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구상문학관 탐방, 구도의 길 떠난 문단의 선비

by 혜강(惠江) 2009. 5. 26.

 

왜관 구상문학관 

 

구도의 길 떠난 문단의 선비 

 

(경북 곡군 왜관읍 왜관리 785-84, 054-973-0039 )

 

 

글·사진 남상학

 

 

  

  구상문학관을 보기 위하여 구미에서 왜관으로 차를 몰았다. 구미에서 왜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왜관(倭館)은 조선시대 일본인이 건너와서 통상하던 곳이었다. 본래 왜관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왕래하며 통상을 하고 일본 사신의 유숙을 위해 설치한 공관의 일종이었다. 당시 왜관이 설치된 곳은 부산을 비롯하여 서울과 낙동강변 등 10개였는데, 칠곡의 왜관은 유독 그 지명이 현재까지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

  세월과 함께 남아 있어야 할 왜색의 잔재가 사라진 소도시 왜관읍에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구상문학관이 세워졌다. 그의 문학관이 이곳 왜관에 세워진 이유는 구상 시인의 본적이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9이며, 구상 시인이 6.25전쟁 후인 1953년부터 1974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20여년간 베네딕토 수도원이 있는 왜관에 정착하여 살았던 인연 때문이다. 또한 구상 선생은 아주 오랜 전부터 왜관의 관수재(觀水齋)를 예술가 정양소로 지을 꿈을 꾸었는데, 2004년 그가 작고하기 전인 2002년 10월 4일 관수재 바로 옆에 ‘구상문학관’을 개관함으로써 그의 꿈을 이른 셈이다. 

 

  °  규모 : 부지1,611㎡(487.33평), 건물 699.87㎡(211.71평), 문학관 1동(2층), 관수재 1
 ◦ 문학관 1층(전시실, 영상실, 사무실), 2층(도서관, 열람실, 사랑방)
 ◦ 관수재 1동(전시장) : 도서류 26,456권(구상선생 소장도서, 김인근, 최정석 기증도서 포   함) /  그림, 액자, 병풍, 기념패 등 소장품       300여점 

 

 

 

   구상문학관을 들어서기 전, 뜰 한 쪽에는 그의 작품인 「그리스도폴의강 24 」를 새긴 시비가 서있다.  이 시비는 한국과 일본에서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폴의강 모임 」이 2008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

   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
   내일 맞이할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사람을 만나면서
   옛 강과 옛사람을 만나는

   착각을 한다.

                      

                                    


  연작 장시 '그리스도 폴의 강'은 시인이 1970~1980년대에 걸쳐 발표한 65편의 시리즈로 어렵게 쓰고 쉽게 읽혀지는 시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의 생성 근원과 사멸의 신비를 명상하고 깨달으며, 인간의 실체가 무엇인가, 또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가 등 철학적 사고나 종교적 신앙이 바탕이 되어, 형이상학적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존재 탐구의 시라는 점에서 구상의 시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관념을 표상하는 언어가 함축과비유와 상징으로 아름답게 합일되어 쉽게 읽혀지는 시다.

  그리스도 폴은 예수 그리스도 발현에 접한 전설적인 카톨릭 성인이다. 그의 전반 생애와 그 삶은 세속을 끊어버리고 자신의 소임과 수덕으로 하여 마침내 구원을 받은 초대교회 시대의 인물일 것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볼 목적으로 남을 위한 구제의 수범을 보여 성인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곧 그리스도 폴이다. 구상은 이 성인을 자신의 신앙과 시와 삶의 전범으로, 카톨릭이 바라고 가르치는 바 회심과 그 수덕을 본받아 구원의 빛을 받고자 하는 데서 이 장시의 발상이 틀 잡힌 것이었다.


  “구상 시인은 강과 물을 유난히 사랑했던 시인이다. 낙동강은 구상시의 원천이었다. 현대식으로 지은 문학관과는 다르게 이곳의 관수재(觀水齋)는 고풍스런 모습이다. 관수재의 단골손님은 친구였던 이중섭이었다고 한다. 지인들과 함게 삶과 예술을 토론하며 노래했던 당시의 체취를 읽을 수 있다. 관수재는 시인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마음을 씻고 가다듬는 '관수세심(觀水洗心)'의 삶을 살았던 곳이다. 수(水)와 심(心)은 통하는 글자이기에 관수(觀水)와 세심(洗心)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인 바, "마치 매일예배를 보듯/ 나는 오늘도 강에 나와 있"('겨울강 산조(散調)')곤 했던 것이리라.”


 

 

문학관 둘러보기

 

  문학관을 들어서면 1층은 전시관이다. 이곳에는 구상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가 펼쳐진다.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와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고, 구상 시인이 평소 사용하던 돋보기와 필기도구, 안경, 그리고 모자가 전시되어져 있어 평소 검소하였던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영상실에서는 시인의 문학세계와 사상을 생생한 육성을 통하여 직접 들을 수 있어 또 다른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

 

  2층에는 구상 시인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소장 도서뿐 아니라 지인들의 기증도서 등 3천여 권이 비치되어 열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또 보존서고 및 열람실에서는 소장도서와 귀중한 자료들을 읽을 수 있다. 소장품으로는 시집 「구상」 등 51권의 시집과 유품 3백여 점, 소장도서 2만 7천여 권, 육필원고 3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세미나실에는 문학 강좌와 세미나 등이 수시로 열리며 평소에는 지역주민들이 자유스럽게 찾아와 책을 읽는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구상 시인의 생애와 작품세계

 

  구상문학관 탐방을 하며,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정리해 보았다. 구상 시인의 본명은 구상준으로 1919년 9월 16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642에서 태어났다. 그 후 1923년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로 이주했다가 1938년 원산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중등과 수료하고, 1941년 니혼대학 전문부 종교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구상 시인은 북한 함흥에 북선 매일 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1946년 원산여자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북쪽에서 겪은 필화사건> 

   1946년 초 원산의 문학도들은 북로당이 각 직업 동맹과 더불어 직능 단체 조직에 나서자 그 일환으로 원산 문학가 동맹을 발족했다. 구상 시인은 신문 지면이나 동인지에 작품 발표를 하고 있었으므로, 문맹에 자동적으로 일원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조직 사업이나 선전 행사는 일체 외면하고 원산 여자 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 구상 시인은 ‘원산 문예총’의 위원장으로부터 해방 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받고 <여명도>, <길>, <밤> 등의 작품을 제출했는데 그 시편들이 시집《응향》(1946)의 권두에 실렸다. 그 시집의 장정은 이중섭이 맡았는데, 표지 그림은 군동상(群童像)이었다. 즉시 북한의 신문과 방송은《응향》을 규탄하는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원산을 비롯한 각 지방 동맹에 검열 사업을 벌일 것을 공고하고, 구상 시인의 시편들을 문제 삼아 공격하였다. 그것은 구상 시인의 시 자체가 그들의 눈으로서는 예술지상주의적일 뿐 아니라 이미 출신 성분이나 행동거지가 반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백인준이라는 자의 논평에 의하면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요, 반역사적이요, 반인민적이요”등 도합 7개의 수식이 붙은 죄목이었다. 그 필화를 입고 구상 시인은 1947년 2월에 탈출 월남하였다.

 

  월남한지 한달 남짓《응향》사건은 남로당계 문학가 동맹의 기관지 제3호에 대서특필 전재 보도되었고, 이에 대하여 민족 진영에서 김동리씨를 비롯하여 조연현, 곽종원 씨 등이 반론 항의에 나섰다. 구상 시인은 최태응씨가 편집하던《해동공론》에 ‘북조선 문학 여담’이란 제목으로 사건의 경위를 발표하게 되었고, 당시 우익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백민》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발을 드려놓기 시작했다.

  6.25전쟁 후인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하였다가 1974년 서울로 이사하여 2004년 5월 11일 새벽3시 별세할 때까지 20여 년간 왕성한 문학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 구상 시인의 연보를 살펴보자.

 

      <작품연보> 

   1946 북한 원산에서 시집《응향(凝香)》에 작품이 수록되어 필화를 입음 
   1951 시집《구상(具常)》펴냄 
   1953 시회평론집《민주고발(民主告發)》펴냄 
   1956 시집《초토(焦土)의 시》펴냄 
   1960 수상집《침언부언(沈言浮言)》펴냄 
   1975 《具常文學選》펴냄 
   1976 수상집《영원 속의 오늘》펴냄 
   1977 수필집《우주인과 하모니카》펴냄 
   1978 신앙에세이《그리스도 폴의 江》펴냄 
   1979 묵상집《나자렛 예수》펴냄 
   1980 시집《말씀의 실상(實相)》펴냄 
   1981 시집《까마귀》, 시문집《그분이 홀로서 가듯》펴냄 
   1982 수상집《실존적 확신을 위하여》펴냄 
   1984 자전시집《모과(木瓜)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선집 《드레퓌스의 벤취에서》펴냄
   1985 수상집《한 촛불이라도 켜는 것이》,
  서간집《딸 자명(滋明)에게 보낸 글발》, 구상연작시집》펴냄  
   1986 《具常詩全集》, 수상집《삶의 보람과 기쁨》, 
파리에서 불역(佛譯)시집《타버린 땅》펴냄 
   1988 수상집《시와 삶의 노트》, 시집《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시론집《현대시창작입문》, 이야기시집《저런 죽일 놈》펴냄 
   1989 런던에서 영역시집《타버린 땅》, 시화집《유치찬란》펴냄 
   1990 한영대역시집 《신령한 새싹》, 영역시화집《유치찬란》펴냄 
   1991 런던에서 영역연작시집《밭과 강》,
 시선집《조화(造化) 속에서》펴냄 
   1993 자전시문집《예술가의 삶》펴냄  
   1994 아흔에서 독역시집《드레퓌스의 벤취에서》펴냄, 희곡 시나리오집《황진이(黃眞伊)》펴냄 
   1995년 수필집《우리 삶, 마음의 눈이 떠야》펴냄 
   1996년 파리 라 디페랑스 출판사로부터 세계 명시선의 하나로 선정되어, 
한불대역(韓佛對譯) 시집《영원한 삶》펴냄. 영국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한 《신성한 영감 ㅡ 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에 신앙시 4편이 수록됨 
   1998년 도쿄에서 일역(日譯)《한국3인시집 ㅡ 구상· 김남조 · 김광림 펴냄》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상 시인은 10여 권이 넘는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 등을 펴냈으며 팔순에 다다른 시기에도 시집 ‘인류의 맹점(盲點)’ 을 발표해 문학에 대한 열정과 정갈한 노시인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때문인지 문학은 항상 인생의 부차적인 것이요, 주된 것은 종교, 즉 구도요, 그 생활이었다.

 

  그래서 구상 시인은 일본에 가서 대학에 입학할 때도 명치대학 문예과와 일본대학 종교과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결국 종교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신심을 가다듬기 위하여 복음의 묵상서《나자렛예수》와 신심시선《말씀의 실상》을 펴냈다.


<현실 초극의 이상 실현>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나는 시의 주제가 나의 전인적(全人的) 생명과 인격 속에서 발상될 것을 바란다. 즉 세계 사상에 있어서의 자기 존재를 규명하고, 인간의 유의식(類意識)이 명하는 바 공동 이상을 나의 시의 사명으로 삼고자 한다.”고 밝혀 스스로 시의 특질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했다.

  구상의 시는 사회의 부정과 불의, 부조리를 고발하되, 그 고발이 자기 참회로 귀결되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었다. 따라서 그의 시적 태도는 철저하게 존재론적인 기반 위에서 미의식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즉,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없는 감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역사의식에 기초하지 않은 생경한 지성이라는 것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가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집 『초토의 시』다. 이 시집에서는 시인이 직접 체험한 한국전쟁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전쟁의 고통을 초극하고 구원의 세계에 도달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새끼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 <초토의 시 1>


 

 

   6.25전쟁이 빚어낸 비극적 현실을 재제로 전쟁의 상실감과 인간애를 표현한 시다. 민족의 비극을 그리면서도 그 비극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소망이 담겨 있다. 처참한 현실에 대한 절망과 탄식을 극복하고, 형제애와 인류애가 전쟁의 비극이나 참회, 이데올로기에 우선함을 강조한다. 미래의 희망을 확신하는 그는 또 이렇게 노래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無力)에 지
치고        

   번번이 패배(敗北)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 <그분이 홀로서 가듯> 2연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 <말씀의 실상(實相)> 1 - 2연

 

 



<존재 탐구의 구도(求導) 정신>



  구상의 시세계를 규정하는 또 다른 특징은 견고한 기독교적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매우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는 한국의 건국신화, 전통문화, 한자문화권의 고등 교양, 자연탐구는 물론, 선불교적 명상과 노장사상까지 포용하며, 이들 사상과 교양은 항상 기독교적 구원의식에로 통합되고 있다. 역사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궁극을 동시에 포괄하고자 하는 의욕이 절대적 신앙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은 그의 시세계의 견고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마디로 오늘 속의 영원, 영원 속의 오늘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외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오늘’ 전문  
                     


  

 


   특히 구상시인의 작품은 일찍부터 불어와 영어, 독어,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돼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문학을 사랑하는 각국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화적인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프랑스 문인협회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 중에 한 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79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1991년부터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 문인협회 고문으로 활약했으며, 1986년과 1993년에 열린 아세아 시인회의 서울대회장,1991년 세계 시인대회 명예대회장 등을 맡아 문학계에서 폭넓은 황동을 전개했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언론계, 학계에도 왕성하여 1942년 북선 매일신문사를 시작으로 연합신문사, 영남일보사, 경향신문사에서 기자, 주간, 주필, 논설위원 등을 맡아 일했는가 하면, 교육계에서도 효성여대, 서울대, 서강대, 하와이대, 가톨릭대, 중앙대 등에서 강사 혹은 교수를 역임했다. 수상 경력으로는 금성화랑 무공훈장(1955년), 서울시문화상(1957년), 국민훈장 동백장(1970년), 대한민국 문학상본상(1980년), 대한민국 예술원상(1993년) 등을 수상했다. 

 

  기독교적 존재론을 기반으로 미의식을 추구하며, 기독교적 구원의식을 바탕으로 전통사상과 선불교적 명상 및 노장사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정신세계를 수용해 인간존재와 우주의 의미를 탐구한 구상(具常·85) 시인은 2004년 11일 오전3시40분 지병인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를 좋아하는 지인들은 오늘도 왜관에 있는 문학관을 찾아오고 있다. 해마다 그를 기리는 추모행사가 왜관의 구상문학관에서 열린다. 

 

 

 

 

   2005년, 그의 1주기를 맞이하여 구상 시인을 기리는 추모문집 〈홀로와 더불어〉(나무와숲)가 출간되었다. 김태길 홍윤숙 박삼중 임헌영 이부영씨 등 각계 원로와 동료·후배 문인 102명의 글이 실렸다. 1930~40년대 원산 시절에서부터 1950년대 전쟁기와 1970년대 하와이대 초빙교수 시절, 1980년대 이후 작고하기까지의 시기별로 그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증언’에 나섰다.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형수와 장애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던 고인의 인간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 고속도로 이용시
  경부선 : 왜관IC(우회전)→매원교(좌회전)→제2왜관교 우측면도로→구상문학관
* 일반국도 이용시
  대구 ▶ 왜관→매원교(좌회전)→제2왜관교 우측면 도로→구상문학관
  구미 ▶ 왜관교→제일주유소→문화의집→왜관읍사무소→구상문학관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