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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발칸반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by 혜강(惠江) 2016. 4. 25.

발칸여행(02)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전쟁의 상처 베오그라드는 아직도 복구 중

 

 

 

 ·사진 남상학

 

 

 

 

 

  

  발칸반도 여행의 첫 출발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북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서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남서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남쪽으로는 마케도니아, 동쪽으로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경계를 이룬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공격으로 세르비아는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결국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 것이다. 그 후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고, 1946년 이후 40년 동안 구소련의 연방국가로 유지되다가 1991년 슬로베니아가 독립한 후,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해체되었고,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함께 신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구성했으나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면서 세르비아는 베오그라드를 수도로 삼았다.

 

  우리가 첫발을 디딘 베오그라드 니콜라 테슬라 공항은 국제공항이지만 인천공항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이전 이름은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이었으나, 2006년 세르비아에서 태어난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변경됐다.

 

  일행은 공항에 대기한 전용 버스를 타고 12km 달려 수도 베오그라드로 중심지에 도착했다. '하얀 성'이라는 뜻을 가진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는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합류되는 곳에 있었다. 흰색의 건물들이 많아 붙였다고 하니, 베오그라드는 '흰 도시'라는 뜻이 분명하다. 이름에 걸맞게 건물이 흰색으로 치장된 곳이 많았다.

 

 

◆ 역사와 문화의 도시 중심에 파괴된 건물이 여럿 보였다. 

 

 

 

 

  그러나 낯선 도시 베오그라드는 웅장한 건물 사이사이로 파괴된 채 서 있는 건물들이 스쳐 갔다.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이라고 했다.

 

  나토는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1949년 체결된 집단방위체제였다. 회원국은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서독· 미국· 벨기에·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등이다. 미국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NATO는 창설 50주년 기념 정상회의에서 채택한 ‘신전략개념’(新戰略槪念, The Alice New Strategic Concept)에 의하여 대(對) 세르비아 공습의 명분을 확보하고, 유럽지역에서의 분쟁 발생 및 확산에 대처하기 위하여 적극 개입하면서 1999년 3월부터 사회주의를 표방한 유고슬라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주요 거점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였다. 국방부, 외무부 등 군사 관련 건물을 먼저 폭파한 나토는 나중에는 T.V방송국과 다리, 정유공장 등을 파괴했다.

 

  이전에도 베오그라드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시달렸다. 1521년 터키가 점령한 후 베오그라드는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터키 공격 목표지였다. 이후에 세르비아의 수도가 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베오그라드는 전쟁으로 시달린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나토의 폭격으로 부서진 건물을 16년 넘도록 그대로 남겨 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의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한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경제적으로 오려움을 겪는 세르비아이고 보면 건물 매입하여 건축할 사람이 없어서라는 말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 보헤미아인들이 많이 모이는 문화의 거리 스카다리야

 

 

 

 

 

   버스에서 내려 베오그라드 여행은 보헤미아인들이 많이 모이는 문화의 거리 스카다리야를 걷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크네즈 미하일로 거리가 베오그라드 중심의 번화가라면, 스카다리야는 돌을 깔아 울퉁불퉁한 길바닥에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아기자기한 골목길이다.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거리라 하여 '보헤미안'의 거리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자동차가 들어올 수 없는 보행자 전용거리다. 19세기 세르비아 시인, 화가, 음악가 등 유명 예술인들의 활동무대였다고 한다. 이 길을 걷자니 길가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모습의 주레 얍스타의 청동좌상이 보였다. 시인이자 극작가였으며 소설가였던 그는 야윈 얼굴에 남루한 옷을 걸친 모습이었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길에 무릎 부분이 반들거렸다.

 

  조금은 어수선한 듯한 골목길은 고급 레스토랑과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고 문화의 거리답게 알록달록한 벽화로 단장되어 있다. 레스토랑과 카페들도 자기 상점을 한껏 뽐내기 위해 이름답게 단장해 놓았다. 빅토르 위고 동상을 세운 것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우리네의 인사동이나 삼청동같이 화려하거나 사람이 많다거나 상점들로 빽빽한 곳은 아니지만 나름의 정취와 멋이 있다. 아름다운 이 거리의 모습을 보노라면 이 거리에서 총탄이, 혈흔이 난자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 베오그라드의 중심지 공화국 광장

 

 

 

 

 

 스카디리야 거리는 베오그라드의 중심인 공화국 광장으로 이어진다. 공화국 광장은 베오그라드 시민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장소로 미하일로 왕의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공화국 광장이란 이름은 1945년 11월 29일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의 공포를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광장에는 1867년 오스만튀르크의 오랜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하고 수도를 베오그라드로 옮긴 세르비아 왕국의 ‘크네즈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왕의 기마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공화국 광장 주변에는 국립박물관, 국립극장 등 문화시설들이 있다. 미하일로 왕의 동상 뒤편에 있는 국립박물관은 1844년 건축된 것으로 세르비아 공화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비잔틴 시대의 프레스코화를 비롯하여 카르파티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과 유고 화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고흐, 르누아르, 피카소 등의 명화들이 소장되어 있다.

  

 

◆ 베오그라드의 명동이라 하는 크네즈 마하일로 거리

 

 

 

 

 

 

 

  공화국 광장에서 남동쪽으로 뻗어있는 아름다운 거리다. 스카다리야가 아기자기한 예술가들의 거리라면 크네즈 미하릴로 거리는 베오그라드의 명동인 셈이다. 죽 뻗은 거리의 현대식 건물에는 격조 있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어서 쇼핑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또 이 거리에서는 쇼핑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거리공연들을 볼 수 있고, 노천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잠시 이곳 식당에서 이국적인 색다른 분위기에 젖어 간단한 점심식사를 끝내고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 세르비아의 민속종교와 접목된 독창적인 사보르나 정교회

 

  

 

  

 점심식사 후에 찾아간 곳은 세르비아의 민속종교와 접목된 독창적인 사보르나 정교회였다. 사보르나 정교회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미하일로 거리가 끝나는 곳에 있다.

 

  세르비아는 전체 국민의 90% 정도가 동방정교의 한 분파인 세르비아 정교를 믿는 나라다. 동방정교회는 서방(로마 가톨릭)교회와 상대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동방정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갈라진 것은 예부터 이어져 온 로마 동·서방의 언어·문화·정치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동방 교회는 지역의 '독립'적인 교회들의 협의체로, 콘스탄티노플의 에큐메니컬 총대주교는 상징적인 칭호와 명예에 그친다. 오늘날 정교회 조직은 〈신약성서〉 이외에 7차례 걸쳐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법령과 '사도 규준', '교부들의 규준'을 따른다.

 

  주교는 신앙의 보호자이며, 공동체의 성사를 집행하는 중심이다. 정교회는 사도권 계승 즉, 주교의 사역은 예수 제자들의 사역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가지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의 정교회는 중앙집중화된 기구라기보다는 민족 교회들의 친목단체로 발전해왔다. 그런 이유로 사보르나 정교회도 민족교회의 성격을 띠고 발전해 왔다.

 

  이 교회는 1841년 밀로쉬 오브레노비치(1780-1860) 왕에 의해 지어져, 대천사 미카엘에게 봉헌되었다. 설계자. 시공자, 조각가, 화가 등 모두 당대 최고의 명인들이었다고 한다. 후기 바로크 양식이 가미된 고전주의 양식이다. 사보르나 성당에는 세르비아 왕가와 교회 수장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수위권 성당인 동시에 왕가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성당의 정면 문 위로는 금칠이 화려한 이콘화가 세 개 그려져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그림이 있다. 그 아래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가장 아래에는 아기 예수를 품고 있는 마리아가 두 손을 들어 사람들을 맞이한다.

 

 

 

 

 

 

 

 

 ◆  이색적인 카페, 상호가 ‘?’

 

 

 사르보나 성당 앞에 독특한 상호의 카페가 있다. 카페 이름이 물음표 ‘?’ 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1892년부터 '성당으로(Kod Saborne crkve)'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성당 측에서 이름이 바람직하지 않으니 변경을 요구한 것이다. 

 

  건물의 주인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으면서, 과도기적인 조치로 의문부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특이한 이름으로 더 유명해지자 현재까지도 의문부호인 ‘?’을 상호로 사용하고 있다. 교회와 마주 선 고풍스런 카페에 한번 들러보아도 좋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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