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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경남 화림동 계곡에서 만나는 고색창연한 정자들

by 혜강(惠江) 2017. 8. 31.

 

경남 함양

화림동 계곡에서 만나는 고색창연한 정자 

-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

 

·사진 남상학

 

 

 

 

 

  경남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은 함양과 장수의 경계가 되는 육십령 고개 아래부터 시작되어 안의까지 이어지는 긴 계곡이다. 남덕유산에서 시작된 물길이 육십령 아래 함양군 서상면에서 남계천이 되어 서하면과 안의면을 차례로 지나 산청에서 경호강이 되었다가 진주로 흘러들며 비로소 남강이 된다. 간혹 안의계곡이라도 불리는 화림동 계곡은 물줄기 중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 일대를 이르는 이름이다.

    화림동(花林洞)이란 이름처럼 예전에는 꽃과 나무가 많았던 곳이지만, 현재는 바로 옆으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아름다움은 좀 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만하면서도 긴 계곡에는 아직도 멋진 바위들이 물길을 막아서고 또 곳곳에 울창한 숲이 버티고 있어 보기 드문 절경을 빚어내고 있다. 

    특히 화림동 계곡의 아름다움은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불리는 정자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팔담팔정은 여덟 개의 담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는 의미인데, 계곡을 따라 이렇듯 많은 정자가 지어진 것이 이 화림동 계곡의 아름다움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이렇게 세 개의 정자만이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남명 조식은 51세 때 이곳을 찾았으며, 66세 때도 찾았다. 남명은 덕산에 살면서 종종 함양을 찾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남명이 함양쪽으로 자주 발걸음을 옮긴 것은 빼어난 산수를 즐기고자 한 것도 있었겠지만, 방문해 주기를 바라는 벗과 제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명은 함양 선비 옥계(玉溪) 노진, 개암(介菴) 강익(姜翼) 등과
약속하고, 제자인 덕계 오건 각재 하항(河沆), 대소헌 조종도(趙宗道), 영무성 하응도(河應道), 조계 유종지(柳宗智), 모촌 이정(李瀞) 등과함께 종종 함양을 찾았다.



   남명이 옥계를 데리고서 우리들을 불렀네
   향그런 풀 돋아나 산 모습 아름다운데 
   읊조리는 사람들이 탄 말머리 가지런하네,
   월연(月淵)에 물 불어 발 씻기 좋고, 
   용간(龍澗) 시냇물 시 짓게 만드네.
   봄 경치는 가는 곳마다 즐거워
   그 마음 산새소리에 실어 보낸다.



  이 시는 1552년 남명이 덕계와 함께 함양을 찾았을 때, 개암 강익이 지은 시이다. 이 시를 지은 강익은 20세때 남명 선생의 학문과 인격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부친의 병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32세 때 남명 선생을 찾아 배운 제자이다. 개암이 남명이 함양 선비 옥계 노진과 자신을 찾아온 것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시를 지은 것이다. 이렇듯 화림동계곡은 많은 선비들이 빼어난 산수를 즐기고자 찾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거연정(居然亭)


   거연정은 1872년 진사 전재학과 전민진 등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그리 연륜이 깊은 정자는 아니지만, 화림동 계곡과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거연정의 특징은 계곡 변에 자리하지 않고 계곡 안으로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물줄기가 이곳에 와서 계곡 중앙의 큰 바위에 막혀 둘로 갈라지는데, 거연정은 그 계곡 가운데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정자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래서 누각에 올라 주변 계곡의 풍치를 바라보는 것보다 그 아래 다리 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거연정의 풍치를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더 운치 있다. 

   거연정으로 가려면 화림교(花林橋)라는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한다. 이 다리는 아치형의 운치 있는 형태를 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쇠로 만든 것이어서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군자정(君子亭)

   

   거연정 100m 아래 계곡에는 조선 성종 때 대학자 정여창을 추모하기 위해 1802년에 세운 군자정이란 정자가 있다. 선비들이 계곡을 끼고 앉아 시문을 주고받았음 직한 군자정은 물가 너럭바위 위에 사뿐히 올라앉아 있는 조촐한 누각으로, 거연정의 풍류를 관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군자정도 계곡을 내려다보는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당시는 상당히 명당자리로 보였으나 거연정만큼 아기자기한 맛은 없고, 소박하면서도 단출한 모습이다. 거연정에 비해서 관리가 덜 된 것 같고 많이 퇴락된 느낌이다. 

   더구나 애석하게도 군자정보다 ‘군자가든’이라는 민박을 겸한 음식점 건물이 훨씬 커서 군자정이 마치 음식점의 부속물처럼 보인다. 터 자체도 그리 볼품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계곡 한가운데로 진출한 거연정에 비해 눈길을 끌지 못한다.

 

 


동호정(東湖亭)


   동호정은 군자정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동호정은 거친 듯하면서도 활달한 이미지의 정자로 화림동계곡을 대표하는 두 정자 거연정과 농월정의 중간에 있다. 1890년에 건립된 정자로 그리 오래된 편은 아니다.

  동호정의 특색은 동호정의 기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말린 통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해, 비틀어진 흔적과 나무의 옹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2층 정자로 오르는 계단 역시 통나무에 도끼질 몇 번으로 요철을 만들어 그대로 기대어 놓아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다.정자를 만든 사람의 여유와 배포가 그대로 전해져 보는 이로 하여금 살며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바로 앞 계곡에는 넓은 너럭바위(차일암)가 있다. 이삼백 명은 족히 앉아서 쉴 수 있는 크기로 보는 이의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동호정에 오르거나 또 차일암에 앉아 이 차일암을 감고 도는 화림동 물줄기가 휘도는 계곡을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다.

   그런데 최근 너럭바위를 건너 징검다리를 이용하여 맞은편 산기슭을 따라 목제로 계단과 발판을 만든 긴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반대편에서 동호정을 바라볼 수 있게 꾸며놓았다. 계곡을 내려다보며 이 목제 산책길을 걷는 것 또한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그래서 전망으로 보면 거연정이 있는 주변 경관보다 훨씬 수려하다.    

 

 

 

 

농월정(弄月亭)

 

 

- 불타기 전 농월정의 모습 -

  


   다음으로 화림동에서 가장 풍광이 뛰어나다는 농월정을 찾아갔다. 2003년에 어느 방화범의 소행으로 소실되어 불에 탄 농월정의 잔해를 보고 가슴 아파한 기억이 새롭다. 만약 그대로 있었다면 그 위치나 형태면에서 가히 화림동 정자권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요즘 지방 자치단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거금을 투자하여 문화재를 복원하는 추세에 발맞춰 혹시 복원하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도착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검게 탄 흙만이 그대로 보였다.  간판만 덩그렇게 서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몇 년째 복원이 되지 않는 이유를 인근 주민에게 물었더니 땅 주인과 군이 아직 보상협의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농월정에 필요한 50평 정도가 여러 명의 소유로 분산돼 있어 각자의 비위를 맞추기가 그리 쉽겠느냐고 반문했다. 농월정이 이처럼 빈터가 된 걸 알면 맨 처음 정자를 지은 지족당 박명부 선생께서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져버릴 것 같다.
  
    본래 이층누각이었던 농월정은 선조 때의 학자이자 의병활동가였던 지족당 박명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후 1637년에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1천여 평은 됨직한 너럭바위 위에 그림같이 올라앉아 '달을 희롱하며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농월정이 있던 오른쪽 너럭바위에는 웅혼하고 유려한 글씨체로 ‘지족당이 지팡이 짚고 신을 끌던 곳’이라는 뜻의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之所)라는 글씨가 깊게 새겨져 있다. 장구란 지팡이와 신을 뜻하는 말로 산책을 의미한다. 화림동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달과 교감하는 이곳에 남명 조식 선생이 시 한 수 남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푸른 봉우리 우뚝 솟고 물은 쪽빛인데
     숨은 명승 많이 취해도 탐욕은 아니리
     이 잡으며 어찌 굳이 세상사를 말하리
     산수를 이야기해도 할 말이 많을 텐데

  산청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살던 남명 조식 선생은 51세 되던 해 여름에 제자들과 함께 화림동 계곡의 월연암을 찾아 시 한 수를 남겼다. 이나 잡고 사는 옹색한 처지이나 산천초목을 벗 삼아 명리를 버리고 은거하는 자신의 삶을 노래한 것이다.

 

  뒤편은 소나무가 울창한 산자락이고, 앞은 너른 반석이 펼쳐져 있는 계곡이다. 이 넓은 반석이 '달빛이 비추는 바위'라는 뜻의 월연암(月淵岩)인데, 자그마한 철다리를 통해 물을 건너야 밟아볼 수 있다. 수백 명이 앉아 탁족을 즐겨도 부족함이 없는 월연암에는 이름 모를 시인이 쓴 시와 이름 석 자가 곳곳에 새겨져 시집 속을 유람하는 느낌이다.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란 반석이 펼쳐져 있고, 반석 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면 ‘농월정’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는 듯했으리라. 그러나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 위 냇물에 비친 달빛을 한 잔의 술로 희롱한다'던 옛 풍류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주인을 잃은 터전엔 너럭바위만이 남아 그 곁으로 기세 좋게 물줄기를 쏟아낸다. 그 물줄기는 보는 이의 답답한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농월정의 유명세를 타고 1993년부터 농월정 부근에 관광 편의시설들이 조성되어 야영, 민박 등 숙식에는 불편함이 없는 터에 하루 바삐 농월정이 복원될 날을 기대해 본다.


* 자가운전 *

 

 경부고속도로 와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무주나들목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만나는 19번국도(30번 국도와 접도)에서 무주리조트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19번 국도를 달리다가 적상 삼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19번 국도를 달린다. 이 19번 국도를 계속 달리다가 장계 면소재지 초입 장계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6번 국도를 탄다.  26번 국도를 타고 육십령을 넘으면 함양이며, 서상, 서하, 안의까지 이어지는 길이 화림동계곡과 나란히 달린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궁내동 톨게이트에서 화림동계곡의 농월정까지는 약 3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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