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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기념관 탐방, 한국 땅에 심은 펄 벅(P.S.B)의 박애정신

by 혜강(惠江) 2018. 6. 17.

 

펄벅기념관 탐방

 

한국 땅에 심은 펄 벅(P.S.B)의 박애정신 

 

 

·사진 남상학

 

 

 

 

▲ 펄벅기념관 입구에 놓인 표지석

 

 부천에서 살고 있는 대학 친구 성포(星浦)의 안내를 받아 시반사우(詩伴四友)들이 부천시 심곡동에 있는 펄벅기념관을 찾았다. 지하철 부천역에서 펄벅기념관까지 승용차로 이동하는 시간 내내 내 머리에 스치는 의문은 왜 외국인 펄벅의 기념관이 한국에 건립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파트와 원룸촌 사이의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르니 작고 아담한 주택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보고 싶었던 펄벅기념관이었다. 

 

 내가 가졌던 의문은 펄벅기념관에 도착하여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 순간 곧바로 풀렸다. “현재 펄벅기념관이 있는 자리는 1964년부터 10년 정도 소사희망원이 있던 자리입니다. 소사희망원은 펄벅이 짓고 펄벅재단을 만들어 한국지부를 최초로 세웠지요"

 

 미국 여류작가로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펄벅(Pearl S. Buck,

1892~1973)은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 인권평등운동, 인종 간의 편견 해소와 민족 간의 이해증진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였다. 1965년에는 다문화아동복지기관인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1967년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10여 년간 한국의 다문화아동들이 차별 받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펄벅기념관의 건립은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펄벅재단으로부터 ‘올해의 펄벅 여성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부천시가 추진해 이루어진 것이다. 펄벅기념관은 펄벅 여사의 사회봉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06년 9월 30일 펄벅재단의 발원지이자 소사희망원의 자취가 남아있는 역사적인 현장에 총 3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지상 2층으로 전시관 건물을 짓고 작은 공원형태로 만들었다. 이 때 미국 펄벅재단과 장영희, 김희태 씨 등이 유물 및 서적을 기증함으로써 내부 전시물을 갖추게 되었다. 

 

 

 

 

 

 

 

 

 

 

펄벅과 유일한의 인연

 

 펄벅은 1967년 부천시 심곡본동에 소사희망원을 설립해 고아·혼혈아동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소사희망원 자리는 기업인인 유일한(柳一韓, 1895∼1972)이 자신이 소유한 유한양행 소사공장 터(성주산 아래) 3만 3058㎡(약 3만 평)를 기부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러면 펄벅과 유일한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펄벅이 처음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 OSS(전략사무국) 중국 담당으로 들어온 뒤부터였다. 펄벅은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차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과 교류하면서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일한은 숙주나물 통조림 제조회사인 라초이 식품회사(1922년 창립)를 운영하며 중국의 녹두장사와 거래를 하던 중이었다.

 

 

▲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 유일한 박사, 소사희망원 설립을 위해

유한양행 소사공장 터(성주산 아래) 3만 3058㎡(약 3만 평)을 펄벅에게 기부함

 

 

 이 때 유일한은 사업이 번창하여 큰돈을 벌었고, 1926년 3월 결혼하였는데 그의 부인은 펄벅과 가까운 사이인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였다. 이런 인연으로 펄벅은 유일한을 만나 자연스럽게 서로 교류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삶의 철학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나중에 펄벅이 한국을 배경으로 쓴 자신의 작품 중 하나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유일한과 이름이 같은 '김일한'으로 한 것을 보면 펄벅과 유일한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4개의 테마 전시공간

 

 기념관은 곳곳에서 펄벅 여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기념관 앞 언덕의 야외공원에는 펄벅의 흉상이 있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가 있다. 펄벅기념관의 상설전시실은 4개 주제로 나뉘어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1960년대 세워진 소사희망원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상징공간’, 펄 벅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된 ‘펄 벅의 생애 공간’, 미국 펄벅재단이 기증한 펄 벅의 책과 초상화, 머리핀 등이 전시되어 있는 ‘휴머니스트 펄 벅 공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대지〉를 비롯해 〈살아 있는 갈대〉 등의 작품 영문판과 번역판이 전시되어 있는 ‘문학가로서의 펄 벅 공간’이 주요 전시공간이다.

 

 

 

 

 

 

 

상징 공간

 

 

 ‘상징 공간’에서는 1960년대 한국의 혼혈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소사희망원의 축소 모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펄벅 여사는 수백 명의 다문화가정아동들이 참석한 소사희망원의 개원식을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술회했다.

 

 사희망원은 펄벅재단 사무동, 남·여 기숙사를 포함해 총 9개의 건물이 1만평 대지에 세워져 있었으나 1973년 펄벅이 죽은 뒤, 1975년 문을 닫았다. 모형을 통해서 본 옛 소사희망원은 적지 않은 규모였다.  

 

 

 

 

 

 옛 소사희망원의 모형도

 

 소사 희망원은 일반 학교나 고아원과 달리 적성분석부와 개인지도부, 예능원, 재활부 등 4개부로 나누었고, 일반고아들의 예능교육도 담당했다. 2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에는 당시 150여명의 원생들이 있었으며 휴게실, 오락실 등도 갖추어져 있었고 재활부에서는 다문화가정아동들의 어머니를 위해 양재, 비서학 등 간단한 기능교육도 진행됐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에게는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아주 뛰어난 학생들은 특별 장학금으로 미국유학의 기회도 주었다.

 

 당시 펄벅 여사는 소사 희망원에 머물면서 그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기도 하였다. 다문화가정 아동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에게 교육과 직업 훈련을 시켜 이들의 재활과 사회복귀에 도움을 주도록 하였다.

 

 1967년 개원으로보터 19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소사희망원에는 2,000여 명의 혼혈아가 거쳐 갔다.  그의 중국식 이름은 '싸이전주'('賽珍珠')이다.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스스로 최진주(崔眞珠)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 사용하기도 했다.  

 

 

 

 

 

펄벅의

중국식 이름은 '싸이전주'('賽珍珠')

 

 

▲ 펄벅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 '펄벅의 생애 공간'

 

 ‘펄벅의 생애 공간’에서는 펄벅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하여 펄벅이 일생 동안 이룬 업적을 둘러볼 수 있다.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난 펄벅은 생후 3개월만에 선교사인 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여 성장한다. 선교활동에만 열중한 아버지 때문에 집안일은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지만, 부모의 중국 선교활동은 펄벅이 자신을 중국 사람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였다. 펄벅은 1910년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간다.

 

 

 

▲ 중년에 접어든 펄벅 여사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 펄벅은 난징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1917년 뒤에 중국 농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여 그들 사이에는 두 딸을  두었는데 큰 딸은 지적 장애인이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펄벅은 1931년 장편 《대지》(1931년)를 발표하여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명예를 얻고, 그 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4년 이후로 그의 저서들을 출판해 온 J.데이 출판사의 사장 R.J.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하게 된다. 

 

 펄벅은 여류작가일 뿐만 아니라 인종간의 편견해소와 이해증진을 위해 노력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다. 스스로를 ‘정신적 혼혈아’라고 말한 펄벅은 평생 동안 전 세계 혼혈어린이들을 위한 차별 없는 사랑을 실천하다 1973년 3월 6일 8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아이들 곁을 떠나 생가가 있는 그린힐즈 농장에 안장되었다. 

 

 

▲  펄벅의 한국어 이름은 최진주(崔眞珠), 중국식 이름은 '싸이전주'('賽珍珠')

 

 

 

 

 

 

휴머니스트 펄벅 공간

 

 

 

 ‘휴머니스트 펄벅 공간’에서는 미국 펄벅재단이 기증한 펄벅의 책과 슬라이드 필름, 펄벅의 초상화와 타자기, 가방, 머리핀, 서울명예시민증 등 개인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류작가로서의 펄벅은 사회사업가요, 휴머니스트였다.

 

 펄벅은 아시아와 미국 사이의 비교 문화작 이해를 도모하는 활동으로 1941년 동서협회를 설립하고, 정신적․신체적 장애가 있거나 인종 차별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일하면서 1949년 혼혈아동 입양기관인 웰컴하우스를 설립하였다.

 

 또한 미국 군인들이 아시아에 주둔하면서 태어난 미국계 혼혈어린이들에게 의료 혜택과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1964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퍼커시에 펄벅재단(현 펄벅인터내셔널)을 설립하여 아시아 각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한국에는 1967년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한국의 혼혈어린이들이 차별 받지 않고 성장하도록 도왔다. 이 모두가 인류를 사랑하고 아끼는 휴머니스트로서의 펄벅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전시관 내부에서는 다양한 유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된 투피스는 생전 그가 즐겨 입었던 옷. 펄벅은 자신의 이름 때문이었는지 진주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 중 자주 착용하던 진주 악세사리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되어 있는 유품 중에 눈길을 끄는 유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산수화이다. 이 산수화는 펄벅 여사 80세 생일 때 소사희망원 아이들 1천 30명이 자신들의 이름을 산수화 뒷면에 빼곡하게 직접 적어 펄벅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 이름 중에 “가수 인순이를 비롯해 함중아, 정동권 등도 펄벅재단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적고 있다. 

 

 

▲ 전시관 중앙의 산수화는 펄벅 여사 80세 생일 때 소사희망원 아이들이 선물했던 작품(위), 산수화 뒷면(아래)에는 1천 30명이 자신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었다.

 

 

 실제 펄벅이 사용하던 책상 위에는 <대지>를 비롯한 그의 소설 초판본 등이 펼쳐져 있으며, 시간 순서대로 두 대의 타자기 역시 눈여겨볼만 하다. 30년대 그녀가 사용하던 타자기는 쇠로 된 타자기였으나 한국에서 사용했던 67년도 타자기는 플라스틱이 개발된 후 생산된 타자기로 시대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 펄벅이 사용했던 타자기(위)와 가방(아래)  

 

 

 펄벅은 친딸 외에 7명의 자녀를 입양하기도 했는데, 그 중 한국인 구순이도 있었다. 그는 펄벅기념관 개관을 축하하며 직접 한국을 오갈 때 펄벅이 사용하던 캐리어를 기증했다. 그 외에 ‘최진주’라는 이름으로 받은 명예서울시민증, 펄벅재단 옛 현판, 2000년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펄벅여사상 수상 기념 접시, 한국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등도 의미 있는 기증품들이다


 

문학가로서의 펄벅 공간

 

 

 


 

 ‘문학가로서의 펄벅 공간’은 펄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대지』(1931)와 대지 이후 최대의 걸작으로 찬사를 받는 『살아 있는 갈대』(1963)의 영문 및 번역본을 전시한 공간이다. 그리고 펄벅 관련 영상자료를 상시 상영하고 있는 영상실이 있다.

 

 펄벅은 20세기 가정 대중적인 소설가 한 사람으로 소설, 희곡, 자서전, 번역서까지 8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중국에서 성장한 펄벅은 동(東)과 서(西)의 상호이해를 도모한 인도주의 작가였다. 1930년 중국에서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장편 첫 작품 《동풍 서풍》을 출판하였는데, 출판사의 예상을 뒤엎고 1년이 채 안 되어 3번이나 다시 인쇄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이어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1931년)를 출판한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군벌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년), 《분열된 집》(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이 작품으로 1932년 퓰리처상을 받은 데 이어 1938년에는 미국 여성작가로는 최초로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다. 

 

   자서전에서 펄벅은 큰 딸이 자신을 작가로 만든 동기 중 하나라고 밝혔다. (이 딸은《대지》에서 왕룽의 딸로 그려져 있다). 국공내전의 와중에서 1927년 국민당 정부군의 난징 공격 때 온 가족이 몰살당할 뻔했던 위기를 체험은 그가 창작 활동을 시작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

 

 

 

 

 


 

 

 

 ▲ 펄벅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장면

 

 

 

 

▲ 펄벅이 받은 노벨문학상 메달

 

 한국에 대한 애정이 극진했던 펄벅은 1951년에 출판한 『한국에서 온 두 아가씨』외에 한국의 수난사를 를 그린『살아 있는 갈대』(초판본 이름은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한국 혼혈아 등을 소재로 한 『새해』(1968) 등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 세 편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살아 있는 갈대』는 한미 수교가 이뤄진 1882년부터 1945년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까지 4대에 걸쳐 국권을 되찾으려고 헌신한 안동 씨 일족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말의 관료 김일한이 주인공이지만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는 아들 연춘의 활약상이 핵심이다. 제목은 폭력 앞에 굴하지 않는 김연춘의

별명이기도 하다. 

 

 펄벅은 미국과 중국에서 식품기업과 제약회사를 세워 독립 운동 자금을 댔던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 지낼 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고, 그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고자 한국을 찾았다가 소설까지 썼다.

 

 소설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대지』3부작(1931~1933)을 비롯하여 『동풍 서풍』(1930),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1963), 『새해』(1968), 『어머니』(1934), 『싸우는 천사들』(1936), 『어머니의 초상』(1936), 『애국자』(1939) 등이 있다.

 

펄벅기념관의 프로그램

 

 펄벅기념관은 관람객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매주 토요일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펄벅이야기’와 체험 프로그램인 ‘나도 노벨 메달리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펄 벅의 다문화정신 실현을 위해 ‘아시아 배움터’, ‘아시아 문화탐험대’ 등의 다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 이와는 별도로 펄벅재단에서는 펄벅학술심포지엄을 비롯하여 펄벅 서거 추모행사, 펄벅탄생 기념 그림그리기대회, 펄벅기념문학상 공모전 등 행사를 통하여 펄벅의 문학정신과 봉사정신을 높이고 있다. 

 

 

 

 

 

 펄벅기념관은 하절기(3~10월)에는 오전 9시~오후 6시, 동절기(11~2월)에는 오전 9시~오후 5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와 법정공휴일 다음날로 한다. 관람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다.

 

 

 

 

 

가는 법

 

 전철 1호선 부천역 15, 16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5분 정도, 승용차는 내비게이션 “경기 부천시 성주로 214번길 61” 혹은 "심곡본동 566-9”나 ‘펄벅기념관’을 치고 가면 된다. (전화 032-668-7565) 

 

<지도 참조>

 

 

 

 

<추가 사진 모음>

 

 

 

▲ 시반사우(詩伴四友)

좌로부터 향산 유화웅, 부암 이충섭, 성포 최복현, 혜강 남상학

 

 

 

 

 

 

 

 

 

 

 탐방을 마친 우리는 소래산 입구에 있는  <만의골보리밥>집에서 도미구이로 차려낸 점심을 성포로부터 대접받고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성포의 따뜻한 사랑에 감사하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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