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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안면도 천상의 옛집, 간고(艱苦)의 생애를 살다간 '귀천'의 시인

by 혜강(惠江) 2011. 3. 2.

 

면도  천상병의 옛집

 

간고(艱)한 생애를 살다간 '귀천'의 시인 

 

 

·사진 남상학

 

 

 

 

* 안면도에 복원된 천상병 시인의 옛집 *

 

 

  국내 예술계의 3대 기인(奇人)으로 알려진 천상병(千祥炳: 1930~1993) 시인, 시인의 옛집을 찾아가는 날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안면대교를 건너 마치 차창 밖 풍경이 시화전에 걸린 액자처럼 눈에 들어오는 섬, 안면도 그 종단 길을 따라 휴양림 입구, 상촌 삼거리, 지포 저수지를 차례로 지나 누동 삼거리에 이르면 대야도 어촌체험마을 입구를 알리는 대형 안내판이 서 있고 그 아래에 시인 천상병 고택으로 가는 화살표가 보인다.  

 

  천상병 시인의 옛집은 ‘시인의 섬’으로 잘 알려진 안면읍 대야도에 복원되어 있다. 본래 생가로 불리는 집은 의정부에 있었다. 그러나 이 집 역시 생가는 아니다. 왜냐 하면 천 시인은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에서 태어나서 1945년 귀국해 마산에서 성장하였고, 1993년 4월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별세하기 전 10여 년 정도 수락산 자락 의정부에서 살았기 때문에 의정부 집 역시 생가라기보다는 거처한 집에 불과하다.


  그런 천 시인의 옛집이 어떤 사연으로 안면도에 복원됐을까? 그것은 안면도 토박이로 5대째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모종인(58세) 씨와 천 시인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이다. 모종인 씨는 젊은 시절 천 시인의 시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런 모씨가 우연히 서울 인사동의 찻집 ‘귀천(歸天)’을 찾게 되면서 천 시인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 후 그는 천 시인의 부부를 친부모처럼 가깝게 모시며 살았다. 그런데 천 시인이 별세한 지 11년 후 2004년 천 시인의 부인인 목순옥(睦順玉) 여사로부터 아파트 건설 때문에 천 시인의 집이 헐리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때 모종인 씨가 의정부에 있는 천 시인의 옛집을 사비를 들여 이곳 자신의 땅으로 그 모습 그대로 옮겨 놓았다. 모종인 씨는 선친이 1960년대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 이곳 대야도의 터줏대감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대야도에 펜션을 개업하고 있었다. 천 시인의 시를 유난히 좋아한 그의 예술혼이 이루어 낸 결과였다. 천 시인에 대한 애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복원한 옛집 바로 인근에 문학관 갤러리를 건립해 손수 문화예술 공간으로 조성했다. 이것들은 모두 목순옥 여사 생전에 이룩된 것이다. 펜션의 이름을 ‘시인의 섬’으로 명명한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천 시인을 사랑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가를 실감케 한다.

  천 시인의 옛집은 단순함의 극치를 이루는 일(一)자 집이다. 펜션 ‘시인의 섬’으로 오르는 낮은 언덕 오르막길 왼편, ‘詩人 천상병 古宅’이라 쓴 작은 표지판 옆으로 남향한 고택의 지붕에는 슬레이트를 얹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다. 마당 왼쪽으로는 항아리 몇 개. 가운데 여닫이문 달린 방을 중심으로 서쪽에 여닫이문 하나를 단 건넌방, 동쪽에 미닫이문을 단 안방. 방 3개짜리로 여간 단출하지 않다. 가운데 방에는 궤짝을 이용한 책상 위에 먼지 앉은 <월간문학> <문학사상> 등 문예지 몇 권이 올려져 있고,  벽에는 시 '귀천'이 걸려 있다. 그리고 방바닥에 시 '강물'이 놓여 있다.


  시인이 평소 앉았던 투박한 의자, 그 위 벽에 사진이 걸려 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그의 옛집은 그가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 말한 것처럼 간고(艱苦)의 생애를 살다간 천 시인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눈길을 떼기 어려운 것은 중간 방, 앞 부뚜막에 놓인 양은냄비와 솥단지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는 비바람 가리기 어려운 이곳에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가며 솥단지에 꽁보리쌀을 안치고 냄비에 두부 한 모 썰어 된장찌개를 끓였으리라. 천상 시인인 남편은 아랫목에 들어앉아서 막걸리 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한 그는 평생 가난 속에서 살았다. 1967년 소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심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 값으로 5백 원, 1천 원씩 받아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 자신은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과장된 사건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천 시인은 몸과 마음이 깊이 상해 가난과 방탕, 주벽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고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70년 무연고자로 오해 받아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일도 있었다. 1971년 그의 첫 시집 《새》는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가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유고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 <새> 전문

 

 



  1972년 옥고를 치를 때 옥바라지를 한 친구의 여동생 목순옥과 결혼했고, 그는 그 후 동심에 가까운 순진성과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서정으로 가난·죽음·고독 등을 일상적이고 소박하며 순수한 말로 표현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된 천 시인은 생업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부인 목씨가 1985년 3월 천 시인의 친구인 강태열 시인에게 300만원을 빌려 인사동에 찻집 '귀천'을 열었다. 찻집 이름은  천 시인의 대표작 '귀천'에서 따왔다. 


  부인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천 시인은 평생을 기인으로 살았다. 동료 시인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고, 시를 썼다. 찻집은 그를 좋아하는 문인과 후배들로 늘 북적거렸다.
 그런 생활 속에서 천 시인은 1979년 시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냈고,《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4년),《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년), 시집《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년),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년)도 발표하였다. 그리고 간경변증으로 죽음을 앞둔 말년에는 천주교에 입문하여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돌아보고 인생을 받아들이는 달관과 관조의 태도로 소박하고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 활동을 하였다. 구차하게 살았던 그는 결국 1993년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가난의 흔적이 그대로 밴 천 시인의 고택을 둘러보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시 ‘귀천’을 음미해 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전문

 

 

 


  그런데 이 시를 읽고 놀라는 것은 시인이 간고(艱苦)한 생애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과 고통이 시적으로 고양된 순간에 있어서는 구차함이나 원한의 감정이 배제된, 투명하고 순수한 서정에 닿아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인간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죽음으로 해서 잃게 될 소유물들을 아까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가진 것이 없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소유물에 별로 미련이 없고, 미련이 없으므로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으므로 죽음을 억지로 피해 보려는 몸부림도 없는 것은 아닐까?

 

  렇다면 그가 타고난 무욕의 경지는 생의 간고(艱苦)함 속에서 터득한 생의 긍정이다. 가난과 슬픔으로 점철된 생(生)이 긍정되고 있다는 것은 시적 자아가 무욕(無慾)의 경지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투명함'과 '순수'의 서정은 인간적인 또는 세속적인 욕심의 흐림이 없이 삶의 어둠과 밝음을 볼 수 있음에서 온다. 진정 그에게 있어 '간고함'은 사물에 대한 또는 일상적인 삶의 작고 하찮은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투명한 눈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고통스러웠을 현실의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나아가 죽음 곧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그의 시적 표현은 아마도 그가 말년에 천주교에 입문하여 소박하고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을 보여 준 것에 기인하는 것일 지도 모를 일이다.    

  천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갤러리가 있다. 모종인씨는 천시인의 아내인 목순옥씨로부터 사진․그림 등 천 시인의 유품 70여점을 기증받아 갤러리를 마련했다. 이곳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중광 스님과 김점선 화백, 소설가 이외수 등의 작품 등 시인과 목 여사의 소장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천 시인이 생전에 즐겨 들었던 잔잔한 음악소리가 찾는 이들의 마음속까지 평온하게 만들며, 벽에 전시되어 있는 천 시인의 해학적인 그림과 사진 등은 시인의 모습이 연상되듯 시인의 기인적인 상상력이 묻어나온다. 주말이면 가끔씩 시낭송회를 비롯하여 피아노·바이올린·첼로 독주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갤러리는 토요일 오후 1시부터 7시,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갤러리 안에 전시된 작품들이 소중하기 때문에 갤러리는 평소에 개방하지 않고 있으나 동산 위에 있는 펜션 ‘시인의 집’ (010-3002-7273)에 연락하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모종인 씨 내외는 개관 이후 지금까지 무시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마다않고 ‘생가지 지킴이’ 노릇을 하고 있다.  천상병 시인 기념사업회 이사장이기도 했던 목순옥마저 세상을 뜬 마당에 이 일은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열정을 다하고 있다.    

  갤러리를 둘러보고 문득 뒤를 돌아 남쪽으로 눈길을 주면 소나무 가지 사이로 천수만의 살진 갯벌이 보인다. 언덕 위 펜션 ‘시인의 섬’ 뜰에 서면 그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마당에 설치한 소품들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착각이 들 정도로 아기자기하다. 며칠 전, 어느 노부부는 천 시인의 생가와 갤러리를 보러 왔다가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펜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갔다고 했다. 모종인 씨의 남다른 열정으로 시인의 섬 ‘대야도’ 또한 관광코스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 천상병 시인의 고택임을 알리는 팻말과 장독대  *

 

 * 천상병 옛집 내부에 있는 책과 생전의 시진 액자들 *

 

* 갤러리 외양과 내부의 전시 작품들 *

 

* 갤러리 앞에서 바라본 천수만 모습 *


* '시인의 섬' 뜰 앞에서 바라본 천수만 모습이 아름답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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