄이면 잎이 나기 전 노랗게 피어나는 동백꽃(생강나무꽃) 향기에 취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네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역시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록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집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은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다음 해(1931년) 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 현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곧바로 퇴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김유정은 먼저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져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이 무렵은 1920년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나르도, 곧 농촌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던 때였다.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

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
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그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김유정기적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 머물었던 기간은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불과 1년 7개월 정도밖에 안 되지만 박록주를 향했던 그 병적 열정이 탈바꿈되어 새로운 길을 찾음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김유정은 고향 마을에서 가끔 싸움판을 벌였다. 인근부락 청년들이 볼 때 서울에서 내려와 농민회니 부녀회니 만들어 놓고 꺼덕이는 꼴이 아니꼬워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야학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비교적 건장한 덩치와는 달리 병으로 쇠약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만이기도 했을 것이다. 증리에 살고 있는 당시의 제자들에 의하면 김유정은 싸움만 붙으면 몹시 날래게 움직여 수십 명을 상대해 쫓아버렸다고 한다.

 

어떻든 김유정은 실레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촌 청년들을 깨우치는 일에 어느 정도 신명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그 일이 자기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그가 들병이를 찾는 것도 그렇게 가슴이 허망하게 비어드는 시간이었다.

 

 

 

4. 서울로 올라와 작품 창작에 매달리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단편 《소낙비》와 《산골나그네》를 집필, 1934년엔 단편 《만무방》을 지었다. 1935년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소낙비》가, 〈중앙일보(中央日報)〉에 《노다지》가 각각 당선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였다.

 

 

1) 출세작 《소낙비》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작품 《소낙비》는 같은해 〈중앙일보〉에 당선된 《노다지》와 더불어 이 작가의 출세작이다. 가난한 현실 속에서 비리(非理)의 구렁으로 떨어지는 농촌사회의 현실적 모순과 도착(倒着)된 인간상을 도박에 미친 농부를 소재로 풍자했다.

 

「가난한 농군인 춘호는 열아홉 살 된 아내와 견디기 어려운 산골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그는 며칠짼가 잠을 못 이루며 산골을 아예 빠져나가 서울로 가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러자면 2원이 필요했다. 아내를 시켜 주선해보게 했지만, 그녀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춘호는 아내를 습관처럼 두들겨 팼고, 견디다 못한 그녀는 돈을 구하기 위하여 뛰쳐나간다.

  그녀는 마을의 부자이며 호색한인 이주사와 정을 통한 대가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쇠돌엄마를 찾아간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고, 이 주사가 쇠돌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며 생각하다 이 주사 혼자 있을 쇠돌네 집으로 용기를 내어 들어선다. 이 주사와 그녀는 한 시간쯤 뒤 다음날 2원을 받기로 하고 헤어진다. 이튿날 춘호는 아내를 곱게 단장시켜 이 주사에게로 보낸다. 서울로 가기 위하여 또 노름 밑천으로 필요한 2원을 고이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뒤이어 《금 따는 콩밭》(개벽), 《떡》(중앙), 《만무방》(조선일보), 《산골》 (조선문단), 《봄· 봄》(조광)이 각각 발표되어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936년에는 《산골 나그네》(四海公論), 《옥토끼》(女性), 《동백꽃》(조광), 《정조》(조광), 《야앵(夜櫻)》(朝光), 《슬픈이야기》(여성), 《가을》 등을 계속 발표했다. 또한 이듬해 《따라지>》(조광), 《땡볕》(여성), 《정분》(조광), 《총각과 맹꽁이》 등을 내놓았다.

  기타 작품으로 사후에 발표된 단편 《형(兄)》(鑛業朝鮮, 39)과 《두꺼비》(文學思想, 73)가 있으며, 《두꺼비》는 작가가 생존시에 있었던 국창(國唱) 박녹주(朴綠珠)에 대한 유명한 짝사랑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2) 농촌의 뼈 아픈 현실을 그린 《만무방》


  1935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만무방》은 농촌에 사는 응칠, 응오 두 형제가 '만무방'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무방'은 '염치가 없는 악한' 또는 '막되어 먹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열심히 살았지만 남는 게 없는 형 응칠은 가난한 삶과 부채 때문에 파산을 선언하고 식구들과 헤어져 도박과 절도로 전전한다. 전과 4범의 건달인 응칠은 불현듯 하나뿐인 아우가 그리워 아우인 응오의 동네로 와서 하는 일 없이 놀고먹으면서 지낸다.

  한편 동생 응오는 순박하고 성실한 소작농이다. 그러나 가혹한 지주의 착취에 맞서 추수를 거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응칠은 응오 논의 벼가 도둑질당한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도둑으로 몰릴 것을 우려하여 도둑을 잡을 결심을 한다. 깊은 밤 논을 지키고 있다가 도둑을 발견하고 싸움 끝에 도둑을 잡게 된다. 그러나 그 도둑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논의 벼를 농사지은 동생 응오였다.」


  자신이 가꾼 벼를 자기가 도적질해야 하는 이 서글픈 아이러니는 얼마나 눈물겨운 상황인가. 일제 강점기하에 자신이 농사한 벼를 도둑질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현실을 반어적으로 그리고 있다.

 

 



3) 정략결혼의 희생을 그린《봄· 봄》


  1935년 〈조광〉 12월호에 발표한 대표적인 단편 《봄· 봄》은 영세 소작농이 마름의 횡포 앞에 자신을 내맡겨 데릴사위라는 노동과 인신(人身)의 반매매적(半賣買的)인 정략결혼의 희생물이 된 나레이터가 약자를 기만하는 지식과 법률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유린당하고 있는가를 풍자해 높은 작품이다.

「점순이는 열여섯 살이다. 내 아내가 될 계집아인데 키가 너무 작다. 점순네 데릴사위로 작정된 채 3년하고도 일곱 달이나 일을 해 주었지만 심술사나운 나의 장인 욕필이(별명) 영감은 성례시킬 생각은 꿈에도 없는 모양. 그래서 투정을 부리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서낭당에 가서 치성도 드렸고, 일군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꾀병으로 눕기도 여러 차례 했지만 욕필이 영감은 그때마다 몽둥이질이 고작일 뿐이지 ‘너 언제 성례시켜 주마’ 하는 얘기 한 마디 없었다. 그래서 한번은 「난 갈 테유, 그동안 사경 쳐 내슈!」

 

하고 들이대기도 했고 구장한테 장인을 끌고 가서 따지기도 해 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점순이가 「구장님한테 갔다가 그냥 온담 그래!」 하고 내쏘고는 살짝 돌아서며 「이 바보야!」하지 않는가. 나는 그날 드디어 장인과 담판을 지으려고 무자비하게 싸웠다. 다른 때처럼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 그녀의 독살스런 말 때문에 기가 꺾여 바보가 되고 말았다.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역전하여 내 머리가 터지는 곤욕을 치른 뒤에야 장인은 「올 갈엔 꼭 성례를 시켜 주마. 암맘 말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 얼른 갈아라」라고 말한다.」

 

 



4) 소작인 아들과 마름의 딸 사이의 갈등과 로맨스, 동백꽃

 


  《동백꽃》은 1936년 〈조광〉 5월호에 발표한 단편. 소작인 아들과 마름의 딸 사이에 생긴 갈등과 로맨스를 다룬 작품이다.  열일곱 살 된 나는 동갑내기인 점순이네 소작인의 아들이다. 점순이는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처녀로 그녀가 내게 감자를 주면서 모처럼의 호의를 보였을 때 거절한 뒤부터 그녀는 더욱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하루는 점순이가 우리 수탉을 잡아다가 아주 험상궂게 생긴 자기네 수탉과 싸움을 붙여 우리 수탉을 반 죽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닭이 고추장을 먹으면 싸움을 잘한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허사였다. 나무를 해 가지고 산에서 내려오던 어느 날, 산기슭의 바위틈에 노오랗게 꽃술을 단 동백꽃이 피어 있는 사이에 앉아서 호드기를 불고 있는 점순이를 보았다. 그리고 더욱더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싸움에 져서 빈사지경에 이른 우리 수탉이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지겟작대기로 점순이네 닭을 때려죽여 버렸다.

  그 순간 우리 집은 땅을 못 붙이게 되고 집도 내쫓기게 될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얼결에 엉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점순이는 나를 끌어안고 알싸한 동백꽃 향기 속으로 누워버리는 것이었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쪽 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인데‘알싸한’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라고 꽃 냄새를 절묘하게 그려내었다. 

 

 



5. 또 한 번, 여성으로 인한 좌절

 


  김유정과 관련 있는 또 하나의 여인은 박봉자(朴鳳子)였다. 그는 시인 박용철(朴龍喆)의 동생으로, 1926년 봄 잡지 <조광>에 '사랑의 편지'란 공동 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병으로 몸과 마음이 심약해진 김유정은 박봉자의 글에 매료됐다. 그는 얼굴도 못 본 그 여성한테 연모한다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7년 전 박록주한테 쓰던 그런 글보다 더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다. 답장이 없자 서른 통 이상의 혈서를 써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답장을 받지 못한 어느 날 김유정은 신문 결혼 소식란에서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곧바로 동아일보 기자가 된 박봉자가 자기가 잘 아는 문학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했다는 기사를 읽고 크나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박록주에 이어 박봉자까지, 여성에게 두 번이나 거절을 당한 셈이다.


 

 

6. 9인회 활동과 친구 안회남(安懷南) 

 

 

  김유정은 「9인회(九人會)」후기 동인으로 활약했다. 9인회는 1933년 결성된 문단작가 모임으로 시인 김기림(金起林), 소설가 이효석(李孝石)· 이종명(李鍾鳴)· 김유영(金幽影)· 유치진(柳致眞)· 조용만(趙容萬)· 이태준(李泰俊)· 정지용(鄭芝溶)· (李無影)이 결성하였다.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 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조용만 대신에 김유정(金裕貞)·김환태(金換泰)로 교체되어, 항상 9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9인회는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당시 순수문학의 가장 유력한 단체로 활동하였으나 4년 만에 해체하였다.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 되어 <시와 소설> 이라는 동인지를 펴냈다.

  그러나 김유정의 9인회에서의 활동은 짧은 기간만큼이나 미미했다. 오히려 김유정은 휘문고보 시절 같은 반 단짝이었던 안회남과 교제가 깊었다. 1909년 11월 생인 안회남은 김유정과 막역한 사이였다. 둘은 휘문고보를 다닐 때 한 반에서 공부하면서 만나 친해졌고, 김유정은 안회남과 사귀면서 부모 잃은 자신의 처지를 달래기도 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친밀하게 지냈다.

  안회남은 개화기의 신소설 작가로 유명한 안국선의 외동아들로 본명은 필승이다. 안회남은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신세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변 소설과 세태 소설의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을 전후한 무렵 월북했다가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유정은 세상을 뜨기 직전에 안회남에게 편지를 남긴 만큼 우정이 각별했다. 김유정은 자신의 병든 몸을 고치기 위해 돈이 될 만한 추리소설을 번역하는 데 친구 안회남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안회남의 도움으로 번역 작품이 발표된 것은 그의 사후 3개월 뒤였다.  


 

 

7. 스물아홉의 고단한 삶

 


  김유정은 그동안 병마와 빈한과 시대고(時代苦) 속에서도 스물아홉 문단 생활은 불과 2년여 동안 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 일기 6편, 번역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그만큼 그의 문학적 열정은 남달리 왕성했다.

  청소년 시절에 불우했고 작가로 등장한 후에도 역시 생활고(生活苦) 시달린 데다가 폐결핵으로 인한 우울은 이 작가의 성격이 되었다. 그 우울성은 일견 유머러스해 보이는 작품 뒤에 항상 애수(哀愁)의 그림자를 숨겨 놓았다.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중앙〉 10월 · 11월호에 미완성 장편 《생(生)의 반려》를 연재 중,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부면(中部面) 상산곡리(上山谷里)에서 요절했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는 김유정이 숨을 거두기 열흘 전쯤 가장 친한 친구인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편지는 다음과 같다.  


「필승 전,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
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하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 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짚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삼십 마리 고 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 다오.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김유정의 편지 가운데 가장 마지막 것으로 알려진 이 편지는 1963년에 공개된 자료다. 편지 끝에‘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숨을 거두기 열흘 전쯤의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던 김유정이 목숨을 살리기 위해 추리 소설을 번역하고 싶다는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창작소설보다는 돈을 위해 추리 소설을 번역해야 할 만큼 그는 절박했다. 사망 직후인 그해 6월부터 11월까지 6회에 걸쳐 유작 형태로 조선일보사 계열의 문예지 <조광>에 연재된 추리소설 《잃어버린 보석》이 그것이다. 원작은 반 다인(S.S.Van Dine)의 대표작《벤슨 살인사건(The Benson Murder Case)》(1926)이었다. 병상에서 안간힘을 다해 심혈을 경주하였으나 그는 병든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9. 김유정 문학의 의의



1) 김유정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김유정

  김유정의 문학은 농민문학의 법주에 포함된다. 1930년대가 평론가 안함광(安含光)과 백철(白鐵)에 의해 제기된 한국 농민문학이 농촌 혹은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광수의 《흙》,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흙의 노예》. 김동리의 《산화》,  박영준의 《모범경작생》과 《목화씨 뿌릴 때》그리고 김유정의 《동백꽃》과 고향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을 들 수 있다.그러나 이광수, 심훈, 이무영 등의 작품이 일제의 식민지 농촌의 수탈현상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 속성으로 안고 있는 취약성, 또는 한국농업이 처해있는 역사적 생산 조건 따위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으므로, 많은 문학적 결함과 이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소재를 찾는 일종의 소재주의 위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김유정의 문학은 계몽적 이상주의나 감상적인 현실중시의 피상적인 농민문학이 아닌 당시의 농촌과 서민· 농민의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그 생활감정과 습속의 내면적인 흐름 및 본질적인 인간상들을 보여 줌으로써 하나의 사회학적인 입장에까지 작품의 차원을 끌어 올리기도 했다.

  김유정이 살았던 농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의 명목으로 침략전쟁의 뒷바라지와 차질 없는 식량 공급을 강요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김유정이 어린 시절에 본 맹꽁이, 만무방, 들병이, 금장이, 거지들의 모습은 뒷날 김유정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팔미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다가 길가 오막살이 돌쇠네 집에 들러 돌쇠 어멈으로부터 그 집에 며칠 머물다 도망친 어떤 들병이 여자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이 그의 처녀작이 된 《산골 나그네》인 것이다. 그리고 실레 마을에 딸만 여럿 낳아 데릴사위를 들여 부려 먹으며 욕을 잘하는 박봉필이란 사람을 관심깊이 살펴보곤 했다. 그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쓴 작품이 바로 《봄· 봄》이다. 《총각과 맹꽁이》《소낙비》《노다지》《산골》《동백꽃》《만무방》《금따는콩밭》《안해》《가을》《두포전》등이 모두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그는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일정한 문학적 성과를 일구어냈다. 당대의 농촌을 모르고서 한국의 사회현실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또 그 현실에서 태어난 문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김유정의 문학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농민의 고단한 삶이 작품 속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관념적 피상적 농촌소설과 달리 실감나는 농촌소설을 썼다. 그것은 체험과 관계가 깊다. 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다. 또 소박하면서도 황소고집이었다. 그것은 산골에서 직접 살며 농촌 분위기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농촌을 그린 것만은 아니다. 제재면으로 볼 때 청년 시절의 생활에서 온 금광에 관한 《노다지》· 《금따는 콩밭》이라든지, 농촌을 다룬 《산골》· 《동백꽃》∙《봄· 봄》의 세계를 위시하여 도시적 소시민의 생활, 심지어 여급(女給)의 생활에까지 그 작품세계를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2) 토착적이며 탁월한 언어감각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무지개와 같이 찬란하게 나타났다가 무지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간’그는 1930년대 문학의 주경향(主傾向)의 하나인 「최적(最適)한 장소에 최선의 말을 배치하는」 조사법(措辭法)에 가장 뛰어난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3) 자주 등장하는 강원도아리랑



  유난히 김유정의 작품에는 만무방과 따라지, 그리고 들병이들이 어우러진 강원도 아리랑이 많이 등장한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아리랑은 삶에 대한 한이며 애착이다. 박녹주에 대한 사랑, 궁핍한 생활, 죽어가는 몸....

  그의 작품 대부분이 당시 농민과 도시 서민의 모습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으나,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아리랑’을 통해 슬픔을 감내하고 삶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만무방, 따라지와 들병이가 불렀던 ‘아리랑’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투영시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 가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 재재 봉봉에     
아들딸 날라구 백일기도두 말게구
타관 객지 나선 손님을 괄세두 마라     
논밭 전토 쓸만한 건 기름방울이 두둥실 
계집에 쓸만한 건 적조간만 간다네     
아주까리 동백아 흐내지 마라
산골 큰 애기 떼난봉 난다 
네가두 날만치나 생각을 한다면
거리거리 노중에 열녀비가 슨다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잘 먹구 잘 입구     
소라반자 미닫이 각장 장판 샛별같은 놋요강     
원앙금침 잣 모베개에 깔구덮구 잠자기는 
삶은 개다리 뒤틀리듯 뒤틀렸으니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들이세



  소설 《만무방》의 응칠이 입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즉 소작마저도 어려워 빚만 늘어나 야반도주를 하고, 수수 일곱 되에 같은 농민끼리 살인도 마다않는 모습과 소설 《안해》에서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려는 따라지와 만무방들의 모습을 애절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아리랑은 삶에 대한 한(恨)이며 애착(愛着)이다. 박녹주에 대한 사랑, 궁핍한 생활, 죽어가는 몸...

  그의 작품 대부분이 당시 농민과 도시 서민의 모습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으나,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아리랑’을 통해 슬픔을 감내하고 삶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 날까지도 고향의 봄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만무방, 따라지와 들병이가 불렀던 아리랑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투영시켰던 김유정의 아리랑이 들리는 듯하다.

 

 

 

4) 고통을 감싸는 웃음, 해학



  김유정의 소설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고통을 감싸는 웃음, 해학에 있다. 그의 해학은 비참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직선적인 반응이 가져올 상처를 미리 예방해 주면서, 피동적인 위치에서 무한히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정신의 자유를 강조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웃음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허무주의적 패배감이나 감상적 울분에 빠지지 않고, 그 고통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현실적 삶의 염원이 함축된 해학정신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여러 인물들이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행위 역시 겉으로는 비록 우둔하고 비속하게 보일지라도 고통스러운 외적 세계와 가혹한 주위환경에 무기력하게 굴복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하층민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학은 작품 속의 만무방과 따라지들 같은 주인공들 보다 독자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 터진다. 독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내려다보며 마음껏 웃는다. 그러나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 왠지 모를 비애와 동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소설《봄·봄》에서, 주인공인 ‘나’는 결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장인(봉필) 집에서 일을 하며 데릴사위로 지낸다. 하지만 당초 계약이 아닌 ‘키가 더 자라면 성례(혼인)를 시켜주겠다.’라는 말로 성사된 계약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켜지지 않고 미루어진다. 장인은 일 잘하는 주인공의 어수룩한 성격을 이용해 4년, 그리고 그 이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것이다.
 

 

“장인님! 인젠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장차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점순이와 결혼하고자 하는 의지로 묵묵히 일하던 우직한 주인공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장인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믿음은 흐려진다. 또한 자신과 친구 격인 뭉태와 점순이의 부추김과 함께, 모난 성격으로 자신을 하인 대하듯 하는 장인의 태도는 그에게 심한 갈등을 안겨주기도 한다.

  김유정의 작품은 우리 전통 마당극이나 탈춤, 판소리 등에서 만나는 어조와 해학적인 웃음처럼 우스운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대상의 결함과 비리를 드러낸다. 그러나 풍자극이 대상과 대립하여 비꼬는 방법을 쓰는 반면에, 김유정의 해학은 맥을 같이 하면서도 대상을 한층 넓고 깊게 통찰하면서 동정적으로 감싸주는 방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김유정의 재능은 감칠맛 나는 속어, 비어와 눙치는 어법으로 당시 농촌의 만무방과 도시 따라지들의 슬픈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판소리처럼 들려주는 데 있다. 그는 한국 문학사상 최초로 토착적(土着的) 유머를 형상화시켜 놓음으로써 현대문학의 유산(遺産) 가운데 값진 자기발견(自己發見)의 한 원형(原型)을 내놓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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