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김화 '백전 전투' 현장
잣나무 울창한 숲은 사라졌지만, 병자호란 때 승전한 역사가 이곳에
글=이한수 기자
- 겸재 정선이 그린 ‘화강백전’(왼쪽). 그림 속 잣나무 숲 뒤쪽에 유림 장군이 군대를 주둔했다. 유림 진지 추정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청군과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여겨지는 너른 논밭이 펼쳐진다. /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김화(金化)는 강원도에 있다. 당초 군(郡)이었다. 광복 직후 북녘땅이었다가 수복했다. 6·25전쟁 격전지 '철의 삼각지대'는 김화·철원·평강 지역을 말한다. 일부 지역을 수복한 김화는 1963년 철원에 통합됐다. 현 김화 북쪽은 민통선과 북한 김화군 지역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금강산 가는 길에 이곳에 들렀다. 270년 전 그림이 남아 있다. 1747년 그린 '화강백전(花江栢田)'이다. 김화를 휘도는 강물 화강은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흐른다. 예전엔 김화의 별칭(別稱)으로도 불렸다. 백전은 잣나무밭이다. '화강백전'은 '김화 잣나무밭'이란 뜻. 그림 왼쪽 아래 작은 집 위로 잣나무가 빽빽하다. 절경(絶景)이랄 수는 없다. 지금도 관광지는 아니다. 정선은 이곳을 왜 그렸을까.
11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380년 전 이때쯤이다. 1637년 음력 1월 28일 이곳 '화강백전'에서 조선군은 청나라 팔기군에 맞서 전투를 벌여 승전했다. 수원(용인) 광교산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 2대 승전으로 평가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치욕의 기억이 원체 강렬한 까닭이다. 전투 이틀 후(1월 30일) 조선 임금(인조)은 47일간 머물던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서 무릎 꿇어 세 차례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바닥에 조아렸다.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항복 의식이다. 서울 잠실 인근 삼전도(三田渡)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난 3일 전투 현장을 찾았다. 논문 '병자호란 김화 백전전투 고찰'(2015)을 쓴 권순진 국방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팀장에게 자문했다. 현재 김화읍 생창길에 있는 충렬사(忠烈祠) 일대를 전장(戰場)으로 비정했다.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는 군 검문소 앞까지 가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보초를 서던 군인이 화들짝 놀라 뛰쳐나왔다. 자동차가 더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 충렬사가 있다. 주차장에는 눈이 쌓여 있다. 사당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 강원도 철원 김화에 있는 충렬사. 병자호란 때 청군과 백전전투를 벌인 홍명구와 유림을 모신 사당이다. 왼쪽 전각에는 홍명구 충렬비와 유림 대첩비가 있다. 전각 뒤쪽 길로 오르면 유림이 진을 쳤다는 백수봉 추정지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잣나무는 사라졌다. 몸통 가는 잡목들만 헐벗은 채 서 있다. 그림 속 울창한 숲을 이룬 잣나무가 이제껏 있었다면 적어도 수령 400년은 넘었을 것이다.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6·25전쟁 중 다 타버렸을까?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柳琳·1581~1643)은 잣나무 무성한 언덕에 군사 5000명을 지휘하며 진을 쳤다. 잣나무가 많아 백수봉(栢樹峰)이라 불린 높이 238m 야산이다. 충렬사를 바라보고 왼쪽 길로 올라가면 높지 않은 야산이 나타난다. 권순진 팀장은 이곳을 유림의 진지로 추정했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洪命耉·1596 ~1637)가 이끈 3000명 병사는 현 충렬사 앞쪽 평지에 군사를 세웠다. 유림은 "지세가 낮아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우니 높은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홍명구는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홍명구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권 팀장은 "높은 곳에 진을 치면 청군이 공격해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병력을 분산시킨다는 전략을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 했다.
- 충렬사 사당 옆 전각에는 홍명구 충렬비와 유림 대첩비가 모셔져 있다./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실제로 청나라 13만 대군은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해 곧바로 서울로 내리닫았다. 평안도를 지키는 문신과 무신인 홍명구와 유림이 군사를 이끌고 청군을 쫓아 김화까지 내려온 까닭이다. 1월 28일 새벽 전투는 시작됐다. 조선군과 청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평지에 진을 친 홍명구는 전사했다. 유림 군대는 잣나무 숲 언덕에서 적을 향해 포를 쏘았다. 청군은 조선군 진지를 향해 거듭 진격했다.
조선군은 그때마다 적을 모두 죽여 시체가 성책(城柵)에 가득히 쌓였다 한다. "아군은 굽어보고 저들은 우러러보는 지형에서 잣나무 숲이 빽빽하여 오랑캐 기병들이 돌격할 수 없었고 적이 쏜 화살도 대부분 나무에 맞아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다"(남구만 '약천집') 한다. "이 싸움에서 적병은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적은 그 시체를 모두 거두어 태웠는데 3일이 걸린 뒤에야 끝내고 돌아갔다"(박태보 '정재집') 한다. 유림은 전투 승리 후 밤을 틈타 남한산성을 향해 군대를 이동했다. 그러나 이틀 후 임금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충렬사는 홍명구와 유림을 모신 사당이다. 당초에는 순국한 홍명구의 사당이었다가 1940년 지역민들이 유림을 함께 모셨다. 현재 사당 터는 홍명구가 전사한 곳이라 한다. 6·25전쟁 때 불타 사라진 것을 복원했다. 사당 옆 전각에는 홍명구 충렬비와 유림 대첩비가 모셔져 있다.
'화강백전' 그린 뜻을 생각한다.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장렬하게 순국한 넋을 기리기 위해 이 성스러운 옛 전쟁터를 화폭에 담은 것"(최완수)이다. 지금은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쓸쓸한 공간이다. 권순진 팀장은 "전투 지역을 정밀 조사하고 호국의 역사 현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충렬사 김화읍에서 43번국도 생창리 방향. 군 검문소 앞에서 왼쪽 길로 간다. 김화읍 읍내리 630(생창길 603).
*쉬리영양해물칼국수 강원도 내륙에서 해물칼국수가 맛있을 까닭이 없다는 편견을 버리게 해준다. 시금치를 섞은 녹색 면과 단호박을 넣은 노란색 면이 쫄깃하다. 바지락·굴 외에 특이하게도 미역을 넣었다. 국물이 시원하다. 1인분 6000원(2인 이상). 김화우체국 건너편. (033)458-0082
<출처> 2017. 2. 9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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