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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구례 운조루(雲鳥樓), 구름 속에 새처럼 숨은 집

by 혜강(惠江) 2015. 10. 23.

 

구례 운조루(雲鳥樓)

 

구름 속에 새처럼 숨은 집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길 59,  061-781-2644, 010-5608-2644

 

·사진 남상학

 

 

▲ 운조루 전경(출처:LandscapeTimes)

 

  국가 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고택(古宅) 운조루(雲鳥樓)는 지리산의 동남 측 경사지형 끝자락에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저녁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노랗게 익은 벼가 따사로운 햇볕에 더욱 반짝거린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오미마을에 이르자 8각형의 정자인 오미정(五美亭)이 맞이했다.

 오미마을은 지리산둘레길의 구례 7개 구간 가운데 지리산 남쪽 기슭의 삶을 들여다보는 ‘오미∼방광 구간’을 잇는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의 옛 이름은 ‘토지(吐旨)’인데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1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오미마을은 한옥이 정겹다.

  오미마을은 영조 52년에 당시 삼수 부사였던 문화 류씨 류이주(柳爾胄,1726~1797)가 풍수지리설의 금환낙지를 찾아 옮겨 와 아흔아홉 칸의 대가를 건축하고 문화 류씨 촌락을 이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류이주가 정착하기 이전에는 오동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즉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의 다섯 동네를 말한다.

 



  오미리로 개칭한 것은 류이주가 아흔아홉 칸의 대가를 건축하면서부터 다섯 아름다움이 있다 하여 ‘오미동’ 또는 ‘오미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 다섯 가지 아름다움은 월명산, 방방산, 오봉산, 계족산, 섬진강을 이른다. 현재 오미마을은 '종자뜰'이라고 부를 만큼 비옥한 땅으로 마을 앞으로 해자처럼 팬 수로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풍수에 문외한이어도 동네가 앉은 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그 첫 증거가 되는 장소가 오미마을의 고택 운조루다. 뒤로는 지리산 남쪽 자락이 두르고 있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들판 너머로는 자연 정취를 간직한 섬진강이 흐른다.

  풍수 전문가가 아니라도 살기도 좋고 풍광도 좋은 명당임을 알 수 있다. 명산과 살아 있는 물길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토지의 넉넉함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그리고 배경이 되는 지리산이 넉넉하고 어진 모습으로 인근에 아늑한 삶터를 품에 아우르고 있어 산 내음 들내음이 향기롭게 풍긴다. 
그래서 남한 3대 길지(吉地)로 알려진 명당이라고 하나 보다. 그만큼 물과 샘이 풍부하고 풍토가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기에 좋다는 것이다.

 



  원래 운조루는 사랑채 누마루 이름이지만 현재는 전체 가옥의 택호로 쓰이고 있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도연명의 칠언율시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雲無心以出岫), 새는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올 줄 아네(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의 첫머리 두 글자를 딴 것이라고 한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운조루 앞에 서니 나도 한 마리 새가 된 느낌이다. 

  운조루는 조선 중기 영조 52년(1776)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건립했다. 류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류이주는 1762년 강원도 양구 출신으로 28세 되던 1753년(영조 29)에 무과에 급제하여 낙안 군수와 삼수 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기개가 뛰어나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를 증명하듯 집 한쪽에 호랑이 뼈가 걸려 있었으나 도둑이 훔쳐가는 바람에 말머리 뼈로 대신했다고 한다.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반지를 떨어뜨린 곳에 들어섰다는 99칸 고택은 지금은 55여 칸만 남아 있다. 규모나 구조가 당시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목조 기와집인 고택 앞에는 연지(蓮池)가 자리 잡고 있고, 현존하는 주요 부분은 사랑채와 안채이며, 그 밖에 행랑채, 사당 등이 있다. 

 



  사랑채는 3채가 있는데, 큰사랑은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높이 약 1.2m의 축대 위에 있으며, 중문 쪽이 온돌방, 가운데가 마루방, 서쪽 끝이 누마루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안채는 높이 약 60cm의 활석을 쌓아 올린 기단 위에 있으며, 초석은 큰 괴석을 사용하였다.

   안채 남동쪽에 사당이 있으며, 맞배지붕 홑처마 집이다. 이 고택은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현재 국가 중요민속자료 8호로 지정돼 있다.

  운조루에는 잘 알려진 명물이 있다. 뒤주다. 뒤주 아래에 가로 5㎝ 세로 10㎝ 크기의 구멍이 있는데, 구멍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다. 누구나 구멍을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다.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이 뒤주는 주민을 위해 늘 열려 있었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지리산 남쪽 마을은 유난히 곡절이 많았다. 동학농민운동·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숱한 마을이 풍비박산 났지만, 누구도 운조루는 해코지하지 않았다. 투숙객이 아니면 입장료 1,000원을 내야 집 구경을 할 수 있는데 그 가치는 충분하다.

  오미마을 운조루 바로 옆에 있는 민박집 ‘산에사네(061-781-7231)’는 14년 전 귀촌한 김서곤(54)·노정애(52) 부부가 운영하는 집이다. 지리산둘레길 마니아 사이에는 이미 유명한 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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