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 문학기행(국내)

환갑이 된 시인 서정주, 문득 ‘손때 묻은’ 고향으로 돌아오다

by 혜강(惠江) 2018. 10. 1.

 

서정주 시인과 질마재

 

환갑이 된 시인… 문득 ‘손때 묻은’ 고향으로 돌아오다

 

서정주 詩集 ‘질마재 신화’의 배경… 전북 고창 선운리

 

 

 

 

 

 

▲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서정주의 생가. 복원된 초가 두 채와 흰색 조형물, 시비가 마치 그림책 속 삽화 같다.

 

 

고향인 전라도의 일상 언어를 시로 끌어들여 ‘새 영역’ 개척  
아무 말이나 붙들고 늘리면 詩, ‘부족 방언의 요술사’로 불려
미당시문학관 2001년말 개관, 소요산에 안긴 ‘山’모양 건물  
단일 문학관으로는 최대 규모, 옥상 전망대에선 사방이 그림
미당의 친일행적 끝없는 논란, 결국 최종판단은 독자들의 몫 

 


 

 미당 서정주의 고향을 대중교통 편으로 찾아가는 길은 영 만만하지 않다. 고창까지야 별 상관없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선운리(仙雲里)까지 가는 군내 농어촌 버스가 하루에 몇 번 없다. 몇 해 전인가, 초행길에 지도만 믿고 선운사(禪雲寺) 입구의 연기마을에서부터 풍천(風川)을 따라 선운리까지 갔다가 다시 질마재 고개를 넘어 되돌아왔다. 무작정 걷다 보니 결국 30여 리를 꼬박 발품 팔아야 했다. 그 고생길이 지금은 고창의 둘레길이 돼 ‘질마재길 3코스’라는 어엿한 이름까지 얻었다.

 

 일찍 서두른 덕에 다행히 버스 시간에 대어 올 수 있었다. 고창을 떠난 버스가 흥덕읍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많이 내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빈 곳을 채운다. 오늘이 마침 장날이라고 한다. 새벽부터 서둘러 이른 장 나들이를 벌써 마친 어르신들이 우선 큰 짐부터 던지듯 올려놓고 다시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줄지어 오른다. 금세 버스 안은 다시 사람들과 바닥에 부려 놓은 짐 꾸러미에 치여 한 발 떼어 내디딜 곳이 없다. 가을걷이가 얼추 끝난 후에 맞는 장 나들이에는 채비할 것이 더 많은 법이다. 행여 깨어질까, 주름진 손아귀에 감아쥔 것도 모자라서 품에 꼭 안은 갓 짠 기름병들이 가을 햇살에 보석처럼 번들거린다. 얼마간은 때가 되면 고향 찾을 친지들과 함께 입맛을 다실 테고,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아껴뒀다가 두둑한 몫으로 나뉘어 자식들 두 손에 바리바리 들려지리라. 시골 버스는 정거장이 아닌 곳에도 수시로 멈춰 서지만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되레 나잇살 덜 먹은 젊은네라면 매번 짐을 부리는 임시 차장 노릇을 자청해야 한다.

▲  ‘국화와 산돌’ 시비.
 

 버스 안에 울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몰래 귀동냥해본다. 같은 호남 방언이라도 지역에 따라 자못 다르다. 전라북도의 사투리는 그 억양의 걸쭉함과 질퍽함은 남도보다 덜하지만, 리듬감과 감칠맛은 한결 더하다. 전라도 언어에 노랫소리를 매긴 것이 곧 ‘판소리’다. 고창의 경우는 그 지리적인 위치 탓에 조금 애매하지만, 딱 중간쯤 되는 듯하다.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인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와 최초의 여류명창이며 ‘도리화가(桃李花歌)’의 주인공인 진채선(陳彩仙)이 바로 고창 출신이다. 

 서정주도 이 고향 사람들의 일상 언어를 자신의 시(詩)로 끌어들여, 우리 시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유종호는 서정주에 대해 “아무 말이나 붙들고 늘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은 정히 부족 방언의 요술사이다”라고 말했다. 혹여 ‘질마재 신화’의 짐짓 기다란 이야기체 시구들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당최 읽기가 힘들다면, 가만 소리 내어 읽어보면 된다. 혀끝에는 단번에 붙는다. 흔히 이제 막 입문한 제자가 글자나 악보가 아닌 스승의 소리를 따라 하며 판소리를 익히는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리라. 

 

 

▲ 2001년 개관한 미당시문학관.

 

 


 미당시문학관(未堂詩文學館)은 2001년 말에 개관했다. 담쟁이 넝쿨이 감싸다 못해 휘장처럼 늘어진 입구를 지나면 문학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요산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듯하다.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의 옛 교사(校舍)들을 개조하고 그 중앙에 6층짜리 건물을 새로 세워 전시실로 사용한다. 예전 건물들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중앙에는 첨탑 같은 높은 건물, 거기에 양 끝으로는 높다란 나무들이 있으니, 한자 ‘뫼 산(山)’을 형상화한 모양이다.

 

 단일 문학관으로는 국내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다는 이 문학관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층별 전시실을 둘러보는 구조로 돼 있다. 이 문학관이 자랑하는 옥상 전망대에 서면 사방이 한 폭의 그림이다. 정면에는 서해 바닷물과 곰소만 너머로 보이는 변산반도, 뒤로는 소요산과 질마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발아래로 질마재 마을과 시인의 초가 생가, 맞은편 작은 언덕에 있는 시인의 묘소까지 눈길만 사방으로 돌리면 쉬이 찾을 수 있다. 

 미당의 생가도 문학관과 함께 복원했다. 처음에는 “흥부 집을 놀부 집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도 들었다지만, 초가 두 채와 그 중간에 놓인 우물 하나가 마치 그림책 속 삽화 같다. 마당에 놓인 시 ‘다섯 살 때’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국화와 산돌’ 시비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주변에 심어놓은 국화는 아직 “노오란 네 꽃잎이” 필 때가 아니라는 듯 꽃봉오리를 움켜잡고 있다. 미당 생가에서 멀지 않은 외할머니의 옛 집터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래된 방앗간이 있었다. 시 ‘해일(海溢)’이 벽화로 적혀 있었다.

 

 지금은 간척을 한 탓에 저 멀리 물러나 있는 바닷물이 예전에는 이곳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오래전에 선운리의 어부들이 띄웠던 나룻배들이 그 주변에 놓여 있었다. 올해 초, 이 방앗간 건물은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자화상’ ‘다섯 살 때’ 등의 시와 함께 헐려버렸고, 이제는 덩그러니 폐목선들만 남아 있다.

 서정주의 ‘자화상’은 첫 시집인 ‘화사집(花蛇集)’(1941)에, 그것도 첫머리에 놓인 시이다. 시인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외치며 고향을 떠난다.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을 자신에게 물려준 외할아버지가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도 애초에는 고향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고향은 그저 떠난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며, 돌아올 곳이 없는 사람은 아예 먼 길을 떠나지 않는다. 시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집 ‘귀촉도’(1948)의 마지막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조 할 수 없이 되면 고향을 생각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形象)을 불러일으킨다”(‘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고향은 자신의 처지가 어려울수록 더욱 그립기 마련이다.

 

 

 

▲ 문학관에서 내려다본 선운리.

 

 


 평생의 화두였던 신라를 넘어 태초의 과거를 찾아서 ‘동천(冬天)’(1968)의 저 높은 하늘까지 내달리던 시인은 환갑이 되던 해인 1975년에 문득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는 어린 시절의 삶과 기억을 바탕으로 개인적 추억들과 고향 마을에서 대를 이어 전해지는 옛이야기들을 산문시로 엮은 것이다. 인간으로서 끝내는 되돌아가야 할 고향과 그 원초적 삶을 그리며, 오랫동안 찾지 않은 고향과 여전히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바친 시인의 헌사이다. 이 시집을 미당의 대표작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때가 서정주의 길고 변화 많은 시력(詩歷)에 있어 중요한 고빗길이었음은 분명하다.

 

 ‘질마재 신화’ 이후에 시인은 다시금 ‘떠돌이’를 자처하고, 아예 자신의 시를 ‘떠돌이의 시’(1976)라고 이름 짓는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마지막 두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1993)와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에 어김없이 이 단어를 제목에 새겼다. 세상 끝까지 평생 내달렸던 시인은 결국 죽어서야 고향에 돌아왔다.

 서정주는 2000년 눈이 많이 내린 성탄절 전야에 이 세상을 떠났고, 고스란히 20세기의 시인으로 남았다. 시인으로서의 그를 평가하는 일은 전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시의 아름다움으로 삶의 오점을 덮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정주의 잘못된 처신으로 그의 시 전체를 폄하할 수도 없다. 진실과 상식이 필요하다. 부끄러운 역사도 분명 역사의 일부분이며 결국 지워질 수도 없고 끝내 제외될 수도 없다. 공정하고 균형 잡힌 평가가 필요하다. 문학관의 공간 하나를 온전히 미당의 친일 작품 전시에 선뜻 할애하고, 서정주의 서울 집(관악구 남부순환로 256나길 4, 남현동)의 시인 연보(年譜)에도 ‘친일 행적’을 분명히 드러내 밝히고 있다. 옳은 시작이다.

 몇해 전 늦가을, 처음으로 선운리를 찾았을 때의 기억 하나. 고창의 지역 축제가 한창이었고, 서정주의 호를 그 이름에 붙인 문학상의 시상식과 미당을 비난하는 시위가 지천으로 활짝 피어난 국화꽃 무더기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이 광경을 가만 보고 있자니,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에게 괜히 미안하고, 하다못해 국화꽃 보기에도 민망스러웠다.  

 작년에는 드디어 ‘미당 서정주 전집’이 스무 권으로 완간됐다. 한 대가(大家)의 모든 작품을 “하나도 빠짐없이” 집대성하는 작업은 비단 그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도 분명 뜻깊은 일이다. 하지만 곧바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시작됐다. 늘 논란이 됐던 시 몇 편을 “미당 생전에 시집으로 묶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록하지 않고, 그저 작품연보에 제목만 올렸기 때문이다. 안타깝다. 미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랑해 온 이 전집의 편자들은 유념했어야 했다. 얼룩이 있는 도자기는 얼마든지 보물이 될 수 있지만, 그 흠집들을 억지로 없애려고 그 자리에 구멍을 내버리면 아예 그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친일과 독재 정권의 찬양.” 미당 생전의 정치적 이력을 문제 삼은 논쟁의 핵심은 결국 한 시인에게 있어 삶과 작품의 분리 문제이다. 그런데 서정주의 경우는 학문적 차원의 논의보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전개된 쟁론의 성격이 유독 강하다. 누구도 뚜렷한 해결책을 낼 수 없는, 그래서 어찌 보면 시시한 이 논쟁은 ‘틈만 나면’ 다시 돌아온다. 이쯤 되면 누군가 서정주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이 논쟁을 이어나가려 하는 듯하다는 의구심마저 든다(강준만, ‘미당 서정주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그러는 동안 독자들은 이 지루한 논쟁에 이내 관심을 잃었고, 결국 손에 든 미당의 시집마저 흥미를 잃어서 던져버린다. 고창의 지역 축제에서 어느덧 그의 이름은 사라졌고, 한때는 선운사를 방문한 사람들이 으레 길을 이어 질마재의 ‘미당시문학관’을 찾았지만, 이제는 되레 외면한다. 논자(論者)들이 온갖 지식을 뽐내며 제 입맛에 맞춰 공소와 변호를 일삼는다고 해서 쉬이 끝날 논쟁도 아니다. 결국, 최종 선고는 독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내려지는 가장 큰 벌은 어느 날 아무도 그의 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헛되이 시간만 축내다가 조만간 정말로 그리될까 봐 조바심이 난다. 

 서정주의 가장 유명한 시비를 찾아 선운사를 찾는다. 이 천년 고찰(古刹)도 선운리 사람인 미당에게는 그저 “질마재 마을의 절간”일 뿐이다(‘추사와 백파와 석전’). 생존 시인의 시비는 드문 경우지만, 그것도 무척이나 이른 시기인 1974년에 “회갑을 맞는 미당의 장수와 건필을 기원”하며 세웠다. 지난 세월 탓에 시비의 글씨는 많이 흐려져 알아보기 힘들지만, 좌대(座臺) 아래 놓인 받침대, 그 옆면에 새긴 후원한 사람들의 이름은 어제 쓴 듯 선명하고, 그래서 볼썽사납다. ‘동구(洞口)’란 ‘동네 어귀’뿐만 아니라 ‘절로 들어가는 산문(山門)의 어귀’도 뜻하니 이 시비가 놓인 위치는 참으로 적절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상하게도 이 시비는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아서 그냥 지나가는 일이 잦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선운사 동구’ 전문).

 

 이 절창(絶唱) 덕분에 유명해진 선운사의 ‘동백꽃’이야 이번에는 볼 수 없지만, 그 대신에 끝물 ‘백일홍’과 맏물 ‘꽃무릇’을 실컷 봤으니, ‘붉은 꽃’은 이만하면 족하다.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문화평론가 

 

 

 

<출처> 2018. 9. 28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