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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춘천의 진산 봉의산, 그곳엔 항쟁의 역사와 시향(詩香)이 가득

by 혜강(惠江) 2017. 2. 20.

 

춘천의 진산 봉의산


그곳엔 항쟁의 역사와 시향(詩香)이 가득

 

 

글 · 사진 남상학

 

 

 

▲봉의산

 

 

  시내를 품고 있는 봉의산(鳳儀山)은 높이 350m의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춘천의 진산(鎭山)이다. 이 산 이름  ‘봉의(鳳儀)’는 태평의 상징인 봉황의 몸가짐을 의미한다. 춘천분지에 연꽃봉오리의 꽃술처럼 자리 잡은 봉의산은 남쪽에 진병산, 서남쪽에 삼악산, 서북쪽에 화악산, 북쪽에 용화산, 그리고 동쪽에 대룡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뒤편으로 소양강을 흘려보내고 화천 쪽의 북한강 물을 받아 의암호수를 이루면서 우두평야의 곡창지대를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봉의산은 춘천분지의 꽃봉오리에 비유되기도 하고 봉황이 춘천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양쪽 날개를 퍼득이는 형상이다. 한편, 전략상으로 중요한 지점으로 시대마다 춘천 북쪽의 방벽이 되어왔다.  

   현재, 산 남쪽에는 강원도 도청이 있고 동남쪽에는 한림대학교가 있다. 북쪽에는 소양강이 흐른다. 오늘날에는 춘천시의 중심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시가지(부)에서 1리가 된다고 했다. 이때는 봉산(鳳山)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봉산의 이름에서 유래, 춘천을 봉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석기시대 혈거유적이 동남쪽에 있고 봉의산성 아래에 있는 봉의산 샘은 춘천시민들의 약수가 되고 있다. 봉의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KBS, MBC 송신탑이 세워져 있다. 또 봉의산에는 각종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새벽마다 시민들의 등산코스로 주목을 받는다.

  춘천 시내 봉의산을 오르기 위해  봉의산 북쪽에 있는 소양 1교 남단 사거리에서 주택가로 들어섰다. 왼쪽으로 송덕비군(頌德碑群)이 보인다.  그 옆을 끼고 5분 정도 가파른 비탈에 오르면 소양정에 닿는다. 소양정은 삼국시대부터 약 1,500년간 존재해 온 우리나라 최고의 정자라고 한다. 향교의 문루로 사용되었던 춘천의 장수루와 함께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찾아와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봉의산 남쪽 입구에 세운 안내도 

 

 

봉의산 입구의 송덕비군(頌德碑群)

 

 

많은 시액이 걸려있는 소양정(昭陽亭)

 

 

소양강 변에 있을 때의 예전 소양정 모습(춘천문화원 제공)

 

산기슭으로 옮긴 지금의 소양정

 

소양정에는 많은 시액들이 걸려있다.  

 


   춘천시 소양로1가 봉의산 기슭에 있는 소양정은 소양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에 세워져 1,500여년의 역사가 서린 소양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추정된다. 산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요산요수의 지형 덕에 ‘이요루(二樂樓)’라고도 불렸다. 소양정의 구조는 정면 4칸, 측면 2칸, 중층 누각 주심포집 팔작지붕이다.

  소양정은 본래 지금의 위치보다 강 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소양1교 부근에 있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인 1605년(선조 38)에 홍수로 유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부사(府使) 유희담이 다시 건축하였고 1647년(인조 25)에는 부사 엄황(嚴滉)이 중수하면서 정자 동쪽에 선몽당(仙夢堂)이라는 부속건물을 세웠으나 1777년(정조 1)에 홍수로 또다시 유실되었다. 1780년 부사 이동형(李東馨)이 재건하였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타 1966년 옛 터에서 위로 올려 현 위치인 봉의산 기슭에 중층 누각으로 재건하였다.

  2층 누정에 오르니 우거진 숲 사이로 소양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정자에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소양정에서 보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짐작이 간다. 수암 이근구의 소양정의 한글 현판 시조 <소양정에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요루 천년 세월/ 개축 몇 번 개명 한 번 
   겹처마 팔작지붕/ 봉황으로 앉아서     
   발끝에 산하를 펼쳐/ 푸른 춘천 바라본다.

   망루에 올라보니/ 거울 같은 두물머리    
   소양강 북한강이/ 반갑게 손을 잡고 
   산들도 어깨를 겯고/ 우쭐 우쭐 춤춘다.

   세월은 강을 막아/ 호반 봄내 이루고 
   철새는 떼를 지어/ 호수위에 시를 쓰니    
   황혼의 저녁노을이/ 봉의산을 빗질한다.

 

 

 

  주변에는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던 고려의 유신(儒臣)인 원천석(1330~ ?)을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 삼연 김창흡, 석천 임억령, 도암 이재, 구당 박장원, 손재 조재호, 죽창 구용, 하은 신집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시액이 가득하다.   다음으로 시선이 닿은 것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고려의 유신(儒臣)인 운곡 원천석(元天錫), 1330~ ?)의 <春州 昭陽亭>(춘주 소양정)이었다.

 

   소양강가 누각 다시 찾아오니     
   다락 가득한 봄빛 더욱 풍류스럽네.     
   구름과 안개 꽃과 달 한가롭게 읊는 곳     
   얽히고설킨 나그네 시름 풀어보네.

   重到佋陽江上樓(중도소양강상루)
   滿樓春色更風流(만루춘색갱풍류)
   雲烟花月閑吟處(수수한화격안개)
   消遣縈盈客裏愁(소견영영객리수)

 

 


   

   원천석은 “흥망이 유수하니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는 시조로 유명하다. 고려가 멸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다. 태종이 간곡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다음으로 다산 정약용의 시 ‘昭陽亭懷古’(소양정회고, 소양정에서 옛일을 회상하다)에 시선이 갔다.  

   어부가 수원을 찾아 동천으로 들어가니, 
   붉은 누각이 소양정을 가리네 
   궁씨와 유씨의 할거(요새)는 자취도 없어졌고, 
   진한과 맥국의 싸움은 끝내 가련하구나
   우수산 옛 들판엔 봄풀이 아스라하고, 
   인제에서 흘러내린 물엔 낙화는 곱구나
   속세의 먼지 털어 무슨 소용, 
   강버들 석양에 물드는데 홀로 닻줄 푸는구나.
   
    漁子尋源入洞天(어자심원입동천)  
    朱樓飛出幔亭前(주루비출만정전)
    弓劉割據渾無跡(궁유할거혼무적)  
    韓貊交爭竟可憐(한맥교쟁경가련)
    牛首古田春草遠(우수고전춘초원)
    麟蹄流水落花姸(인제류수락화연)
    紗籠袖拂嗟何補(사롱수불차하보)
    汀柳斜陽獨解船(정류사양독해선)

 

 

 

   정약용은 춘천에 와서 소양정의 봉의산 앞에 우뚝 섰다. 만정봉(幔亭峰)은 중국 무이산에 있는 봉우리로 봉의산을 뜻한다. 정약용은 예전 춘천 땅에 낙랑과 대방이 있었다고 보았는데, 시에 나오는 유무(劉茂)와 궁준(弓遵)은 그곳의 태수였다. 이들은 북으로는 맥(貊), 남으로는 진한(辰韓)과 경계를 두고 싸웠다고 생각했다. 지금 춘천에 오니 옛 터에 봄풀만이 우거지고 강물엔 꽃잎이 떠서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시간의 덧없음에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다음은 영조 때의 문신이었던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昭陽亭>(소양정)이다. 

           

   정월에 소양정에 올라서 
   석옹(石翁)의 뒤를 이어 적어본다 
   멀리 마을에 연기 오르는데 한사람 떠나가고 
   해지는 모래사장 차가운데 한 쌍의 새는 울어댄다 
   산에 눈 내리고 강은 얼어 말할 수 없이 깨끗해 
   하늘 높고 땅은 아득하니 모두가 분명하다 
   늦봄이 올봄보다 낫다고 하지 말게나 
   참맛은 담박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正月昭陽亭上行(정월소양정상행) 
       石翁之後敢容評(석옹지후감용평) 
       遙村烟闊一人去(요촌연활일인거) 
       落日沙寒雙鶴鳴(낙일사한쌍학명) 
       山雪江氷更淸絶(산설강빙갱청절) 
       天高地逈覺分明(천고지형각분명) 
       休言春晩勝春早(휴언춘만승춘조) 
       眞味方從淡處生(진미방종담처생) 

 

  

   

   이재는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용인의 한천(寒泉)에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으며,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하는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서, 당시 정국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시액 외에도 매월당 김시습, 삼연 김창흡, 석천 임억령, 구당 박장원, 하은 신집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와 묵객들의 작품과 또 지암 성운경, 해관 홍종대 등 근현대에 활동한 지역 학자들의 한시들이 저마다 소양강을 두고 재주를 겨루듯 걸려 있다. 모두 지금의 자리가 아닌, 소양강가에 있을 때가 더욱 운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시를 감상하고 수양정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피니 수양정 옆에 퇴색한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춘천의 절기(節妓) 전계심(全桂心)의 묘비


  이 비석은 바로 춘천의 절기였던 전계심의 묘비다. 이 비석은 춘천에서 태어난 관기(관청에 딸려 가무, 기악 하던 기생) 전계심의 묘 앞에 있던 비석이다. 오랫동안 풍우한설로 훼손되어 초라하다.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세웠다.

  전계심은 조선 정조 때 천가에서 태어나 어려서 기생이 되었다. 천성이 청결하고 유정한 그녀는 천박하지 않고 아름다운 용모와 단정한 행동으로 눈독을 들이는 관속들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17세가 되던 해 춘천부사 김처인의 소실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부사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데리고 갈 처지가 되지 못하여 기회를 보아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다. 그러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사또의 덕에 호강을 한번 누려보려던 그녀의 어머니는 실망한 나머지 딸을 서울의 기방으로 팔아넘겼다. 


   계심은 어쩔 수 없이 기방으로 갔으나 이미 부사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기에 부사가 자기를 찾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사랑하는 낭군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지냈다. 하지만 기생으로서 남의 눈에 띠지 않으려고 조심하면 할수록 한양의 한량이나 불량배들이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질 않았다. 권력으로 돈으로 계심을 소유해보려고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계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자 어느 날 불량배 몇 놈이 들이닥쳐 계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폭력으로 야욕을 채우고 달아났다. 그녀는 찢어진 옷 더럽혀진 몸을 보고 한없이 울었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애까지 유산 되자 그녀는 사랑했던 사람에게 애절한 사연을 남기고 은장도로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계심이 자결하던 날 계심이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가보니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어 부사는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 봉의산 기슭에 장사를 지내주었다. 계심의 순절담은 곧 강원순찰사에게까지 알려져 순찰사는 열녀정문旌門을 세워주었고, 이 내려지게 되었고, 1796년에 그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 춘천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春川桂心殉節之墳’(춘천계심순절지분)이라는 흔히 볼 수 없는 기생의 묘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분묘는 본래 봉의 산록 소양강 변에 있었으나 도로가 개설되면서 소실되고 비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7년 이곳 소양정 근처로 옮겼다. 이 비석은 그녀의 애틋하고 절개 있던 마음을  가슴 속에 되새겨 볼 수 있는 향토의 유적이다.

  계심의 아름다운 정절은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의 신소설 ‘귀의 성’ 소재가 되었고, 제1회 춘천개나리 문화축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춘천시내 접객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렸던 일이 있었으니까 계심은 죽어서 영원을 살게 된 여인임이 분명하다.

 

 

▲전계심 묘비

 

▲춘천 절기 전계심의 묘비와 안내판

 

항쟁의 역사유적, 봉의산성



  7부 능선에 오르니 여기저기 돌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알고 보니 봉의산성으로, 봉의산도 과거 외적의 침입으로 항쟁한 자취가 남아 있었다. 봉의산 중턱 서남편 샘터 위쪽 10여m 되는 지점에서부터 봉의산고성(鳳儀山古城)의 잔존형태가 이어진다. 산의 지형이 매우 가파르고 험준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에 좋은 자연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성곽이 위치할 조건은 갖추었다고 하겠으나, 성안의 평지면적이 좁으며 식수(食水)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장기전에는 어려운 결점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봉의산고성의 둘레가 2,463척, 높이 10척이라고 했다. 460여 년 전의 봉의산성의 형태이다. 강원도가 발행한 「강원향토문화기본자료」에는 지금 11개소에 석축 길이 196m, 높이 2∼6m가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 무렵에 보존된 봉의산성의 모습이다. 지금은 산성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성벽의 길이 약 1,240m. 강원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에 속하며 성벽의 길이는 약 1,240m이다. 많이 무너진 상태이지만 축성법을 살피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성벽은 높이가 6m가량이나 되며, 성석의 크기는 20∼25㎝×50㎝ 정도의 길쭉한 모양의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줄여나가는 물림 쌓기 기법으로 쌓았다. 이와 같은 축성수법은 전체적인 것은 아니며, 일부는 토성(土城) 흔적만 남은 곳도 있다.

  이 산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문무왕 13년(673), 수양주(首壤州)에 주양성(走壤城)을 축조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주양성’이 지금의 봉의산성이 확실하다고 보면 이것이 이 성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될 것이지만 그러한 확증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거란 및 몽골과 전쟁을 겪는 동안 이 산성에서 수차례나 전쟁을 치른 격전지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에는 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봉의산성은 삼국시대, 통일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춘천지방으로 침입했던 외적에 대항, 항전했던 역사적 현장이다. 춘천 주민이 향토를 수호하던 의지가 깃들어 있는 유적이다. 거란유족의 침입, 몽골족의 침입 이후 왜구(倭寇)의 출몰을 막던 기지였고, 조선왕조 말, 왜놈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자 의병봉기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성채이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곽은 6·25동란 때의 격전지이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봉의산성은 외적(外敵)에 대한 항전장(抗戰場)으로서 역사적인 유적이다. 성안에는 여러 군데에 건물지가 있고 1954년에 창건된 봉의사가 있다.

 

 

▲시대에 따라 항전의 역사를 지닌 봉의산성

 

 

충원사(忠圓寺)로 개칭한 봉의사


  봉의산 서쪽 중턱에는 현재 충원사라는 자그마한 사찰이 있고, 입구 오른쪽에는 충원사 연혁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현판에는 “현재의 봉의사(鳳儀寺)는 신라시대 충원사의 암자(庵子)였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가 있는 근화동으로부터 봉의산 서편일대가 옛날 충원사의 사지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 또한 사기(寺記)에 의하면 1954년 권매월(權梅月) 스님이 암자를 창건하고 봉의사라고 하였고, 그 후 선사당과 종각을 개축하였고, 1995년부터 대웅전(大雄殿), 충월당, 충월선원을 건축하면서 옛 충원사의 명맥을 유지하자는 뜻에서 봉의사(鳳儀寺)를 충원사로 개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충원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 충원사의 암자로서 처음에는 '봉의사(鳳儀寺)'라 하였으나, 1954년 금강산 유정사의 승려 권매월이 암자를 중창하면서 '봉시사'로 바꾸었다. 1988년 승려 성월(惺月)이 부임한 뒤, 선사당(禪寺堂)과 종각을 개축하고 대웅전과 충월당(沖月堂), 충월선원(沖月禪圓)을 증축하였다. 대웅전 증축과 함께 진입로 108계단을 축조하면서 옛 충원사의 명맥을 복원한다는 의미로 사찰 명을 충원사로 바꾸었다.

  옛 충원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1632년(인조) 이곳 현감을 지낸 유정립이 낙향하여 현 소양로 2가 ‘춘천7층석탑(보물 제77호)’이 있는 곳에서 집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고 쓰여진 그릇을 발견한 뒤부터, 탑 부근을 충원사지로 추정하게 되었다.  <고려사>에는 춘천 근화동 당간지주(보물 제76호)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부터 봉의산 서쪽 편 일대가 옛 충원사 터라고 기록되어 있다.(두산백과 참조)

 

 

▲한때 봉의사였던 충원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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