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땅 장흥
탐진강에서 득량만으로 흐르는 문학의 향기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작가 이청준, 한승원 잉태한 문학의 땅 장흥, 동학 농민군이 숨어들고 신문물 일찌감치 수용한 너그러운 땅, 득량만, 천관산과 들녘에는 생명이 넘치고 폐쇄된 장흥교도소는 문학적 상상력 불러 그 모든 풍경과 삶이 문인들 작품에 녹아 있다.
몸속에 끼가 득실거리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대흠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며 담배를 즐겼다. 자취집으로 찾아오는 담임선생에게 "예고하고 오시라"며 술을 먹고 시를 썼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얄구지게 가난하다. 시인 지망생들도 가난을 각오하고 시인이 되려고 한다. 시인이 된 이후 이대흠 또한 대처(大處) 광주로 나가서 카페도 운영하고 이러구러 살다가 고향 장흥으로 돌아와 산다. 왜 장흥인가, 물으니 그가 이리 대답한다. "장흥은 문화의 수도다."
득량만으로 숨어든 농민군
장흥 앞바다 득량만은 식량(糧)을 얻는(得) 바다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보성에 있는 군량창고를 탈환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득량만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 보성 차밭도 벌교 꼬막도 모두 득량만에서 생명을 보충한다. 낙지는 어찌나 많은지, 장흥군청 공무원 전희석은 "뻘에 기어 다니는 낙지가 눈에 보일 정도라, 뜰채만 있으면 낙지 잡는다"고 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장흥 산하를 뒤집어놓는 바람에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흥 바다와 산과 들에는 먹거리가 흘러넘친다. 시인 이대흠은 "맛을 찾는 지주(地主)가 많고, 교통이 발달해 먹는 문화가 더 발달했다"고 말했다.
동학꾼이 숨어든 그 섬과 바다에 개신교가 전파됐다. 장흥에는 100년 넘은 교회가 네 군데다. 지금이야 보성과 강진에 땅을 나눠주고 인구도 적지만, 장흥은 20세기 초까지 남도 중심지였다. 조선 말 군(軍)과 행정기관이 장흥에 밀집해 부패를 일삼았다. 동학 전에 이미 전임 군수가 백성들과 패를 지어 관에 맞섰을 정도였다. 거기에 동학과 기독교 사상이 전파됐다. 이대흠은 말한다. "그 중심지에 파고든 개혁 사상과 신문물은 장흥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그 정신적인 풍요와 물질적인 풍요가 합쳐져 지금 장흥이 되었다.
한승원과 한강, 이청준
21세기 장흥은 문학의 땅이다. 5만 명 되지 않는 장흥 주민 가운데 등단한 소설가, 시인이 100명이 넘는다. 소설가 한승원이 쓴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일찌감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승원은 장흥 사람이다. 동학꾼이 살았던 득량만 덕도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문학가가 된 사내다. 딸 이름은 한강이다. 최근 영국 맨부커 상을 받은 소설가다. 한강은 어린 시절 방학 때면 고향으로 내려와 덕산리 큰집에서 김 기르는 김발을 고르고 책을 읽었다. 아버지 한승원은 "강이는 내 작품이 아니라 자기 엄마 작품"이라고 했다. 한강 외가는 진목마을이다. 진목마을에는 이청준이 살았다. 이청준은 소설가다.
이청준.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목마을은 득량만을 끼고 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다. 동학과 기독교가 무의식을 지배한다. 일제 강점기 이래 간척된 논에서는 쌀이 나고 바다에서는 해물이 난다. 가난했어도 영혼과 육신이 굶을 걱정 없는 땅이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 부자가 있으면 빈자도 있는 법이어서, 이청준은 젊은 시절 내내 가난에 빠져 살았다. 광주로 가서 공부를 할 때도 집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어릴 적 하늘로 여읜 아버지와 형, 시집가며 여읜(전라도 사투리로 '헤어진'이라는 뜻이다) 누나는 울지 않던 씩씩한 이청준을 울게 만들었다. 풍요한 주변과 극빈한 자신 사이 모순이 그를 작가로 이끌었다.
쫄딱 망한 어미와 아들이 눈 내린 새벽녘 산길을 걷는 풍경, 소설 '눈길'은 가난과 풍요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진목마을에서 대덕읍 삼거리까지 산길을 넘어 아들을 배웅하는 어미, 그리고 툴툴거리며 어미와 무심하게 작별하는 다 큰 아들. 공동묘지를 지나 해 뜰 녘 산길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 되뇌는 어미…. 그때 어미는 이리 회상한다.
문학을 따라 가는 현실은 이어진다. 해안 따라 북상하면 정남진(正南津)이 나온다. 세련된 전망대가 솟고 거기가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 끝이라고 했다. 이대흠은 "그 옛날 '남끄테'라 부르곤 했던 곳 주변이니 제 이름을 찾은 곳"이라고 했다.
그 북쪽으로 남포마을이 있다. 작은 포구에 주민들이 제사를 올리는 작은 소등섬이 있는 마을이다. 이청준이 소설 '축제'를 쓰고 있을 무렵 영화 감독 임권택이 영화화를 제의했다. 두 장인은 강원도 두메를 헤매며 촬영장소를 물색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모두 포기하고 장흥으로 돌아온 날, 무심코 들른 남포마을에서 임권택이 말했다. "이 선생은 어찌 고향에 이 좋은 데를 놔두고 헤매게 만드셨소." 물 빠지면 걸어 들어가는 소등섬이 있고 마을은 한산하다. 거기에서 이청준은 소설을 썼고, 임권택은 영화를 찍었다.
문학의 주변, 장흥의 미학
해거름 혹은 해 뜰 녘 남포에서 밀물을 만나면 운수대통이다. 반짝이는 공기와 그만큼 반짝이는 물 위로 공중부양하듯 조심조심 발을 떼며 섬에 다가가는 이적(異蹟)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남포에서 더 올라가면 나오는 득량만 여다지해변 갯벌은 낙지와 조개 천지다. 처연할 정도로 시뻘건 여다지 석양은 꼭 보아야 한다.
그러다 여행자는 숲으로 간다. 조림가 손석영이 1958년부터 억불산 황무지에 심은 편백나무가 진득하게 피톤치드를 내뿜는 숲이다. 숲만 찾아도 장흥에 들른 본전을 찾는다. 그 옆에는 해방 정국 때 좌와 우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은 지주 출신 정치가 고영완이 살던 고택이 있다. 배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작은 인공호수가 반기는 마을 이름은 평화리다.
장흥 북쪽 신라 고찰 보림사도 가봐야 한다. 이 땅에 선종(禪宗)이 첫발을 디딘 가람이요,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철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신라 석탑의 전범(典範)인 석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화려하되 절제미 가득한 보조선사탑도 반드시 본다.
[장흥 여행수첩]
<추천 여행 순서〉
보림사-평화마을-우드랜드-동학혁명기념관-진목마을-선학동마을-
-여다지해변
1. 장흥우드랜드: 억불산 편백나무 숲에 산책로와 숙박시설과 체험관을 갖춘 휴양시설. 입장료 3000원. 숙박시설은 예약 필수
2.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 농민군 최후의 전투장인 석대리에 있다. 장흥으로 후퇴했던 동학 농민군의 후반기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이대흠 시인이 관장이다. (061)864-6531
3. 장흥 여행 정보 : (061)863-7071
먹거리
<출처> 조선일보(201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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