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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오~ 梅, 봄이 터지네(해남, 진도)

by 혜강(惠江) 2016. 3. 24.

 

해남의 보해매원

 

오~ 매(梅), 봄이 터지네

 

 

글·사진 조선일보 박경일 기자

 

 

▲ 지난 주말 매화가 절정으로 치닫던 전남 해남 보해매원의 모습. 이곳 매화의 주종은 꽃이 희고 깨끗한 ‘남고’ 품종이다. 거친 수피의 가지에 키가 커서 ‘백가하’ 품종을 주로 심은 섬진강 변의 매화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뒤쪽 매화나무 사이로 초록의 담장처럼 보이는 것이 동백이다. 지금 매원의 동백은 붉은 꽃을 발치에 후드득 떨구고 있다.

 

   

 

남쪽 바다 ‘꽃천지’ 해남·진도


 

멀리 물러서 보면 거대한 꽃구름의 화려함으로, 다가서면 그윽한 문향(聞香)의 기품으로 만날 수 있는 매화가 지금 그곳에 만개했습니다.
전남 해남의 보해매원. 자그마치 축구장 63개를 붙여 놓은 크기의 매화농장입니다. 그곳에는 선홍빛 낙화로 지고 있는 동백을 담장 삼아 1만4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워 냈습니다. 봄이 쏘아 올린 가장 화려한 축포입니다. 매화를 만나러 남도 땅을 딛고 해남으로, 거기서 또 길을 고쳐 잡아 바다 건너 진도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해남의 매원에서 만난 매화는 섬진강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섬진강의 매화가 새침한 소녀라면, 이곳 해남의 매화는 투박하고 거친 사내를 닮았습니다. 해남의 매화가 어쩐지 옛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매화와 닮았다고 느꼈던 건, 40여 년 전쯤에 ‘실수’로 심어졌다는 토종 매화 때문일 겁니다. 거칠거칠한 둥치와 뒤튼 가지, 가지 끝에 성글게 피어난 꽃에서 함부로 번성하지도, 살찌지 않은 고매화의 기운을 봅니다.

해남에서 바다를 건너 진도까지 들어간 까닭은 운림산방 앞을 지키고 있는 ‘일지매(一枝梅)’의 기별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선사가 운림산방의 주인인 소치 허련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일지매. 하마터면 뿌리뽑혀 일본으로 옮겨갈 뻔했던 것을 삼대에 걸쳐 지켜낸 정성이 노쇠한 가지 끝의 꽃봉오리로 맺혀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해마다 2월 말이면 이른 꽃을 피워 올리던 운림소매는 아쉽게도 늙어 베어지고 말았지만, 운림산방 안에는 소치매와 운림매도 남아 있습니다. 비록 늙어 기력은 쇠했지만 뒤튼 가지 끝에서 새로 피어난 꽃은 젊은 나무가 피워 올린 매화보다 몇 배나 더 맑고 깨끗했습니다. 덧붙여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진도의 한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우리 토종 목련의 기별까지 봄소식의 부록으로 부쳐 드립니다. 

 

 

▲  전남 해남의 보해매원 매화. 40년생 정도 되는데 거친 둥치와 가지가 분방하게 자란 데다 이끼까지 끼어 남성적인 모습이다. 멀리서 보면 꽃 무더기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옛 그림 속에 등장하는 늙은 매화와 비슷하다.
 

 

 

 

 # 매화, 동백의 붉은색과 어우러지다.  

 


남녘의 봄기운이 피워낸 꽃구름. 말 그대로 ‘꽃천지’다. 전남 해남의 보해매원. 축구장 63개 면적인 46만2800㎡(14만 평)의 야트막한 구릉 위의 매원에 줄지어 심어진 매화나무가 자그마치 1만4000그루다. 지금 그 가지마다 순백의 매화가 화다닥 피어나서 절정의 순간을 향하고 있다. 보해매원 매화의 개화는 섬진강 변의 벚꽃보다 두세 발짝 늦어지는 게 보통. 그런데 올해는 어찌 된 일인지 꽃이 이르다.


같은 꽃이지만 보해매원의 매화는 섬진강의 그것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나무의 키가 크고 가지가 마르고 거칠다. 키가 큰 건 기계를 들여 대단위 매실 농사를 짓는 까닭에 위로 뻗는 가지를 그대로 놓아둔 때문이고, 가지가 거칠고 성마른 건 나무의 수효가 워낙 많아 달리는 일손으로 가지치기를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섬진강 변의 매화는 대부분 하나의 품종인데, 보해매원에는 토종 매화부터 갖가지 품종의 매화가 뒤섞여 있다.

저마다 임자가 있어 웃자란 가지를 수시로 쳐내며 낮게 길러내는 섬진강 변의 매화나무가 아담하고 차분한 여성의 느낌이라면, 보해매원의 매화는 거칠고 분방한 남성적인 느낌에 가깝다. 한데 모아 심어서 거대한 군락으로 키워 내고 있지만, 한 그루 한 그루를 가만히 보면 이곳 매원의 매화가 어쩐지 마른 붓질로 그려낸 옛 그림 속의 매화와 더 닮았다고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보해매원의 압권이라면 매화밭과 매화밭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동백이다. 만개해 선혈처럼 발밑에 꽃을 뚝뚝 떨구고 있는 동백나무 뒤로 매화꽃이 펼쳐진다. 담장 밖에서 보면 흰 매화를 배경으로 선명한 붉은빛의 동백꽃이 피어 있고, 담장 안에서 보면 반대로 동백의 초록을 배경으로 순백의 매화가 구름처럼 피어 있다. 반짝이는 초록의 동백잎과 붉은 동백꽃, 희거나 더러는 분홍빛의 매화가 구릉을 넘어가면서 어우러지는 풍경이라니….

 

 

▲  진도 운림산방의 소치기념관 앞 ‘일지매’ 가지 끝에 꽃봉오리가 맺혀 있다. 꽃봉오리는 분홍빛이 감돌지만 꽃받침이 붉고 꽃은 희다. 일지매는 초의선사가 소치 허련에게 선물로 보내준 매화의 후계목이다.
 

 

 

# 매화를 보는 법…탐매와 심매

 


보해매원은 목포에서 영암을 딛고 들어가는 해남 초입에 있다. 보해매원에서 나와 해남을 건너 길을 진도 쪽으로 고쳐 잡는다. 매원에서 진도대교까지는 25㎞ 남짓이니 동선이 그리 길어지지는 않는다. 무더기로 피어난 화려한 매화를 만났으니, 이제 바다를 건너 기품 있는 매화를 만나러 갈 차례다.


옛 선비들에게 매화는 푸근한 서정이 아니라 날이 선 ‘정신’에 가깝다. 선비들은 해마다 이른 봄이면 분분하게 날리는 춘설 속에서 불원천리 고단한 여정을 감수해 가며 매화를 찾았다. 선비들은 이제 막 꽃송이를 틔운 매화를 찾아가는 것을 ‘심매(尋梅)’라 했고, 만개한 매화의 화사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을 ‘탐매(探梅)’라고 나눠 불렀다. 첫 꽃의 순간과 만개의 순간을 이렇듯 나눠서 보는 꽃이 매화 말고 또 있을까. 깊고 어두운 겨울 속에 순백의 꽃을 피우는 매화에서 선비들이 보고자 했던 건 은유로 드러나는 고결하고 깊은 매화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이런 매화가 진도의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雲林山房)에 있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소치 허련이 화실에 내걸었던 당호다. 운림산방의 소치기념관 앞에 껑충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름하여 ‘일지매(一枝梅)’다. 노쇠한 나무는 기력을 잃은 채 붕대를 칭칭 감고 있지만, 가지 끝에는 매화의 꽃눈이 성성하게 달렸다. 꽃눈이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으니, 지금 일지매 앞에 마주 서는 건 이를테면 ‘심매’인 셈이다.


# 삼대에 걸친 정성…일지매의 내력 



일지매는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선사가 선물한 것으로 허련이 1856년 운림산방을 열 때 심어 가꾼 나무다. 그런데 이 나무가 하마터면 일본으로 반출될 뻔했다. 소치가 세상을 떠난 뒤 운림산방은 제자 임삼현이 관리하다 그만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는데 한 일본인이 이 나무를 5원에 사서 일본으로 실어 내가려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임삼현의 아들은 나무 값의 두 배인 10원을 주고 되사들여 자기 집 정원으로 가져왔다. 그 뒤로도 일본인 경찰서장이 수시로 찾아와 일지매를 내달라며 협박했지만 그는 끝내 매화를 지켜냈다.


어렵게 지켜낸 매화는 1995년 수령 187년으로 죽고 말았는데, 임삼현의 손주가 일지매의 후대목으로 키워낸 네 그루 중에서 하나를 2005년 가을 운림산방에 심고, 다른 하나를 본래 고향인 대흥사로 보냈다. 그러니 지금 운림산방의 일지매는 허련과 초의선사와의 교유, 그리고 임삼현 일가의 3대에 걸친 정성을 증거하며 서 있는 것이다. 초의선사가 건넨 것도, 소치가 그걸 건네받아 정성을 다해 돌본 것도, 임삼현 일가가 꿋꿋하게 지켜낸 것도 일지매가 그저 나무가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운림산방에는 일지매 말고도 수령 100년을 넘긴 몇 그루의 매화가 더 있다. 소치의 기적비 옆에 있는 ‘소치매’와 소치의 화상을 모신 사당 운림사 곁에서 자라는 ‘운림매’다. 소치매는 삭아가는 둥치에서 힘겹게 낸 새 가지 끝에 꽃이 제법 화려하다. 운림매는 늙어서 겨우 둥치를 지탱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가지 끝에 꽃을 달고 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운림산방 연못 옆에서 해마다 가장 이른 꽃을 피워 2월 말이면 만개해 환한 꽃등(花燈)으로 서 있던 ‘운림소매’가 지금은 잘라낸 둥치만 남아 있다. 언제 죽었는지, 죽은 나무를 언제 베어냈는지 수소문해 봤지만 아는 이가 없다.

 

운림산방 뒤편의 첨찰산 상록수림에 떨어진 동백. 때늦은 춘설에 먼저 떨어진 꽃이 묻혔다.
 

 
# 먹빛에서 순백과 선홍을 보다

 



운림산방의 주인 소치 허련을 흔히 ‘남종화의 거장’이라고 부른다. 남종화란 붓질을 통해 내적 수련과 정신을 오롯이 담아냈던 문인 사대부의 그림을 뜻한다. 남종화가 보여주는 건 기예나 솜씨, 수련의 꾸준함이 아니라 학문과 정신,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얻어낸 한순간의 깨달음 같은 것들이다. 그 정점에 있는 게 허련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다.


운림산방이 기념비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소치 허련에서 그의 아들 미산 허형, 또 그의 아들 남농 허건을 거쳐 5대까지 이어지는 200여 년의 화맥(畵脈)을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소치기념관에 내걸린 그림 속에서 그 화맥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계절이 계절이라 그런지 그중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이 ‘매화도’였다. 허련이 그린 정돈되고 단아한 ‘매화도’보다 더 오래 눈길을 붙잡았던 것이 미산 허형의 ‘노매화도’와 ‘매화팔곡병’이었다.

평생 가난 속에서 고난스러운 화업의 길을 걸어왔던 그가 붓질이 펄펄 날던 중년의 나이에 그렸다는 ‘매화팔곡병’은 저마다 다른 형상의 매화가 짙은 먹색과 자신 있는 붓질로 그려져 있다. 먹으로 그려낸 그림임에도 테두리만 그려낸 백매화에서는 순결한 색감이, 묵색으로 찍은 홍매화에서는 핏빛의 붉은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 가장 아름다운 목련 한 그루를 만나다


기왕 바다를 건너온 길이니 진도 땅에서 봄꽃 하나 더. 진도 임회면 석교리의 석교초등학교 교정에는 100년 수령의 목련나무 거목이 있다. 목련(木蓮). 이름하여 ‘나무의 연꽃’이다. 봄꽃 중에서 크고 소담스럽기로는 목련에 비할 게 또 있을까. 석교리 목련은 토종 목련이기도 하거니와 나라 안을 통틀어 가장 크고 아름다운 수형의 나무로 꼽힌다. 나무 앞에 서면 ‘거 참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다.


석교초등학교의 목련은 ‘석교리 백목련’이란 이름으로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본래 ‘백목련’은 중국 원산의 흰 목련을 이르는 이름. 그러나 최근 전문가의 정밀 조사 끝에 중국 원산의 흰 목련이 아니라 한라산 자락에서 자생하는 우리 토종 목련임이 확인됐다. 곁에 만만찮은 크기의 팽나무와 굴참나무 거목들이 함께 늘어서 있지만 활개를 치듯 가지를 사방으로 고르게 펼치며 자라고 있는 목련은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자태로 교정 끝에 당당하게 서 있다.

 

 목련의 꽃소식은 아직 일렀다. 목련은 초본식물의 봄꽃잔치가 끝나갈 무렵에나 피어나니 솜털이 보송한 꽃봉오리는 터질 기미가 없다. 대신 꽃봉오리가 매달린 가지 한쪽 끝을 아이들이 공을 차는 운동장 쪽으로 슬쩍 내밀고 있었다. ‘봄꽃을 보자 했더니 고작 목련 한 그루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린 듯이 잘생긴 거목의 가지마다 흰 목련꽃을 화려하게 터뜨릴 때의 숨 막힐 듯한 경관을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나무 아래에 서면 꽃 한 송이 없이 그저 상상만으로도 그 거대한 위용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진도는 지금 꽃이 아니라도 도처에 봄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운림산방 뒤편의 절집 쌍계사 뒤 첨찰산 상록수림에 깊이 발을 들여 초록의 기운을 폐부 가득 담아오는 것도 좋겠고, 군데군데 꽃 만개한 매화나무를 심어 기르는 임회면 고정마을을 느긋하게 산책하며 봄날의 운치를 즐겨 보는 것도 좋겠다. 국립국악원에서부터 여귀산 아래 돌탑이 늘어선 언덕길로 이어지는 18번 국도에 올라서 금갑 해변까지 달리며 봄볕 가득한 남쪽 바다의 쪽빛 풍경을 마음속에 또렷하게 인화해 오는 건 또 어떤가.

 

 

<출처> 문화일보 / 2016.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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