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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부산 범어사와 남산동, 김정한 <사하촌>의 무대

by 혜강(惠江) 2018. 9. 15.

 

김정한 사하촌’의 무대 

 

 성(聖)과 속(俗)은 불이(不二)

 “사람답게 살아라” 불의한 세상 향한 일갈  

 

글·사진 = 김진 동화작가  

 

 

부산 금정산에 자리 잡은 범어사는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로 통한다. ‘사하촌’의 보광사는 범어사를 형상화한 것이다.

 

부산 금정구 남산동 요산문학관에서 내려다본 전경. 남산동은 김정한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신라시대 왜구 침탈 막기 위해 세워진 호국사찰 부산 범어사 

일제강점기 훼손 어두운 역사, 친일승려 횡포 소설에 그려져 
불의에 항거했던 선생의 생가 가는 길, 
계곡엔 관광객들 붐벼 
소설 속 절 아래 ‘상마’ 자리는 마을 사라지고 
식당들만 가득 

 


  사람이 산으로 들면 신선이 되고(仙),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속인(俗)이 된다는 선배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부산의 금정산으로 향한다. 버스가 산 둘레를 휘감아 돌자 여름 숲 사이로 먼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더니 발아래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버스의 종착역은 범어사다. 편리의 수단은 사유의 공간을 좁힌다. 깊은 산속에 절이 있는 것은 절로 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수행의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길을 한 발 한 발 꾹꾹 대지를 딛고 올라왔더라면 사람이 산으로 들면 신선이 된다는 말을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범어사는 부산의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사찰이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로 신라 문무왕 18년(678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범어사의 창건 설화가 이렇게 기록돼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빛 나는 우물’이라는 뜻의 금정(金井)이란 산 이름과 범천의 고기, 곧 범어(梵魚)라는 절 이름을 지었다.” 

 신비한 설화만큼이나 범어사는 고승들도 많이 배출했고, 그 명성에 힘입어 절의 규모도 확장됐다. 절을 창건한 의상대사,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는 물론이고 표훈대덕(삼국유사에 하늘과 통하는 인물로 나옴), 한국 선(禪)의 효시로 불리는 경허선사, 독립운동가인 용성선사, 성월선사, 만해 한용운과 1950년대 불교 정화 운동에 앞장선 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범어사와 인연을 맺었다. 

 버스에서 내려 계곡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 큰 소나무 사이에 굵은 편백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낯설다. 남쪽이라 수종도 다르다며 스쳐 지나간다. 곧이어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비림(碑林), 즉 비석들이 숲을 이룬 풍경이 나타난다. 이 역시 낯설다. 편백나무 주변의 커다란 바위에는 누군가 이름을 커다랗게 새겨 놓았다. 범어사의 연혁과 범어사 전각을 중수하거나 불사를 거행하는 데 재화를 헌납, 또는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어떤 이름은 목적 없는 선의일 것이고, 어떤 이름은 욕망일 것이다. 그 이름들이 곧 범어사의 역사가 아닐까.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을 지나면 대웅전과 미륵전, 대장전, 비로전, 보제루, 종루 등 전각과 요사, 누, 문이 층층이 자리해 있다.  

 범어사는 창건 때부터 줄곧 호국 사찰로서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절이다. 신라 흥덕왕 때 왜인이 10만 명을 병선에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해 와 대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대사와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물러갈 것이라고 해 왕이 그대로 하였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해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범어사는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승병 사령부를 꾸려 왜적 퇴치에 나섰고, 일제강점기에는 3·1만세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범어사의 찬란한 역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크게 훼손되고 왜곡됐다.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는 절 안에 조선총독부의 푯말을 세우는 것은 물론, 가람의 배치를 훼손했다. 석등과 석탑을 옮긴 뒤 석탑에 일본식으로 난간대를 설치했고, 대웅전 전면에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금송을 심었다. 보제루 역시 벽면에 창호를 설치하는 등 일본식으로 변형했다. 천왕문과 불이문 부근에는 우리 전통의 소나무를 베어내고 일본 나무인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대량 식재했다. 편백나무가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 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친일 승려에 의한 횡포도 적지 않았다. 일종의 ‘암흑의 역사’가 생겼고, 이 암흑의 역사는 범어사와 인연이 깊은 김정한 선생의 소설 소재로 종종 등장했다.

 김정한은 범어사의 아랫마을인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를 ‘낙동강의 파수꾼’이라 부른 선생은 서울 유학과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시절을 빼고는 부산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일생을 보냈다. 부산은 김 선생 문학의 근간이다. 낙동강과 범어사는 그의 작품의 주요 배경이거나 소재로 사용됐다.

 ‘사하촌(寺下村)’은 김 선생의 1936년 조선일보 등단 작품으로, 사찰 소유의 전답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불하는 ‘사찰 아랫마을’ 성동리의 가난한 농민들 이야기다. 성동리 옆에는 절의 중들이 이룬 마을인 ‘보광리’가 있다. 작품은 일제에 빌붙어 횡포를 부리는 사찰과 착취당하는 농민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 시대 농촌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통제와 가뭄이라는 자연적인 재난에 시달리고 있는 소작인들의 사정을 외면하고 가혹할 정도로 소작료를 받아 제 배만 불리는 사찰의 행태는 결국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저항을 불러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맺는다. 이 소설에서 농민에게 가혹한 횡포를 가하는 ‘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무려 백여 명의 노·소승이 우글거리는 사찰 대본산 보광사’는 범어사를 형상화한 것이다.

 ‘사하촌’뿐만 아니라 선생의 초기 작품에는 절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여럿 있다.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농민의 현실을 그린 ‘옥심이’에 나오는 백암사, 인간의 추악한 탐욕을 그린 ‘추산당과 곁 사람들’에 나오는 백련암, 타락한 불교를 비판한 ‘묵은 자장가’에 나오는 청운사 등이 모두 범어사에서의 체험이 바탕에 깔려 있다. 타락한 불교는 김 선생에게 당대의 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알레고리로 작용했다.

 “치삼 노인은 ‘중놈’이란 바람에 가슴이 섬뜩하였다. 그것은 자기들이 부치고 있는 절 논 중에서 제일 물길 좋은 두 마지기가, 자기가 젊었을 때, 자손 대대로 복 많이 받고 또 극락 가리라는 중의 꾐에 속아서 그만 불전에 아니, 보광사(普光寺)에 시주한 것이기 때문이다. 멀쩡한 자기 논을 괜히 중에게 주어 놓고 공공 소작을 하게 되고 보니, 싱겁기도 짝이 없거니와, 딱한 살림에 아들 보기에 여간 미안스러운 일이 아니었다.”(‘사하촌’ 중에서)  

 “그들은 모두 부역을 나온 백암사 소작인들의 아내와 어머니들이었다. 역사가 길고, 돈 많고 산수 좋기로 유명한 백암사에서는 자동차의 통래가 자유롭도록 봄 들자 이 공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소작인들에게 무리한 부역을 통고하고 똥개란 별명을 가진 거머무트름한 청부업자에게 일을 맡겼던 것이다. 청부업자 측에서는 삯전 안 드는 이 순적 백성들을 혹독한 몰매로써 눈도 못 뜨게 튀볶아댔다.”(‘옥심이’ 중에서)

 증조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선생은 12세 때인 1919년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에 들어간다. 자서전인 ‘낙동강의 파수꾼’에서 “내가 절 학교에 이태 동안 다니면서 소위 신학문이란 걸 배운 이외에 그 당시의 불교라기보다는 절이나 중들에 대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많이 보았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명정학교를 다니면서 보고 느낀 부정적인 체험이 ‘사하촌’뿐만 아니라 ‘옥심이’ 등의 작품에서 사찰과 승려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조선일보에 소설 ‘사하촌’이 발표되고 나자 불교계, 특히 범어사의 승려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고, 그 때문에 범어사 젊은 승려들한테 뭇매를 맞아 신춘문예 상금이 치료비로 다 들어갔다고 한다.(1990년 1월 1일 한겨레신문 인터뷰)

 해방 후 범어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해방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왜색 사판승들이 승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범어사의 동산 스님은 불교정화 운동을 시작했고, 범어사가 주축이 됐다. 2009년부터 범어사는 일제 잔재 청산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의 표지석도 뽑아냈고, 3층 석탑 난간도 제거했다. 원래 사방이 개방된 2층 누각이었던 보제루를 1층으로 고쳐 짓고, 일본식 벽체를 둘러 단청이 없었던 보제루도 복원했다. 친일의 질곡을 불식시키고, 천년 고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절을 둘러보며 그것이 단순히 외형의 훼손만 복원하는 작업이 아닌, 타락한 불교 정신의 복원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길을 걸어서 내려온다. 계곡에는 무더위를 피해 탁족(濯足)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계곡의 물소리와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불이(不二)에 대해 생각한다. 성과 속이 둘이 아님을 새삼 되새긴다. 굽이를 돌자 김정한 문학비가 서 있고, 조금 더 내려오자 상마마을의 표지석이 보인다. 반대편 아랫마을이 하마마을이라는 표지도 있다. ‘사하촌’의 보광리와 성동리의 무대로 도로를 가운데 두고 윗마을(상마)과 아랫마을(하마)로 나뉘어 있는데, 마을의 흔적은 사라지고 음식점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산길을 다 내려오면 김 선생의 생가 마을인 남산동이다. 범어사에서 남쪽 기슭에 있어 남산동이라고 하는데, 범어사의 사전을 소작하는 농민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는 선생의 책들을 돌조각으로 빚어놓은 표지석이 서 있고, 요산문학로라는 글자가 바닥에 커다랗게 쓰여 있다. 집집마다 벽에는 선생의 작품 속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벽에는 선생의 문장들이 적혀 있다.

 선생이 태어난 1908년부터 청년 시절까지 보낸 생가는 2003년에 복원됐는데, 단아한 일자형 전통한옥이다. 그 옆에는 2006년 세워진 요산문학관이 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이 소장했던 육필 원고와 창작 메모, 작품집, 소설 속의 현장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매년 요산문학축전, 특별전시전, 독후감토론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선생을 기린다.  

 생가와 요산문학관을 돌아 나오는데, 선생의 문장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사람답게 살아라.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불의에 타협한다든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갈 길이 아니다.(‘산거족’ 중에서) 


 일제에 항거해 붓을 꺾고 30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지 않았던 선생이 일갈하는 듯하다.   “사람답게 살아라!” 

 

 

양산봉기 사건후 농민문학 투신…일제 탄압에 항거해 30년간 붓 꺾어 

 


 요산 김정한(사진) 선생은 1908년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지금의 부산 금정구 남산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증조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열두 살이 되던 해인 1919년 범어사 경내에 있던 명정학교(지금의 금정중학교)에 입학했으며 이때의 불교 체험은 선생의 초기 절을 소재로 하는 작품에 반영됐다. 1928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울산 대현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일본의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인교원연맹 조직을 계획했으나 일경에 체포됐다. 이 일을 계기로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  요산문학로에 세워진 표지석. 
 

 1930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 그는 1931년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였고, ‘조선시단’에 ‘구제사업(救濟事業)’이란 단편을 기고했다가 작품 제목만 실리고 내용은 전문이 삭제를 당했다. 

 1932년 여름방학 때 귀국한 선생은 양산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돼 투옥되자 학업을 중단한다. 그리고 이듬해 남해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농민문학에 투신한다. 1936년에 단편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소설 ‘옥심이’ ‘항진기(抗進記)’ ‘기로(岐路)’ 등을 발표하면서 ‘민중을 선동하는 요주의 작가’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 후 동아일보사 동래지국을 인수해 운영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붓을 꺾었다.  

 광복 후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이후 부산대 교수로 재직했다. 5·16 직후 부산대 교수직을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으로 논설과 칼럼을 집필하는 한편, 1967년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 부산지부장을 역임했다. 1965년 부산대 교수로 복직해 1974년 정년퇴직했고, 그 뒤 1987년 민족문학학회 초대회장직을 맡았다.

 


 교수직에 있으면서 1966년 단편소설 ‘모래톱이야기’ 발표를 계기로 중앙문단에 복귀하고, 이후 5년 동안 낙동강변의 순박하고 무지한 시골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암담한 일제치하와 그 이후 핍박당하는 농촌 현실을 폭로하는 소설을 썼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修羅道)’로 제6회 한국문학상을 받았다. 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기간 한 여인의 일생을 통해 허진사(許進士) 댁의 가족사(家族史)와 한민족의 수난사가 사실적으로 재현된 ‘수라도’는 이름없는 민중의 항거정신을 뚜렷이 부각시킨 작가의 문제작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출처> 2018.9.14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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