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
일본풍 '서도역' 벚꽃 한창, '혼불문학관' 축소 모형도 볼거리
글, 사진 정보상 (여행작가, 와우트래블 운영)
봄볕이 따사로운 오후의 옛 서도역(書道驛). 활짝 피어난 벚나무 고목이 회춘을 하고 있다. 파랗게 물들어 있어야 할 하늘은 봄기운에 나른해진 탓인지 화사한 벚꽃 색과 닮아 있을 뿐이다. 대합실은 폐쇄되었고 시그널 조작기도 모두 내려진 채 플랫폼에는 초조한 기다림도 홀가분한 발걸음도 없다.
침엽수 세 그루만 뒤뜰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주 발 남원 행 완행열차. 그러나 곧 도착할 것 같은 플랫폼에 서면 먼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 같은 설렘이 바람난 봄처녀 가슴 같다.
옛 서도역은 전라선의 구간 중 오수(獒樹)와 남원사이에 위치한 작은 역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에 있다. 예전에는 전주와 남원 사이를 오가는 통학열차가 운행되기도 했지만 2002년 전라선 철도가 다른 곳으로 이설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역 건물은 목조에 기와를 올린 건물로 새 철로를 따라 역이 옮겨가면서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남원시에서 이 역을 매입하겠다고 밝혀 철거는 되지 않았다. 이후 남원시가 1930년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서도역은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배경 가운데 하나이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이 역은 ‘정거장’ 혹은 ‘매안역’(梅岸驛)이라는 이름으로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가 집중적으로 이 역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주인공 허효원이 열아홉에 완행열차를 타고 시집을 오는 장면이다.
효원이 서도역 플랫폼에 첫발을 내 딛는 순간부터 그녀의 시집살이는 시작되는데 완행열차만큼이나 느리고 무거운 시집살이를 암시하고 있다. 효원의 파란 많은 인생역정과 완행열차의 운행과정 사이에는 닮은 데가 있는데 그런 요소들이 서도역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지금 옛 서도역은 봄이 한창이다. 아름드리 벚나무에는 벚꽃이 가득하고, 그 아래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두 동(棟)의 일본풍 역사(驛舍)와 뒷마당 한 구석에 있는 침목 더미와 어울려 향수(鄕愁)어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나무로 지은 역사, 녹슨 철로, 수동 신호기, 한가로운 플렛폼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과거로 데려다 준다.
플랫폼 건너편 언덕에 한 줄로 서서 꽃길을 만들고 있는 8그루의 벚나무는 녹슬 철로와 잘 어울려 보인다. 아름드리가 넘는 이 나무들은 수십 년은 자랐음직한 것으로 보아 서도역 설치당시에 기념식수한 것들로 보인다. 원래 이 벚나무 주변으로 터를 닦아 혼불문학관을 건립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혼불문학관이 있는 혼불마을은 이 역 서쪽에 있는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에 있다. ‘혼불’은 작가 최명희(1947~1998)가 1996년까지 17년간 피를 토하면서 써내려간 원고지 1만 2000장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사매면의 유서 깊은 ‘매안 이씨’ 문중의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로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켜 나가는 양반사회의 기품, 평민과 천민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2004년 개관한 ‘혼불문학관’에서는 디오라마(축소 모형)로 재연된 소설 속 장면이나, 작가의 친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우리 선조들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 민속학적, 인류학적 기록들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아름다운 우리말로 생생하게 복원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축소모형으로 생생하게 재현해 놓고 있다.
너른 잔디밭과 물레방아 등을 갖춘 문학관 옆에는 청호저수지가 있다. 소설에서 청암부인이 가뭄에 대비해 팠다고 묘사한 못이다. 마을 안쪽에는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의 종부 3대가 살던 곳으로 묘사된 종택이 있어 문학관을 들러 나가는 길에 찾아가봄직하다.
20세기 말 한국문학의 큰 획을 그은 대하예술소설 "혼불"은 우리 문학계에 생태문학이라는 또 다른 영역과 현대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였다. 그런가 하면 박제화되어가는 우리 민속 문화를 생생하게 복원, 재현하였다. 게다가 국어사전을 시집처럼 읽었던 최명희님은 "혼불"에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운율을 살려 모국어의 감미로움과 미려함, 풍성함을 돋보이게 하여 찬탄을 자아내었다.
"혼불"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과 애련함, 근엄함과 서러움, 밝음과 어둠이 은행나무, 살구나무를 스친 댓바람 소리가 대실을 건너 노봉마을과 사매면을 싸고돈다. 가장 꽃다움을 보여주는 꽃심을 지닌 땅 노봉 마을의 이곳 저곳에서, 또 울분의 꿈틀거림이 녹아 있는 거멍굴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혼불"의 소살거림을 느낄 수 있다. 꾸불꾸불한 길을 "혼불"과 함께 한 식경 정도 걷노라면 최명희님의 내밀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한 것이다. 즉 소설 "혼불"이 한국의 정서문화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남원은 바로 그 주무대이다.
<참고> 소설 "혼불"의 줄거리
1930년대 남원 매안 이씨 집안의 삼대 종부(宗婦)가 커다란 축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청상의 몸으로, 다 기울어져 가는 이씨 집안을 힘겹게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 그리고 허약하고 무책임하기가 이를 데 없는 종손 강모를 낳은 율촌댁, 그리고 그 종손과 결혼한 효원이 그네였다. 이들이 전통사회의 양반가로서 부덕을 지켜내는 보루로 서 있다면 그 반대편엔 치열하게 생을 부지하는 하층민의 '거멍굴 사람들'이 있다. 특히 양반계층을 향해 서슴없이 대거리하는 옹골네와 춘복이, 당골네인 백단이가 강력한 자기장으로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다.
이런 갈등의 그물은 우선 효원과 혼례를 치른 강모와 사촌 여동생인 강실이 사이의 근친상간에서 시작된다 . 애틋하게 바라만 보아오던 두 사람이 마침내 건너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어 섬으로서 제각기 가파른 벼랑으로 내몰린다. 우유부단한 강모는 그를 따라나선 술집 기생 오유끼와 함께 머나먼 만주 봉천땅으로 도피를 해버리고, 강실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홀로 삭이며 닥쳐오는 암운 앞에 무방비로 놓인다.
한편 상피에 대한 소문이 거멍굴로 전해지자 자기 자식만은 자신과 같은 운명에 놓여선 안 된다고 생각한 춘복이가 양반댁 강실아씨를 탐내기 시작하고, 춘복이와 몰래 동거를 하고 있던 과수댁 옹구네도 양반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춘복이를 잃고 싶지 않은 집착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 음모란 상피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서 강실이를 내치게끔 하고 그때를 노려 춘복이가 강실이를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차츰 은밀히 옹구네가 퍼뜨린 소문은 그물처럼 강실이와 효원을 죄어들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춘복이는 강실이를 겁간해 임신을 시키게 된다 . 이후 이런 모든 정황을 알게 된 효원은 애증이 교차된 마음으로 강실이를 피접시키려고 하나 그만 옹구네가 중간에서 강실이를 납치함으로서 상황은 예기치 않은 국면으로 치닫는다.
여기에 이씨 문중의 노비인 침모 우례에게 상전의 피가 흐르는 아들 봉출이가 번득이는 비수처럼 성장해 가고 , 청암부인의 묘에 투장을 했다가 덕석말이를 당한 당골네의 원한도 무서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계급적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강모의 사촌형들, 강호와 강태도 강력한 전운을 드리우며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이런 갈등의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짜여서 이제 생생하게 날뛰는 인간군상들을 막 건져 올릴 찰나에 허망하게도 소설은 끝이 아닌 끝이 나버렸다.
이야기 사이사이 마다 , 아니 이야기보다도 더 정성스럽게 저자는 당시 시대의 풍속사를 깨알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 장면인 혼례의식을 비롯해서 연(鳶) 이야기며 청암부인의 장례절차 그리고 유자광이나 조광조, '새로 쓰는 백제사'의 이야기도 돋보인다. 여기에 조왕신의 습속이나 복식에 대한 묘사, 윷점이야기 같은 내방의 섬세한 면면들도 감탄 속에 눈길을 끌고, 봉천땅의 구체적인 지리묘사라든지 사천왕의 긴 이야기도 사물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는 대목이다 .
도대체 이런 기술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자료와 공부를 필요로 했을까 ? 독자들은 읽는 내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성이야말로 바로 '혼불'을 만들어낸 근원이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혼불문학관에서 전재한 글)
<먹을거리>
* 남원의 별미 두부요리 : 춘향테마파크가 있는 남원관광단지 안에 위치한 민속두부마을( 06...)에 가면 두부의 참맛을 만날 수 있다. 썰지 않고 크게 한 모를 담아낸 생두부는 봄바람에 흔들리는 목련꽃처럼 흔들리는 모양이 인상적이다. 직접 만든 두부는 신선하고 부드러운 맛은 여운이 남는다. 반으로 자른 대통에 담겨 나오는 순두부와 신김치 만으로 맛을 낸 콩비지 맛도 일품이다.
<출처> 2009/04/07 -주간한국
'문학관련 > - 문학기행(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상문학관 탐방, 구도의 길 떠난 문단의 선비 (0) | 2009.05.26 |
---|---|
부여 신동엽 생가 탐방, 저항시인 신동엽의 삶의 자취를 찾아서 (0) | 2009.05.07 |
충북 옥천, ‘모던 뽀이’ 지용을 키운 ‘향수’의 고향 (0) | 2009.01.17 |
만해 한용운이 만년을 지낸 심우장 (尋牛莊) (0) | 2008.09.26 |
동리․목월문학관, 천년 고도 경주에 번지는 문학의 향기 (0) | 2008.08.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