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옛 시인 윤선도(尹善道)의 유토피아
- 윤선도의 시심 일깨운 수려한 풍광 -
글·사진 남상학
세상에 곧은 마음을 전하고자 했으나 돌아온 것은 외로운 유배생활 뿐이었던 윤선도(1589~1671). 그에게 보길도는 고독함까지도 감싸 안아주는 그만의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한 때는 정치인으로서 난정을 바로잡고자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유배되고, 왕명으로 복직되었어도 중상모략으로 또 다시 유배생활을 했던 그. 결국 속세를 벗어나 은둔생활을 하려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피해 잠시 머물게 된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그 곳에 눌러앉게 된다.
특히 은둔 중에 지은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주옥편의 작품을 남겨 국문학에 큰 획을 그은 윤선도는 세연정, 동천석실, 낙서재 등 그가 사랑한 그만의 유토피아, 보길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 옛시인 고산 윤선도를 만나러 보길도를 찾았다.
두 아들의 죽음과 오랜 유배생활
보길도라는 아름다운 섬에서 시나 읊고, 무희들과 노닐며 신선 놀음을 한 사람 아닌가? 고산(孤山) 윤선도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간혹 이렇게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험한 세월을 보낸 것으로 치면 윤선도의 인생도 그리 녹록치는 않았다. 정쟁 속에서 유배생활을 밥 먹듯 했다. 물론 그의 인생이 잘 뻗어나갈 때도 있었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종3품을 지낸 윤유심의 차남으로 태어나 광해군 4년 진사시에 급제, 정계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또한 왕자의 스승으로서 경학, 천문, 지리, 문학 등 여러 분야를 통달한 그였었다. 그러나 이내 집권당의 난정을 주도한 정치인들을 고발,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려 유배를 가게 된 것. 그것을 시작으로 20여 년에 가깝게 세 차례나 유배지를 떠돌아야만 했다.
삭탈관직도 그에겐 낯선 일이 아니었다. 가장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어린 나이에 급제한 영특한 둘째 아들의 죽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귀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막내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된다. 두 명의 아들을 잃은 슬픔은 그에겐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난정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며 곧은 성품을 정계에 쏟아 부었지만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오랜 유배 생활과 두 아들을 잃은 절망감이었다. 어쩌면 윤선도는 오래 전부터 그의 이상을 채워 줄 그만의 유토피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론도 소론도 없는 외딴 섬에서 변심하지 않을 자연을 벗 삼아 그간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는지도. 그는 남인에 속하는 정치가로 끊임없이 서인의 공백을 받으며 시달렸다.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 하겠는가…중략…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이 시는 그의 초지 작품 <오우가(五友歌)>의 한 대목이다. 한 때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한 그는 보길도에 정착하기 이전에도 전국의 아름다운 명산과 사연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 〈산중신곡〉, 〈속 산중신곡〉 등이다. 자연만이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일찌기 깨달았던 것이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 차례 유배생활을 했던 그는 만년의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그는 부모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보길도에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즉, 격자봉 밑에 낙서재를 지어 시문과 주자학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 낭음계, 오운대, 독등대, 상춘대, 엄선대 등 주변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을 경영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 칸의 집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하여 독서와 강론을 하며 별장으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계간을 판석보로 막아 계담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단을 쌓고 세연정을 지었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세연정은 정자의 중앙에 세연지, 동편에 호광루, 남쪽에 낙기란, 서편에는 동화각과 칠암헌(七岩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판석보(板石洑)는 한국식 정원의 독특한 유적으로 평평한 돌을 이용하여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이곳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보길도 천혜의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정원 조성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명승지로서, 2008년 1월 8일 문화재보호법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준>에 따라 명승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나는 그 유적을 따라가 본다.
은둔의 최고지, 동천석실(洞天石室)
먼저 동천석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동천석실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도로에서부터 동천석실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어른 걸음으로 20여분 정도. 하지만 동천석실에 다다르자, 커다란 바위가 지키고 있다. 그 바위 위에 올려진 동천석실. 부용동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답다. 그야말로 은둔지로서는 최고지가 아닐까 싶다.
바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매듭지어진 밧줄이 드리워져 있다. 매듭을 잡고 천천히 바위를 하나하나 밟고 올라서자 드디어 동천석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그마한 정자다. 동천석실(洞天石室)의 '동천'은 하늘로 통하는 곳, 산천경개가 빼어난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단어로서, 고산은 동천석실이 보길도 최고의 절경이라 격찬하기도 했다.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고 수수했지만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동천석실에서 내려다 본 부용동의 모습은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듯 넓게 펼쳐져 있다.
고산은 이곳에서 석간수를 모아 연못을 조성하고 집을 지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동천석실 앞에는 또한 고산이 차를 끓여 먹었던 차 바위, 바위 사이에서 솟아나는 석간수를 받는 작은 석지와 연지, 암벽 사이에서 자생하는 석란,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돌계단 등 자연 그대로의 모양에 따라 여러 바위에 상징적인 이름이 붙은 유적들을 볼 수 있다.
왜 윤선도가 동천석실을 최고의 절경이라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동천석실은 오르는 길 못지 않게 내려가는 길도 좋다. 오를 때보다 더 천천히 내려가다 보면 풀벌레 소리, 바람이 나뭇잎들을 흔들어 대는 소리, 햇살이 나뭇잎 사이사이를 통과해 들어오는 모습 등 자연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누가 먼저 돌을 쌓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원을 비는 돌탑도 눈에 띈다.
세연정(洗然亭)에 숨겨진 비밀
윤선도와 보길도를 이야기하자면, 세연정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세연정은 자연 속에 만들어진 비밀정원 같은 곳이다. 세연(洗然)이란 주변의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과연 세연정에 들어서니 동대와 서대를 지나 연못 사이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는 세연정의 모습이 마음을 잔잔하게 이끈다.
윤선도는 세연정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자리한 연못, 세연지에 배를 띄워 놓고 시를 읊기도 하고, 무희들의 노니는 모습을 감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윤선도의 대표작인 <어부사시사>는 작자가 65세 되던 해인 1651년(효종 2) 가을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봄 노래(春詞)·여름 노래(夏詞)·가을 노래(秋詞)·겨울 노래(冬詞)로 나뉘어 각각 10수씩 모두 40수로 되었다. 고산의 작품 가운데서도 <오우가(五友歌)>와 아울러 으뜸이라 할 이 작품은 《고산유고》에 실려 전한다.
〈봄노래(春詞)〉 제1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비췬다,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 온다, 강촌(江村) 온갓 고지 먼 빗치 더욱 됴타". (현대어 풀이: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썰물은 거의 끝나고 밀물이 밀려온다. 강촌 온갖 꽃이 멀리서 보는 꽃빛이 더욱 좋다.)
세연정에는 윤선도가 사랑한 칠암(七岩)이 있다. 돌 하나하나에도 이름을 붙여주는 그의 감수성이 엿보인다. 그 중 혹약암은 세연지 계담에 있는 칠암 중의 하나로 이 바위는 '뛸 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힘차게 뛰어갈 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라하여 이름 붙여졌다.
세연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연 속에 어우러진 정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 세연정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불을 땠다고 한다. 세연정의 가장자리 부분은 일반 정자와 다름없이 나무이지만 가운데 부분은 불을 때도 타지 않게끔 되어 있다.
이밖에도 판석보는 흐르는 시냇물에 제방을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를 이용하여 세연지에 물을 가두기 위한 시설로 일명 굴뚝다리라고도 부른다. 무희들이 노닐었다는 동대와 서대는 세연정 가까이에 있는데 특히 서대는 나선형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무희들이 춤을 추다 보면 어느새 나선형의 길을 따라 꼭대기에 닿았다고 한다.
생을 마감한 낙서재(樂書齎)와 곡수당
낙서재는 고산이 1637년에 보길도에 처음 들어와 1671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그 터는 풍수지리에 밝았던 고산이 보길도에서 가장 높은 격자봉에 올라가서 주산의 형국을 파악하고 혈맥을 찾아 직접 잡았다고 한다.
낙서재는 독서를 즐기며 학문하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 실제로 고산은 이곳에 많은 책을 쌓아두고 독서하며 자제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저택 뒤 자리한 바위를 '소은병'이라 불렀는데, 소은병이란 원래 주자가 있었던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의 대은봉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으로, 주자처럼 산 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또 저택 앞에는 귀암이라 해서 거북을 닮은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산이 저녁에 그곳에 앉아 보름달을 즐겼다고 한다. 비록 지금의 가옥은 복원된 것으로 예전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그 주변의 풍광만으로도 그가 어떤 삶을 추구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낙서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동천석실이 자리한 산이 펼쳐지고 마을의 논밭도 아기자기하게 보인다. 낙서재에서 책 읽기를 좋아했다는 윤선도는 1671년 이 곳에서 숨을 거뒀다.
부용동의 낙서재 주차장에서 남쪽 약 300m 지점에 자리 잡은 곡수당은 고산 윤선도가 82세 때에 아들 학관을 시켜서 만든 한 칸 규모의 초가 정자이다. 그 옆에 서재가 있다.
윤선도는 거처하는 곳마다 연못을 만들었다. 곡수당 앞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 물길과 다리를 만들고 두 개의 연못도 만들었다. 바로 앞엣것은 상연지, 좀 떨어져 있는 것이 하연지는 30평 정도 넓이로 규모가 좀 큰 편이다.
윤선도 생전에는 보길도에 들어온 아들 윤학관이 살았다. 윤학관은 윤선도의 첩이었던 경주 설씨가 낳은 자식으로 윤선도의 서자였다. 그는 말년의 윤선도를 보살폈고,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숨을 거둘 때 윤선도의 곁을 지킨 자식이기도 하다. 윤선도의 거처인 낙서재가 소박한 느낌인 데 비해 아들 윤학관의 곡수당은 꾸밈이 많은 점이 인상적이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예송리해변
예송리는 보길도 동남쪽의 바닷가 마을이다. 연중 30만명이 찾는 예송리는 4계절 휴양지로 청환석이 폭 50m 길이 2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1.4km의 길이로 활처럼 휘어진 갯돌해변과 상록수림이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이처럼 나무와 숲이 좋은 예송리의 해변에는 갯돌이라 불리는 검푸른 빛깔의 조약돌이 깔려있다.
그래서 파도가 드나들때마다 ‘자그르르, 쏴아 자그르르’하는 해조음을 들을 수 있다. 멀리 작은 고깃배가 수평선 위를 장식하고 햇살이 바다 표면에 반사돼 눈이 부시다. 이 갯돌해변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완도팔경 중 하나에 꼽힐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다.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예송리 상록수림은 원래 동남풍(주로 태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원래 바닷가를 따라 1.5㎞의 길이로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약 740m로 줄었다. 이 숲에서는 후박나무·붉가시나무·생달나무·감탕나무·동백나무 등과 같은 상록활엽수가 가장 흔하지만, 상록침엽수인 곰솔(해송)과 낙엽활엽수인 팽나무·작살나무·누리장나무 등도 있다.
마을 뒤편에 있는 당숲의 면적은 크지 않지만 수백년 동안 주민들이 서낭신을 모시는 신성한 숲으로 보호해 온 덕택에 원시적인 자연상태는 바닷가의 상록수림보다 훨씬 더 낫고 보기도 좋다. 딱히 윤선도 유적지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보길도에 머물렀던 윤선도가 예송리 해변에 와서 사색에 잠기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윤선도, 왜 하필이면 보길도에 눌러앉았을까. 원래 은둔의 목적지로 삼아두었던 제주도로 향해도 됐을텐데. 그는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잠시 들른 이 곳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보길도는 화려한 절경을 지닌 섬은 아니지만 수수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여인네처럼 마음이 끌리는 섬이다. 보길도에 머물다보면, 윤선도가 왜 보길도와 사랑에 빠졌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예송리해변을 거닐다가 남쪽 해안을 따라 보길도의 동쪽 끝 석벽에 쓰여있는 글을 보러간다. 그 길에는 두 개의 해수욕장을 마나게 된다. 차례대로 통리해수욕장, 중리해수욕장이 그것이다.
통리해수욕장과 중리해수욕장
통리해수욕장은 규모는 작지만 솔숲과 어우러진 은빛 백사장이 아름다워 조용하게 바다 풍광을 즐길 수 있다. 날씨가 맑을 때는 제주도 한라산이 어슴프레하게 보인다. 왼쪽 바다에 떠 있는 목섬은 하루에 두 번씩 물길이 열리는데, 그곳으로 건너가 낚시를 즐길 수도 있고, 싱싱한 해초와 석화를 채취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청별항에서 버스가 운행되며 민박집도 있어 이용하가 편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바로 중리해수욕장이다. 경사가 완만해 간조 때에는 질 좋은 모래사장이 100m까지 펼쳐지고 200~300m를 들어가도 사람 키를 넘지 않을 만큼 수심이 낮아 수영에 미숙한 사람들이나 어린아이들이 해수욕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해수욕장 뒤에 뜨거은 태양을 피할 수 있는 소나무숲이 있어 야영을 하기에 적당하다. 물론 이것에도 민박집들이 있다. 고산 윤선도의 유적이 아니더라도 보길도를 찾는 이유는 충분하다.
유배 가던 송시열이 심정을 토로한 글씐바위
보길도에는 정치적으로 정적(政敵)이었던 서인 송시열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이 흥미롭다. 정세가 바뀌어 송시열이 제주도로 귀양길에 오른 적이 있었다. 송시열은 1688년 장희빈이 낳은 숙종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숙종이 크게 노해 그는 모든 관작을 박탈당했다. 이때 남인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그를 죽여야 한다고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에 숙종은 그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는 풍랑으로 며칠간 보길도에 머물면서 윤선도가 꾸며놓은 세연정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보길도 동남쪽 맨끝의 백도리 석벽에 오언절구의 시를 새겨놓았다. 이 바위를 후세 사람들이 '송시열의 글씐바위'라 불렀다. 지금은 글씨가 많이 마모되었지만 윤곽은 알아볼 수 있다.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초구구은재)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83세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하늘 해를 바라보며. 다만 남녘바다의 훈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털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고령에 제주도로 귀양가는 비참한 심경을 토로하면서 그래도 그 옛날 털옷을 내리며 함께 북벌을 논했던 임금께 고마워하는 내용이다. 그에게 털옷을 내리고 북벌을 논한 임금은 숙종이 아닌 선대 효종이었다. 송시열은 이곳에 며칠 머문 후 제주로 귀양갔지만 다시 불러 심문해야 한다는 남인들의 집요한 상소로 다시 상경하게 된다. 결국 그는 다시 육지로 나와 도보로 상경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땅끝전망대와 보옥리 공룡알 해변
마지막으로 보길도의 풍광을 담기 위해 보길도 서쪽해안도로를 따라 다려본다. 보길면사무소가 있는 청별리 나루터에서 서쪽해안도로를 타고가면 아름다운 보길도의 해안풍경이 나타난다. 정동리마을을 지나고 계속 해안길을 따라가다 보면 네 개의 조그마한 섬이 올망졸망 떠있는 선창리 마을 앞 해변을 지난다. 네 섬의 이름은 오른쪽에서부터 상도, 미역섬, 욕매도, 갈도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특히 12월에는 선창리 도로변에서 네 섬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물드는 보길도의 황혼을 감상할 수 있다.
선창마을을 지나서 해안도로의 끝까지 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하늘을 찌를듯 솟아있는 보족산(195m)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 사람들은 흔히 뾰쪽산이라고 부른다. 보족산의 뾰족한 모습은 선창리에서 도로가 잠시 오르막으로 이어지다가 크게 왼쪽으로 꺾어지는 모퉁이 일명 망끝전망대라고 하는 해변절벽가에서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선 전망대답게 산과 바다의 전망이 뛰어나다.
여기서 잠시 달리면 보옥리 마을이다. 마을은 보족산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모양이다. 선착장에 고깃배들이 떠있는 모습이 정겹다. 마을을 지나 보족산 아래의 해안은 예송리 해변이나 통리, 중리 해수욕장과는 판연하게 다르다. 완도의 구계등이나 거제도의 몽돌해수욕장처럼 둥근 자갈들이 해변에 지천으로 깔려있다. 청명석이라고 불리는 갯돌이 크고 둥글둥글 하여 공룡알 같이 생겼다. 이름하여 공룡알 해변이라 불리는데 공룡알을 닮은 자갈해변이라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보족산에 올라보는 것이 좋겠다. 다소 가파르지만 보옥리 부둣가 언저리에서 시작되는 등산로를 따라 조금은 벅찬 숨을 내쉬더라도 보족산 꼭대기에 오르면, 가까이는 절벽아래로 보이는 보옥리 마을과 해변풍경, 보길도의 진산 격자봉의 모습과 멀리 다도해의 멋진 바다풍경을 함께 감상할 수가 있다. 산 정상까지는 보옥리 마을에서 약 30분 정도면 오른다고 한다. 시간이 쫓긴 나는 보족산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옮겼다.
<여행정보>
○ 보길도 가는 길
◎여객선 운항정보
보길도를 가는 배편은 완도군과 해남군 두 곳을 이용해서 들어갈 수가 있다.
1.완도 화흥포항->노화도 동천항->동천항셔틀버스->보길도
2.해남 땅끝선착장->노화도 산양항->택시->보길도
3.해남 땅끝선착장->보길도 청별항(1일 3회 정도- 8:30, 11:40, 16:30)
*1번과2번의 경우 노화도까지는 수시로 출발한다.
●섬내 교통 : 보길버스(061-553-7077) / 청별선착장에서 출발한다.
●택시는 보길택시(061-553-8876) 소속의 영업용과 개인택시(061-553-6262, 6353)도 있는데 요금은 구간별 정액제다.
보길도에서는 택시나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나 운행 횟수가 적은 마을버스로 여행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고, 택시 요금도 만만치 않다. 서울에서부터 5번 환승에 최소 6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좀더 편리한 방법은 승용차를 직접 가지고 가거나, 비행기로 광주까지 가서 렌터카를 이용하면 조금 더 편리하다. 광주에서 완도 화흥포항으로 이동해 여객선에 차를 싣고 노화도 동천항으로 가면 약 4시간이 걸린다.
○ 숙박정보
블랙스톤 (예송리해변, 061-554-1009)
보길도물안개펜션(예송리해변, 010-3644-1358)
해돋이펜션(예송리 해변, 061-553-6425 )
펜션 보금자리(보길면사무소 근처, 061-553-6217
공룡알펜션횟집(보옥리, 061-555-5144)
보길은모래펜션(중리해변 근처, 010-9056-7876)
보길도비파원(세연정 근처, 061-555-5162)
보길도의 아침 모텔 (청별항 근처, 061-554-1199
바위섬 모텔 (청별항 근처, 061-555-5612
○ 식당정보
세연정 횟집 : 활어회, 청별한 근처, 061-554-5005
보길도의 아침 횟집 : 낙지회덮밥, 청별항 근처, 061-554-1199
보길도 화로갈비 : 양념 소,돼지갈비, 청별항 근처, 061-555-3336
바위섬 횟집 : 활어회, 면사무소 근처, 061-555-5612
우리식당 : 소머리국밥, 해물된장찌개, 청별항 근처, 061-553-6380
바다양푼이동태탕(통태탕) : 청별항 근처,061-555-5270
※참고 : 이 글 한국관광공사 국내온라인팀 양서연 취재기자의 글을 바탕으로 필자의 탐방 기록을 추가하여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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