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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삼천포 노산공원에 우뚝 선 박재삼문학관

by 혜강(惠江) 2010. 4. 27.

 

 

삼천포 박재삼문학관 

고향 삼천포 노산공원에 우뚝 선 박재삼문학관

 

- 박재삼, 그는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슬픔의 연금술사’였다 -

 

 

글·사진 남상학

 

 

 

 

  어제 남해도를 일주할 때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거친 바람이 불었으나, 오늘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바람도 자고 하늘도 맑고 날씨가 상쾌하다. 이런 상쾌한 날, 삼천포를 방문한 것은 이번 여행의 큰 선물이다. 애당초 남해 일주를 구상하면서 삼천포는 계획에 빠져 있었으나 남해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삼천포항으로 직행하여 어시장을 구경하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에 홀려 해안 언덕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뭇가지엔 연둣빛 어린 나뭇잎들로 초록물이 올랐는데 벚꽃이 어울려 온통 파스텔 빛깔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노산공원(魯山公園)이란 표지판과 함께 박재삼문학관이란 팻말이 보였다.

  사실 나는 시인 박재삼(朴在森, 1933~1997)이 삼천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박재삼문학관이 이곳에 개관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삼천포에 와서 소월과 영랑, 그리고 미당 다음으로 한국 서정시(抒情詩)의 맥을 잇는 박재삼의 문학관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그가 한 많은 이 땅을 하직한 지 어언 13년, 나는 문학관을 들어서면서 그리 녹녹치 않았던 그의 삶과 시에 대한 치열한 정신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1933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한 시인은 4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온다.

  그로부터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삼천포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간신히 초등학교 졸업한 그는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그 후 삼천포여중 사환 노릇을 하는 마음 아픈 시절을 보내다가 교장의 도움으로 야간중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2학년 때 국어교사로 시조시인 김상옥을 만나면서 생애의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김상옥에게 시를 공부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삼천포고를 졸업한 뒤, 그는 1953년 《문예》지에 모윤숙 여사로부터 <강물에서>로 첫 추천을 받고, 이어 1955년 《현대문학》에 <섭리>(유치환), <정적>(서정주)으로 추천 완료, 데뷔한다. 그의 시는 당시 유치환과 서정주가 서로 반해 추천을 다툴 만큼 출중했다. 
   
무거운 짐을 부리듯/ 강물에 마음을 풀다.
오늘, 안타까이/ 바란 것도 아닌데
가만히 아지랑이가 솟아/ 아뜩하여지는가.

물 오른 풀잎처럼/ 새삼 느끼는 보람,
같은 그 세월을/ 아른아른 어찌 잊으랴,
하도 한 햇살이 흘러/ 눈이 절로 감기는데……
  그날을 돌아보는/ 마음은 너그럽다.
반짝이는 강물이사/ 주름살도 아닌 것은,
눈물이 아로새기는/ 내 눈부신 자욱이여!

   - 첫 추천작 <강물에서>전문


  시 작품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가락에서 두드러졌다. 우리말을 의미, 개념에만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니라 운율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구사하는 리듬의 중요성을 태생적으로 알아차린 시인이었다.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과 서민생활의 고단함을 실은 시세계를 구축했으며, 이러한 경향의 발전은 이후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얻게 했다. 그의 ‘한’과 ‘슬픔’은 다분히 그의 힘겨운 생활과 연관된 것이었다.

 

 

 


  학교생활과 직장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1955년엔 《현대문학》 창간과 함께 편집 사원으로 입사, 1963년까지 근무한 뒤 고대 국문과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를 한다. 1963년 《문학춘추》 창간에 참여하여 1년 동안 근무한다. 이어서 1965년 《대한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3년간 근무.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가 된 이후 일정한 직업을 갖지 않았으며, 위장병과 당뇨병 등 병치레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시작으로 생기는 고료(稿料)와 함께 약 25년 간 《서울신문》 《대한일보》 《국제신보》 등에 요석자(樂石子)라는 필명으로 바둑관전평을 써서 생계에 보탰으니 그의 궁핍한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바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히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밤 바다에서> 전문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그의 창작 의욕은 거듭 불타올랐다.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하고, 1961년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함께 <1960년대 사화집詞華集>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 처녀시집 《춘향의 마음》
  1970년 제2시집 《햇빛 속에서》 
  1975년 제3시집 《천년의 바람》(민음사)
  1976년 제4시집 《어린 것들 옆에서》(현현각)
  1977년 제1수필집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경미문화사)
  1978년 제2수필집 《빛과 소리의 풀밭》(고려원)
  1979년 제5시집 《뜨거운 달》(근역서재)
  1980년 제3수필집 《노래는 참말입니다》(열쇠)
  1981년 제6시집 《비 듣는 가을나무》(동화출판공사)
  1982년 제4수필집 《샛길의 유혹》(태창문화사) - 제7회 노산문학상을 수상
  1983년 수필선집 《숨가쁜 나무여 사랑이여》(오상출판사)
  1983년 제7시집 《추억에서》(현대문학사) - 제10회 한국문학 작가상을 수상
  1984년 자선시집 《아득하면 되리라》(정음사)
  1985년 제8시집 《대관령 근처》(정음사)
  1985년 제9시집 《내 사랑은》(영언문화사)
  1986년 수필집 《아름다운 삶의 무늬》(고려원),《차 한 잔의 팡세》(자유문학사)
  1986년 제10시집 《찬란한 미지수》(오상사) - 중앙일보 시조대상을 수상
  1986년 시선집 《간절한 소망》
  1987년 시선집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문학사상사)
  1987년 시선집 《울음이 타는 가을강》 《가을 바다》 
  1987년 제11시집 《사랑이여》(실천문학사) - 제2회 평화문학상 수상
  1988년 시선집 《햇빛에 실린 곡조》- 제7회 조연현 문학상 수상
  1990년 수필집 《미지수에 대한 탐구》(문이당)
  1990년 제12시집 《해와 달의 궤적》(신원문화사)
  1991년 제13시집 《꽃은 푸른빛을 피하고》(민음사)  인촌상(仁村賞) 수상
  1996년 병상에서《다시 그리움으로》(실천문학사)를 상재하는 투혼 발휘

 

 

 


  그의 시를 일관하는 정서는 ‘한’이다. 그는 한(恨)의 서정을 유창한 언어로 노래함으로써 1950년대 이후 한국시의 전통적 서정을 가장 가까이 계승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기에 전통적인 서정시가 노래한 정서 중에 한이나 슬픔을 떠올릴 때 50년대 시인으로 박재삼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는 <피리>에서 “눈 감기듯 내 목숨에 / 닿아나 줬으면/ 풀리겠네 한(恨) 풀리겠네”라고 노래하면서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서러운 한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의 <무제>라는 시도 마찬가지다.
 

 

  대구 근교(近郊)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 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 무제(無題) 전문


   여기서 나아가 <울음이 타는 가을강>에서 그는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는 서러운 정서를 특유의 가락으로 시화(詩化)하였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 <울음이 타는 가을강> 

 

  


 

  <울음이 타는 가을강>은 그의 대표작으로 가을강이라는 자연을 통해 삶의 애환, 특히 시랑의 슬픔을 아름답게 노래한다. 생명과 시간의 소멸을 애수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가을 햇볕이나 해질 무렵의 가을강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이 햇볕이나 강은 자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를 내포하는 그런 자연이다.

  이와 같은 <울음>의 정서는 억눌린 삶의 서러움으로부터 촉발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재삼의 특성은 김소월, 김영랑, 서정주와 박목월의 정서를 이어오면서도, 20년대의 김소월이나 30년대의 김영랑 그리고 서정주나 박목월과도 다른 독특한 ‘한’의 발성법을 갖는다. 그것은 그의 추천작 시조 <강물에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시조의 완결성 속에 담을 수 있는 시적 정서는 무엇이며, 그것의 해체와 새로운 정서의 수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사적으로 볼 때 그의 시는 서정적 정서가 독특한 가락에 실려 서정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넓혀가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재삼은 다른 어떤 시인보다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는 시를 썼고, 말소리와 말뜻을 조화시킨 오며한 운율을 만들어 서민의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리고 광복과 한국전쟁 동안 우리 겨레 대부분이 경험해야 했던 경제적 빈곤을 뼈저리게 겪으면서 일상적인 자기의 체험을 중심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누구나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는 시를 지었다. 또한 그 나름의 인생관으로 삶의 괴로움을 극복하는 시를 꾸준히 써 왔기에 그의 작품 속에는 그만의 독특하고 깊은 시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위에 나열한 15권의 시집과 10권의 수필집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박재삼문학관은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과거 시인이 성장했던 곳과 지근거리인 사천 노산공원(경남 사천시 서금동 101-67)에 자리잡고 있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높이기 위해  박재삼기념사업회와 사천시의 노력으로  그가 시의 꿈을 키웠던 정신적 고향에  2008년 11월21일 개장했다.

  박재삼 문학관의 규모는 연면적 635㎡(약 192평), 지상 3층으로 이뤄져 있다. 노산공원은 바다를 향해 돌출한 언덕(동산)으로 삼천포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도시공원이다. 다른 어떤 문학관보다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평소 시인은 이곳 노산공원에 올라 많은 시상을 떠올리고 호연지기도 길렀을 것이다.

 

 

 

 

  계단을 올라 산책로를 따라가면 언덕 위에 직육면체 형태의 문학관이 나뭇가지 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민다.  문학관 앞마당에는 박재삼 문학관과 우측으로 호연재라는 잘 복원된 건물 한 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관람객들은 잘 지어진 한 채의 한옥을 보고 박 시인의 생가를 복원해 옮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호연재는 조선시대 삼천포 지역의 대표적인 학문의 전당이었던 학당으로 일제 민족교육 말살정책에 의해 소실된 건물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장소에 문학관과 호연재가 나란히 입지토록 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된다.

   3층으로 지은 문학관은 현대식 건물로서 공원의 주변 풍광에 어울려 그 어느 문학관보다 멋진 모습을 보여준다. 문학관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2층까지 뚫려있는 개방적인 홀과 마치 박 시인이 서 있는 것 같은 실물 크기의 브로마이드. 이 브로마이드는 정지용 문학관에서 본 의자에 앉아있는 정지용 시인의 모형과 함께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한 기법과 유사하다. 일종의 포토존이다. 이런 기법은 관람객과 작가의 유대감을 보다 높이려는 방편으로 다른 문학관에서 종종 활용되고 있다.

   전시실에는 「바다가 낳은 시인, 박재삼」코너에서 시인의 연보, 시를 쓰게 된 동기와 소박하고 정 많은 시인의 성품과 다양한 인간관계 등의 생활상을 통해 인간 박재삼을 만날 수 있다.

  또 「박재삼은 왜 시로 말하는가?」라는 표제 아래, 대표작인 서정시인으로 손꼽히는 그의 시 세계와 문단의 평가 등에 관한 정보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의 마음을 만났는가?」 코너에선 시 낭송하기, 시 이어달리기 등의 다양한 시 체험을 통해 시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

 

 

 

 

  2층은 다목적실과 문예창작실이 위치하고 있다. 다목적실에서는 ‘박재삼, 그의 일생’에 관한 영상 홍보물을 통해 박재삼의 삶의 궤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문학제를 비롯한 큰 행사와 각종 세미나, 기획전시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무대 반대편을 벽이 아니라 창으로 처리해 외부공간과 단절되지 않게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다목적실과 인접하여 문예창작실이 마련돼 있는데 시인께서 생전에 소장하고 있던 도서를 비치해 창작활동을 돕고자 마련한 공간이다.

 

 

 

 

  3층 홀에 들어서니 사방으로 확 트인 바다와 자연으로 인해 가슴까지 후련해진다. 문학관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마련한 것은 국가와 지역의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들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앞으로 많은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이 문학관을 통해 창작의 영감을 얻고 백년대계를 그려보는 기회를 갖기에 좋다. 한편 이곳은 관람객을 위한 휴게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삼천포 시가지와 아름다운 바다를 조망하기에 좋다.

 

 

  

 

  문학관에서 나와 노산공원을 걸어보았다. 언덕 위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시민의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다. 산책로를 따라 벚꽃이 만발했다. 공원에 올라서면 삼천포 앞바다, 와룡산, 사천 시가지, 그리고 한려수도의 크고 작은 섬들을 볼 수 있다. 특히 한려수도의 일부인 삼천포 앞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풍광은 참으로 멋지다.

  여기서 바라보는 한려수도는 매우 아름다워서 쪽빛 바다 위에 수놓은 크고 작은 섬들, 오밀조밀한 해안선, 신비한 형상들의 바위, 그 바위 위에 부서지는 은빛 파도와 등대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 돌릴 수 없는데 그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바람과 햇빛에끊임없이 출렁이는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사랑하는 이여,그대 스란치마의 물살이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가는 근심그도 그런 것인가.
 사랑은 만 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물거품이 한없이 일고
 그리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라도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빛나는 사랑을 빼면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박재삼 시인의 <나무>라는 시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마른 가지에서 힘겹게 봉우리를 올리고 잎을 피워내는 나무들은 만 번의 사랑을 해도 갈증이 일고 한 없이 스러지는 허망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픔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할 일이 없다고 노래하는 시인. 그는 가난과 고향에 얽힌 설움을 단아한 시어와 전통적 가락으로 표현한 시인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세월이었지만 아름다운 삼천포의 자연이 있었기에 그는 아름다운 서정의 깊이와 폭을 넓혀가며 작품을 쓸 수 있었으리라. 잎사귀를 무성히 달고 꽃을 피워내고 있는 봄날에 박재삼이 친구하자고 불쑥 숲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또 공원 안에는 박재삼 시비가 있다. ‘우리 고장이 낳은 시인 박재삼의 시비를 그가 늘 올라 바라보기를 즐기던 이 한려수도의 한 복판 노산공원에다 세워 세월과 함께 오래 기린다’ 1988년 삼천포 청년회의소에서 세운 비석에는 그를 기리는 삼천포 사람들의 정성이 담겨있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그의 시 <천년의 바람>이다.  바람부는 노산공원 시비앞에 서서 박시인이 고향사람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바람소리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얼마나 큰 계시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충혼탑과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동상도 늠름한 모습으로 삼천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언덕의 끝부분에 앉은 팔각정에 이르는 길은 노송이 늘어져 있고 팔각정 아래는 신비한 형상의 바위들이 산책 나온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멀리 초양도에 걸린 삼천포대교가 내 눈에 선명히 다가온다.

 

 

*노산공원 끝 팔각정과 팔각정에서 둘러본 주변 풍경

   박재삼 시인은 삼천포 사람이다. 박 시인은 현 사천시 서금동 팔포 바닷가에서 자랐다.  박시인은 그의 마지막 시집 ‘다시 그림움 속으로’에서도 고향을 노래했다. 

 

  고향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헤어지고 보니 한없이 그리운 것이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들이네 그들 중 벌써

  반 가까이는 이승을 뜨고 보면

  다 왔다 가는 것 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그저 허무 하나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네

         -  <군소리 속에서>에서 

 

    박재삼 시인에 대한 삼천포 시민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의 생가 바로 앞 바다는 최근 매립돼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줄지어 들어서 있지만 팔포 매립지 해안도로를 ‘박재삼 시인의 거리’로 조성할 예정이다.  박재삼, 그는 이제 가고 없지만 삼천포 시민들의 가슴에, 아니 그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다. 

 

<정보>

1. 관람시간 : 오전 9시~ 오후 6시(입장은 폐관시간 30분 전까지)
2.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과 설과 추석 당일
3. 관람료 무료
4. 가는 길 : 아래 약도 참조 / 기타 문의 : (055) 832-495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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