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신동엽 생가 탐방
저항시인 신동엽의 삶의 자취를 찾아서
글·사진 남상학
시인 신동엽(申東曄·1930~1969)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하여 신동엽문학관과 생가를 방문했다. 누구보다 분단조국의 현실을 아파하고 엇나간 역사를 준엄하게 꾸짖다가 서른아홉에 타계했으니, 그의 죽음이 많은 문학도들에게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터였다. '껍데기는 가라'와 '진달래산천', '금강'으로 대표되는 그의 절창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시인 신동엽은 충남 부여 출신이다. 1930년 8월 18일, 왕도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역사의 흐름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으며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에 수탈되는 농민들의 피폐한 삶, 그리고 그러한 민중의 눈물을 보았다. 또 6·25전쟁을 겪으면서 같은 핏줄끼리 싸워야 하는 저주스런 역사에 울분을 토했다.
* 등산복 차림을 한 신동엽 시인의 모습 *
글쓰기에 유난히 재간이 있었던 신동엽은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조선일보)가 신춘문예에 입선돼 문단에 나와서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상재했다. 이어 1967년엔 앞으로 백년은 널리 인구에 회자될 대서사시 '금강'을 썼다. 금강은 그가 끼고 살던 곳이다. 강렬한 민중의 저항의식을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통해 형상화 한 <금강(錦江)>은 동학혁명에서 그 시적 주제를 찾고 있으며 동학 이후의 민족의 수난사를 내용으로 삼고 있는 장시이다. ‘4월은 갈아엎는 달’ 등 민족정기를 일깨우는 시를 발표하며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고 1969년 4월 간암으로 영면에 들었다.
신동엽문학관
2013년 5월 개관한 신동엽문학관은 시인의 생가 뒤편, 부여읍 동남리 신동엽길 12에 위치해 2026㎡ 대지에 695㎡규모의 지하1층 지상1층으로 건축가 신효상씨가 설계했다.곳곳에는 시정신에 부합하는 조형물을 짓기 위해 고심한 건축가의 장인정신이 녹아 있다. 지상1층에는 유족이 직접 기증한 시인의 육필원고 737점과 편지, 사진, 책등 2114점을 전시하는 전시실, 각종 교육과 학술회의를 할 수 있는 세미나실, 북카페로 구성 돼 있다.
신동엽문학관은 아담했다. 정밀하면서도 고적하고 모던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졌다. “그리운 백제정신 신동엽 시인”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옆에는 기타를 치고 있는 시인의 젊은 시절의 초상화가 정겹게 펼쳐져 있다. 빛나는 젊음의 한때는 시인이 살아 이곳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또 문학관 앞마당에는 시인의 대표 시 구절들을 깃발처럼 형상화한 임옥상(63)씨의 '시와 깃발'이라는 작품이 설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임씨는 부여 출생의 설치미술가이자 화가다. 시를 모티브로 바람에 나부끼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통유리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바로 정면에 신동엽 흉상이 보인다. 조각가 심정수가 제작한 작품이다. 명민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시인의 손에 펜이 들려 있다. 펜은 칼날보다 더 날카롭고 촉은 창끝보다 더 예리하다.
시인의 생애가 기록된 전시실에는 유품이 질서정연하게 정리돼 있다. 대표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금강’,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 등이 새겨진 설치판부터 각종 친필 원고, 초등학교 성적표, 다양한 서적 등은 시인의 실체를 체감하게 한다. 특히 문학관 곳곳은 시인의 아내 인병선의 인문학적 사유와 의식도 투영돼 있다. 인병선은 농경생활박물관인 짚·생활사박물관을 만든 장본인이다. 먼저 신동엽 시인의 연혁을 더듬어 본다.
1930 8월 18일 부여읍 동남리에서 태어남.
부여초등학교, 전주사범학교, 단국대 사학과 졸업.
1959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
1961 명성여고 국어교사로 취임(작고시까지 재직).
1963 [산에 언덕에], [아니오]등을 담은 시집 '아사녀' 출간.
1966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최일수 연출로 국립극장에서 상연.
1967 펜클럽 작가기금으로 장편서사시 [금강(錦江)] 발표.
1968 오페라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
1969 4월 7일 간암으로 별세.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
1970 4월 18일 부여읍 동남리 백마강 기슭에 시비를 세움.
1975 [申東曄 全集]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1979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1980 [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됨.
1982 유족과 창작과비평사가 공동으로 '신동엽 창작기금'을 제정, 첫 지원
대상자로 소설가 이문구씨가 선정된 이후 98년 현재 16회에 이름.
1985 5월 유족과 문인들에 의해 신동엽 생가 복원.
1988 미발표 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 미발표 시집 [젊은 시인의 사랑]이
실천문학사에서 간행됨.
1989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
1993 11월 20일 부여읍 능산리 왕릉 앞산으로 묘소 이전.
사후 1975에는 <신동엽전집>, 1979년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이 발간된 바 있다. 그에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신동엽은 한국 시문학의 60년대를 대표하는 한 시인이다.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며, 어릴 적부터 민중의 삶을 인식하였고, 그 울분을 시에 써놓은 사람이다. 그의 민중적 저항의식을 담은 시를 읽을 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거나 목소리에 좀더 힘을 주게 되는데, 짧고 굵은 삶을 살아간 신동엽은 그처럼 강렬한 사나이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세상을 바꾸겠다며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을 보면서 역사의 역행을 직접 맛보았다. 시인 신동엽의 성격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의하여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신동엽 시인의 아내 인병선씨는 씨는 생전 시인의 모습에 대해 "항상 힘들게 살았고 몸이 허약해 늘 약을 복용해야 했다"면서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다녔지만 자식들에게는 무척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사회, 민족 문제에 골몰해 있어 그 사람을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가질 수 없었다"며 "너무 꼼꼼하고 단정했다는 점이 남자로서의 단점이었다"고 기억했다.
껍데기는 가라4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전문
1950년대의 우리 시단은 모더니즘의 물결과 전통 지향적 보수주의의 조류로 크게 나뉘어 대립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면서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피해 가고 있을 때 그는 그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동엽은 이런 풍조를 철저히 거부한 채 순수/참여라는 대립적인 큰 흐름 가운데 후자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했다. 한 마디로 그의 시는 민족 모순에 대한 자각과 반외세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면서 시에 있어서도 이른바 현대성을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미족 보수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신동엽의 시는 대개 민족적 동일성을 훼손시키는 모든 반민족적 세력에 대한 거부와 저항이 기조를 이루며, 민중에 대한 자기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껍데기’와 ‘쇠붙이’라는 비본질적인 것을 부정하고 ‘향기로운 흙가슴’과 ‘알맹이’와 같은 민족의 본질을 강조한 그의 시는 민족적 순수성의 회복과 민족적 동질성의 확인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아가 이 땅에 사는 민중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 앞날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안목에 바탕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 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을 알리라
아침저녁
네 머리 우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마음 모아리며.
서럽게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전문
이 작품에 대하여 시인 정끝별은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시 100편』「껍데기는 가라」에서 다음과 같은 시평을 내리고 있다. - 기운생동, 만화방창의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이는 엘리어트였다. 우리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부여의 시인, 금강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은 이렇게 노래했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4월은 갈아엎는 달〉
겨울 땅을 갈아엎어 줘야 싹들이 더 잘 일어서는 이 4월에. 4월 19일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 〈껍데기는 가라〉는 벼락같은, 천둥같은 시다. 이 시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으랴. 덧붙이는 순간 사족이고 군말일 뿐이다. 그만큼 시 자체로 명명(明明)하고 백백(白白)하다. 1967년에 발표된 이 시는 4·19 혁명의 실패, 5·16 군사 쿠데타, 6·3 사태, 베트남 전쟁 파병, 분단의 고착, 외세의 개입 등 1960년대의 구체적 시대상황을 시의 배면에 깔고 있다. 그러니 시인에게 삼천리 한반도의 사월은 껍데기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라고 반복적으로 촉구하고 있지만 사실 이 시의 핵심은 '껍데기'보다는 '중립의 초례청'에 있다. 이 '중립(中立)'에는 남과 북,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백두에서부터 한라까지, 동학년(1894년) 곰나루에서부터 4·19(1960년) 광화문까지, 백제의 후손 아사달과 아사녀의 못다 이룬 사랑에서부터 신라의 석가탑(無影塔)과 영지(影池)까지를 아우르는 이 중립의 스케일은 얼마나 장쾌한지.
이 웅대한 중립의 시 공간을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문장 하나로 관(貫)하고 통(通)해낸다. 이 중립이야말로 진정한 알맹이이자 흙가슴이며, '부끄럼을 빛내며' 두 몸이 맞절하여 새로운 생명이 잉태할 수 있는 화해의 장(場)이라고 말하고 있다. 60년대 참여문학를 대표하는 이 시는 이후 민중·민족 문학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라고 짐짓 물을 때, 시인이 보고자 했던 '하늘'은,
이제 올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움트리라.
움터서,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녹여 버리"-〈봄은〉
봄은 사월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런 하늘은 보지 못하는 한, 시인은 여전히 4월에는 껍데기는 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은 것이고,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 라고.
고구려의 웅혼한 기백과 백제의 못다 이룬 한(恨). 민족의 아득한 역사는 신동엽의 시를 단순한 자기 고백의 서정시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백제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는 <진달래 산천>, <아사녀>, <아사녀의 울리는 축고> 등의 시를 통과하며 마침내 동학농민전쟁을 그려낸 장편 서사시 <금강>에서 민족과 민중의 모습으로 풍요롭게 드러난다.
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
백제의 달밤이 지나갔다
고구려의 치맛자락이 지나갔다
왕은백성들의 가슴에 단꽃
군대는백성의 고용한 문지기
앞마을 뒷마을은
한 식구두레로 노동을 교환하고
쌀과 떡, 무명과 꽃밭
아침 저녁 나누었다…- <금강> 6장에서
그는 한반도를 뒤덮은 무기들과 외세를 격렬하게 거부한다. 순결한 고향의 대지에 흐르는 민족의 아득한 숨결을 노래하며 평등과 평화의 이상 세계를 창조해낸다. 그에게 금강은 동학을 주도한 농민들의 함성이 끊임없이 끝없이 흐르는 역사의 현장이며, 자신의 시 <금강>은 단 석 줄의 시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친 언어의 제단이었다.
복원한 신동엽 시인의 생가
‘시인 신동엽 생가’라고 써 붙인 문으로 들어서니 아무도 살지 않는 생가는 두 채로 나뉘어 있고 기와지붕에 파란 페인트칠을 해 놓았다. 지붕의 물받이도 함석으로 처리했다. 옛 집을 헐고 개축한 모양새가 왠지 부자연스러워 정감이라곤 찾을 길이 없다. 두 동으로 나뉜 집은 오른쪽 사랑채에는 그의 부인인 인병선이 쓴 ‘생가’라는 시가 붙어 있다. 신동엽을 위해 생가를 꾸미고 나서 인병선이 지은 것이리라.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살며 있는 것이다.'
- 인병선, '생가' 전문
인병선 씨는 신동엽 시인이 죽은 뒤에 남편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시'를 모아 실천문학사에서 책 한 권을 펴내고, 산문과 편지를 모아서 또 한 권의 책을 낸다. 그렇게 남편 신동엽 시인 자취와 모습을 세상에 발표해나가던 인씨는 드디어 당신의 이름을 건 두 권의 책을 냈다. 하나는 시 모음집 <들풀이 되어라(풀빛, 1987)>와 <벼랑 끝에 하늘(창작과비평사, 1991)>이다. 그녀는 `시인'이란 이름을 내걸지 않았을 뿐, 남편 신동엽 시인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신동엽 시인만큼 혹은 그와는 또 다른 세계에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이라 말할 수 있다. 인씨의 존재가 작아보이는 까닭은 많은 시를 쓰지 않았고, 자기 이름을 내걸고 시 모음집을 제대로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화공원
신동엽의 출생지인 부여 읍내 동남리에는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동엽의 시비가 있다. 그의 시비는 부여에서 규암방면으로 백제대교를 지나기 직전 왼쪽 선화공원 소나무 숲 속에 있다. 시비에는 그의 대표적인 서정시 ‘산에 언덕에’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능산리 고분군 앞(백제 왕릉 맞은 편 산)에는 신동엽의 묘소가 있다. 부여는 그의 삶의 터전인 동시에 영면의 안식처였다. 먼저 시비를 찾아보았다. 공원이라지만 규모도 작고 정리도 되지 않은 작은 동산일 분이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돌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人情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신동엽의 ‘山에 언덕에’ 전문
이 시는 1960년대에 쓴 시로 4.19의거 때에 스러져간 임들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글로서 그리운 그의 ‘얼굴․노래․ 모습’이 ‘산에 언덕에 피어날 지어이’ 라고 추모하고 있다. 공원이라지만 시비 주변은 관리가 잘 되어있지 못했다. 다만 그의 서거 40주기를 맞이하여 추모제를 알리는 현수막과 시비 주변에 A4용지에 그의 시를 적어 코팅처리한 것을 뺑둘러 걸어놓았다.
* 이글은 2020년 수정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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