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尋牛莊)
총독부를 향하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집
글·사진 남상학
서울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성대입구에서 내려서 성북동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달동네를 오른다. 좁디좁은 골목길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유난히 푸른 집이 심우장(尋牛莊:서울 성북구 성북동222-1,2)이다.
심우장은 3.1운동 때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이 53살(1933년)에 짓고 65살에 입적할 때까지 산 집이다. 그러니가 심우장은 만해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심우장을 짓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죄목으로 3년 동안의 옥고 끝에 출옥한 한용운 선생이 성북동골짜기 셋방에서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때 벽산(金碧山) 스님이 자기가 초당을 지으려고 송림 속에 사둔 52평을 드리겠으니 몇 칸 집을 지어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집 지을 1,000원 정도의 돈이 없어 주저하였는데 부인 유씨(兪氏)의 소지금 약간에다 조선일보사 방응모(方應謨)사장과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아 대지 112.99평, 건평17.8평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용운선생은 총독부를 향하기 싫다며 남향의 집터를 마다하고 그 반대편 비탈 북향한 곳에 일제의 총독부와 등진 곳에 자리를 정하고 집을 앉혔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심우장(尋牛莊)" 이라 하였다. 심우는 ‘소(牛)를 찾는다’는 뜻이다. 심우장이라는 이름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 것으로 그의 수양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면 4간, 측면 2간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 기와지붕을 이룬 민도리 소로수장 집에서 한용운 선생은 광복 1년 전인 1944년에 중풍으로 운명할 때까지 살았다. 현재 한용운 선생이 서재로 쓰던 방에는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집을 지을 당시 소나무 숲에 지어진 이 집은 매우 한적하였다. 한용운 선생은 청빈한 가운데 정원에 많은 화초를 가꾸는 것을 즐겼는데 지금도 당시에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높이 자라고 있어 옛 주인의 꿋꿋한 절의를 말해 주는 듯하다.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심우장의 건너편 대교단지(大敎團地)에는 일본대사관저가 자리 잡음으로써 이 집을 지키던 한용운 선생의 외동딸 한영숙씨가 이집을 떠나 이사하자 한 때 만해사상연구소가 사용하였다. 한편 현재는 성북구에서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매입하여 복원공사를 마쳤다.(서울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 이 집은 온 국민이 3.1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아울러 한국 근대사의 일맥을 주지시키기 위한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곳이다.
북향선사, 그는 과연 누구인가?
총독부를 향하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어 북풍 눈보라를 자처한 심우장에서 양지녘 중생을 보고 미소 짓는 이가 과연 누구였을까. 만해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인했으나 18살에 백담사로 출가했고, 잠시 홍성에 돌아왔다가 24살에 재입산 한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았다.
만해는 젊은 시절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맞이했다. 세계지리책을 읽고서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안 만해는 27살에 세계일주 여행을 단행했다. 첫 여행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곳에선 일제에 쫓겨 고향을 등진 대한의 청년들이 머리 깎은 사람만 보면 ‘왜놈 앞잡이인 일진회원일 것’이라며 뭇매를 때려죽이거나 산 채로 바다에 수장했다. 만해는 이곳에서 두 차례나 살해될 위기에 처했다가 격투 끝에 사지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32살 때는 만주에 갔다가 다시 ‘왜놈의 첩자’로 몰려 독립군에게 총을 맞았다. 이때 맞은 여러 발의 총알이 목 부위에 박혀 있어 만해의 목은 평생 한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몰려 죽을 뻔한 두 시기 중간엔 일본의 은혜를 입었다. 1908년 도쿄에 조동종이 세운 대학에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불교와 서양철학 등을 공부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 같은 개인적인 수난과 은혜에 의해 친일 또는 친미, 반공 등의 노선을 오갔다. 그러나 만해는 달랐다. 총을 쏜 독립군 청년이 훗날 만해를 찾아와 사죄하자 그는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씩씩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나는 이제 맘을 놓게 됐다”며 오히려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는 늘 스스로 지옥의 문지기가 되기를 마다지 않았다. 건봉사에서 대중공양 도중 한-일 병합 조약 소식을 들은 만해는 승려들이 공양을 계속하자 “이 중놈들아, 밥이 넘어가느냐”며 밥상을 걷어차 버렸다.
한용운 선생은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중국에 망명하여 방랑하다가 1913년에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불교대전>, <조선 불교유신론>을 펴냈으며, 1916년 월간 <유심>을 발간하는 등 3.1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최린 등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다.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에 대해서도 ‘친일파’라며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출옥한 직후 찾아온 한 기자에게 만해는 “지옥에서 쾌락을 즐겼노라”고 말했다. 불교에선 스스로 지옥에 들어간 이가 있다. 모든 중생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지막으로 지옥문을 나서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이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26년에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님의 침묵>을 비롯해서 모두 9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 《님의 침묵》의 시들은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로서, 그 속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대개 진실이 부재하는 세상에서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들 슬픔과 고뇌가 희망과 의지로 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는 그의 시대를 임의 침묵의 시대로 밝혀 놓고 조국·중생·진리 등으로 표상되는 <임>을 통해 민족의 현실과 염원을 노래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이며 명상적인 점에서 인도의 타고르와 비견되며, 종교적·민족적 전통에 뿌리박은 시로서 고도의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
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
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문
그 뒤 만해는 신간회에 가담하여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월간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37년에는 항일 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조종자로 체포되었다. 만해는 나라와 자유를 잃고 핍박 속에 신음하는 이 땅의 중생들의 아픔에 평생 열병을 앓았다.
서울 평창동 정토사 조실 설산(87) 스님은 만해의 제자 의산 스님의 제자다. 손상좌로서 심우장과 건봉사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곤 했던 그는 혜화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일제에 징병되자 작별인사를 드리러 심우장에 갔다. 개인적인 친밀감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만해는 떠나는 손상좌를 보자 두던 바둑판을 집어던지며 “이놈아 죽지 마라”고 세 번을 울부짖었다. 스승의 말이 가슴에 박힌 청년 설산은 서울역에서 달리는 기차 바퀴에 발을 넣어버렸다. 설산 스님이 이렇게 발가락을 잘라 징병을 피하고 다시 만해에게 가서 인사드리자 만해는 “조선 사람이 살아왔다”며 기뻐 외쳤다. 설산 스님은 “할아버지(만해)는 일제에 호적조차 올리지 않아 배급조차 받을 수 없었기에 결국은 영양실조로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처지에서도 만해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20만평의 국유림을 불하해주겠다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총독부와 연계된 한 청년이 돈 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만공 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모두가 희망을 잃은 때에도 “보라 겨울이 가면 봄이 오지 않느냐”며 청년들에게 ‘희망의 햇살’을 비춰주던 만해는 ‘‘해방의 봄’을 한 해 앞둔 1944년 열반에 들어 비쩍 마른 몸마저 꽁꽁 얼어붙은 시대의 불쏘시개로 바쳤다. 한 마디로 만해는 북향한 집, 그 음지에서 조국 해방의 희망을 북돋운 셈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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