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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서울 중구 '남산골', 언덕 구석마다 문화 향기가 그득

by 혜강(惠江) 2017. 3. 29.

 

서울 중구 '남산골'

 

남산의 넉넉한 품 안에서 피어난 동네

 

언덕 구석마다 문화 향기가 그득

 

노은주·임형남(가온건축 대표)

 

중구 '남산골' /그림=임형남

 

 

  남산은 하늘이 서울에 내린 축복이다. 서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산이라 어디를 가건 쉽게 볼 수 있다. 방향에 따라 잘 깎아놓은 삼각형 같기도 하고 굼실굼실 기어가는 누에 같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현대의 도시에서 한결같은 표정으로 같은 자리에 있는 '기댈 언덕' 남산은 두툼한 녹색 품으로 우리를 무척 푸근하게 안아준다.

  남산을 삥 둘러 많은 사람이 기대어 살고 있다. 미쭉하고 빤드르르한 집들이 언덕을 올라타고 있는 한남동 이태원으로부터, 초록색 실몽당이처럼 군데군데 빈 땅이 더 많아 한적한 느낌이 드는 용산, 굴곡진 길들을 따라 집들이 그득그득 들어차 있는 후암동, 해방촌 등등 무척이나 많은 동네와 집들이 어미 배에 매달려 있는 강아지들처럼 모여 있다.

  예장동, 필동, 남산동 등 남산골이라 불리는 동네도 남산의 넉넉한 품안에 피어난 동네다. 남산 북사면에서 서울의 중심으로 흘러내릴 듯한 지형에 모여 있는 이 동네를 조선시대에는 남촌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남산골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이야 남산이 서울의 한중심이지만, 예전에는 서울의 지리적 경계는 사대문 안쪽까지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남산골은 궁궐과 먼 변두리였다. 궁궐과 가까운 북촌에는 권세가 높고 돈이 많은 세도가들이 살았고, 궁궐과 멀었던 남산골에는 자존심은 강하지만 재산도 별로 없고 벼슬도 낮거나 아예 없는 '취준생'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그래서 남산골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대표적인 말이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는 속담과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이다.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는 속담은 일생 매달려 공부를 해도 벼슬길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한 남산골샌님이,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기존의 벼슬아치들이 쫓겨나고 그 기회에 벼슬자리나 하나 얻을 수 있지 않나 하며 바란다는 뜻이란다. 말하자면 가망도 없는 일이 성사되길 바라며 터무니없는 요행수를 꿈꾼다는 의미이다.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은 가진 것은 없으며 자존심만 강한 남산골샌님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희승 선생이 쓰신 '딸깍발이'라는 수필에 그 연유가 잘 나와 있다. "'딸깍발이'란 것은 '남산골샌님'의 별명이다. 왜 그런 별호(別號)가 생겼느냐 하면, 남산골샌님은 지나 마르나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혀서 딸깍딸깍 소리가 유난하였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이 지은 소설 '허생전'에서 주인공 허생이 부인의 구박 속에서도 꿋꿋이 7년 동안 공부했던 장소가 바로 남산골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남산골에 살았던 샌님들은 무척 독특하고 고지식하지만 밉지 않은 캐릭터를 가진 이들이었던 모양이다.

  남산골은 일본이 조선을 억누르며 제일 먼저 개조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현저동으로 쫓아내고, 산 중턱까지 무지막지한 1자 계단을 설치하고는 그 끄트머리에 '조선신궁'이라는 일본식 사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산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을 만든다. 이후 명동, 충무로는 일본인들의 본거지가 되어 그들이 끌고 다니는 게다(下�) 소리가 요란했을 것이다.

  이후 해방이 되며 남산골은 빠르게 변모한다. 국가기관이 들어오고 학교들이 들어오며 또 다른 풍경이 만들어졌다. 서울예술전문학교 등의 교육기관들과 수도방위사령부, 중앙정보부 등의 정부기관들이 군데군데 들어섰으며, 서울 시민들을 위해 케이블카가 설치되고 남산타워와 야외음악당, 어린이회관 등이 지어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군부대도 떠나고 남산 1호 터널 근처에 있었던 중앙정보부도 떠난다. 그리고 그곳들은 이제 문화적인 장소로 치환되고 있다. 마치 아린 상처를 덮고 치유하는 연고처럼 문화는 남산의 상처를 덮어주고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남산골의 풍경은 큰 차이가 없다. 그 안의 내용들이 바뀌었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야트막한 건물들이 있는 풍경은, 그 밀도는 여전하다. 그래서 나는 간혹 특별한 일도 없이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내려 남산길을 터덜거리며 걸어 올라가기도 하고 중간중간 트여 있는 작은 골목들을 뒤지고 다니기도 한다. 그 길은 무척 가파르지만 동네 풍경을 보는 재미와, 시점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남산을 보는 맛이 아주 좋다.

  그 한가운데에 예장동이 있다. 예장동은 동네의 80퍼센트 정도가 산이다. 나머지 20퍼센트 안에 예전에는 서울예전, 숭의여고, 리라초등학교, 중앙정보부, 그리고 KBS 방송국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유스호스텔이 되었고 서울예술전문학교 자리도 학교는 떠나고 극장과 교육원이 되었다.

 

  나는 남산길로 접어들어 KBS가 여의도로 떠난 자리에 들어선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 자주 간다. 그 안에는 나의 낙원이 있기 때문이다. '만화의 집'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건물인데, 그곳에 가면 아무런 제약 없이 온종일 만화를 볼 수 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어린이들의 꿈은 온종일 아무 간섭 없이 만화를 보는 일일 것이다. 만화의 집에는 만화책이 칸칸이 그득 실려 있다. 그곳에서 한나절 머물며 어릴 때의 꿈을 이룬다. 한참 만화를 보다가 길가에 내놓은 벤치에 앉아 마치 동네 어귀에 세워 놓은 장승처럼 멀뚱하게 서있는 로봇 태권V 모형과 더불어 남산을 바라보거나, 한적한 길을 거닐기도 한다.

  추위가 가시고 찾아올 볕이 좋은 어느 봄날, 이제는 남산골샌님들의 딸깍거리는 나막신 소리도 사라지고 일본인의 게다 소리도 사라지고 군화 소리도 사라진 위로 문화라는 포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남산과 눈을 가늘게 뜨고 마주보며 해바라기를 하고 싶다.

 



[출처] 2016. 1, 21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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