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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추사박물관 탐방, ‘추사체’로 이름을 떨친 김정희의 생애와 업적

by 혜강(惠江) 2015. 12. 9.

천 추사박물관 

‘추사체’로 이름을 떨친 김정희의 생애와 업적

 

·사진 남상학

 

 



 
경기도 과천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만년에 4년간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사른 곳이다. 

 

 과천시는 추사가 불태웠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추사박물관을 2013년 6월 개관하였다. 과전 추사박물관(경기 과천시 추사로 78)은 전체부지 3천774㎡, 총면적 2천830㎡로 지하 2층 지상 2층으로 건축되었다. 

 

 추사를 종합적으로 연구, 전시, 체험할 수 있도록 사생애실, 학예실, 후즈츠카 기증실, 기획전시실과 체험실, 강의실, 교육실, 휴게공간, 뮤지엄 숍 등을 갖추었다. 그리고 박물관 야외에는 추사가 만년에 살았던 과지초당이 복원되어 있다. 

 

 




시ㆍ서ㆍ화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정조 10년에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서 철종 때까지 살았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며,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였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보담재(寶覃齋)· 담연재(覃硏齋) 등 다수이나 주로 ‘완당’과 ‘추사’를 많이 사용했다.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연암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지만 당파에 초연했고, 벽파(僻派)나 탕평당(蕩平黨)에 들지 않고 북학파에 가담하였다.

 

  24세 때 생원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고, 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청나라에 유학하여 고증학(考證學) 풍을 도입해 경학, 금석학(金石學), 문자학 등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 

 

 금석학의 대가인 그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북한산 순수비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했다.   서예가였던 그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라는 특별한 서체를 창안했다.께를 달리하며 그어나가는 획과 비틀어진 듯 보이는 글자들이 파격적이어서 마치 그림 같은 느낌을 주는 서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작품 중에는 후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문집으로 《완당집(阮堂集)》,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재시고(覃硏齋詩藁)》 등이 있고, 1934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이 있다. 

 

 


2층에서 만나는 추사의 생애와 작품


  추사박물관의 관람 동선은 2층으로부터 시작된다. 매표소가 있는 1층을 지나 2층에 들어서면 ‘추사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입구에선 긴 눈매가 인상적인 추사의 초상화가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그린 추사 반신상이 인자한 눈빛과 은은한 미소로 ‘어서 오시라’라며 반기는 듯하다. 

   이곳에는 어린 시절의 수학(修學),
연행((燕行)을 통한 새로운 문물 체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확정 등 금석연구, 그리고 한양에서의 관직 생활, 제주와 함경도 북청 등 두 번의 유배생활, 만년 4년간의 과천생활로 구분된다. 

 

  먼저, 김정희의 일대기와 가계도를 유리판에 새긴 패널을 살편본다. 추사의 증조모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다. 추사는 충청도 예산현(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과 유준주(兪駿柱)의 딸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이때 생부 김노경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지금으로 치면 8살, 초등학교 1학년생의 글씨다.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자에 아버지와 동생들의 안부를 묻는 의젓함이 그대로 나타나는 편지다. 이 글씨는 당시 선비로부터 “어린 나이에 썩 잘 썼다”는 평을 받아 어릴 적부터 서예에 심취했음을 보여준다. 추사가 부친을 따라 머나먼 북경 사행(使行) 길에서 쓴 시 몇 편이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산은 석령에 이르러 끝이 나니, 만 리 벌판이 눈앞에 펼쳐지네. 천지가 텅 빈 곳이리니 하늘과 땅이 여기에 다 모였네. 백탑이 버섯 머리처럼 돋았으니, 어찌 변방인데도 저리 웅대한가. 교활하게 노는 구름 재롱을 떨어 때로 먼 산인 양 둔갑을 하네” (요동벌판, 1809.12.2)

 

 "하늘 가득 땅 에운 먼지 간 곳이 없고, 수레 주렴 아득히 하늘 향해 열렸네. 멀어져가는 사람도 분명히 보이고, 외로운 새 앞으로 또렷이 날아오네. 비자의 사당 가에 구슬처럼 부서져, 신선의 밭 이랑에 옥 무더기 이루었네. 뉘에게 황량한 경치를 그리게 힐까. 마을 에워 싼 온갖 나무 다 매화로다."(눈 내리는 계문에서, 1809.12.22)

 


 그가 사행에 나서기 전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에게 써준 송별시와 북경에서 중국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의 만남에서 나눈 필담서는 오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친근히 다가선다. 옹방강은 청나라의 서예, 문학, 금석학에 통달한 학자였다.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인 박제가의 제자가 된 그는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청국 사행에 동행하며 금석학에 눈을 뜨는 과정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금석학자로서의 추사 


  연경(燕行)에 머물며 금석학의 대가로 꼽히던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과 사제의 연을 맺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한양시절에는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여행하며 금석을 연구하고, 학문 지기들과 교류하며 꽃 피웠던 추사의 학예를 보여준다.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  "가슴속에 만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지론을 실천했다.  

 이후 추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함께 배운 금석학에 매진하여 1816년 당시까지 무학대사의 비 혹은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졌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확인하고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옆면엔 닳아 없어진 68자를 해독했다는 글귀를 새겨놓아 금석학의 대가라는 사실을 밣히고 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에 이 지역을 둘러보고서 북한산에 세운 비석이다. 여기서 ‘순수(巡狩)’란 왕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박지원과 박제가의 가르침은 그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서 연구하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왼쪽으로 발길을 돌릴라치면 김정희가 41세 때 암행어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방문객들에겐 생소하고 민정을 피며 작성한 결과보고서는 국내 몇 안 남은 소중한 자료라고 한다.

 

 

그만의 독특한 서체, 추사체(秋史體) 완성


   제주도 및 북청 유배 시절에서는 유배 시절 외로움 속에서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했던 추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는데, 당시 머물렀던 서귀포 유배지를 모형으로 만날 수 있다. 제주에서 보낸 8년의 유배기간 동안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예순세 살인 1848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 유배 떠나기 전 대흥사에 남긴 추사 현판 글씨, 예서체에 한껏 멋을 부려 획이 기름지고 굵다 (위). 유배 후 예산 화암사에 남긴 추사글씨. 기름기를 제거하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완성했다.(아래)  

* 임윤주비(臨尹宙碑), 추사의 이 작품은 윤주비의 일부를 임서한 것으로, 청량관(淸凉館)에 받들어 드렸다고 했다. 윤주비는 동한(東漢) 희평(熹平) 6년(177년)에 세웠으며, 공주비(孔宙碑)와 더불어 이주(二宙)라고 부른다. 이 비의 글씨는 납작하고 평평하며, 서법은 균정(均整)하고 산뜻하다. 한 대(漢代)의 예서를 귀하게 여기는 추사의 예서관(隸書觀)과 임서법(臨書法)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추사체는 종래 조선 시대의 관파(官派) 글씨가 갖는
숙폐(宿弊)를 통감하고 그것을 배격하여 창안되었다. 추사는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하기를  "但以筆法 擧擬良可槪耳>(필법만 가지고 좋은 점을 모방할 뿐이니 개탄할 일)"라고 개탄하며, 조선의 서예를 망친 것은 바로 이광사(李匡師)라고 갈파했다.

 

것은 조선의 서예가들이 맹목적으로 중국의 서체를 모방, 추종하려는 것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추사는 옹방강 일파의 서론에 근거하여 처음에는 "동기창체(董其昌體; 글씨의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함)" 등을 익히다가 서법의 근원을 한대 예서체에 두고 이것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청나라 왕조의 서예가들도 염원했던 이상적인 서체를 이룩했다. 즉 선의 태세(太細)와 곡직(曲直), 묵(墨)의 농담(濃淡) 등으로 글자 하나하나에 구성과 역학적인 조화를 주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서축(書軸)을 이룬다. 

  따라서 추사체는 대단히 개성적인 글씨로,
통상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움, 평범하고 교과서적인 미감(美感)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추사의 글씨에서는 차라리 괴이함과 당혹감을 느낄 것이나 그런데 바로 그 괴이함이 추사의 예술적 개성이자 높은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흔히 쉽게 ‘추사체’라고 말하지만, 추사체의 실체는 매우 다양하여 과연 어떤 글씨를 ‘추사체’라고 할 수 있는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무척 힘들다고 하겠다. 

  즉 파격(破格)의 아름다움이라 할까.
이 서체는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또한 힘차면서도 거칠어서 마치 유희적인 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조화한 듯하면서 조화되는, 글씨의 아름다움을 천성(天成)으로 터득한 것이다. 이것은 획(劃)과 선으로 이어지는 공간 구성으로 추상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예술성을 보여 그의 문인화풍의 바탕을 이루었다. 이후 추사체는 신헌(申櫶)· 이하응(李昰應)· 서상우(徐相雨)· 조희룡(趙熙龍)· 이상적(李尙迪)· 허유(許維)· 전기(田琦)· 오경석(吳慶錫)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을 통해 일세를 풍미했다.

 

 

 

 

제주도 유배생활과 세한도(歲寒圖)

 

 서귀포 유배지 모형 옆에는 교과서에도 실린 <세한도>(보물 180호)가 길게 전시되어 있다. 세한도(金正喜筆 歲寒圖)는 조선 말기의 추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문인화다. 

 
  세한도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추사가 제자인 통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선물로 그려 준 것이다. 이상적은 청나라에 드나들며 유배지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 오직 서책과 벗하며 지내던 추사에게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의 최신 서적을 구해준 인물이다.  <세한도>는 아무 장식 없는 집 한 채와 그 곁에 두 그루 소나무가 서 있을 뿐이다. 그중 거침없이 우뚝 선 소나무는 이상적을, 그 나무에 기대어 의지하는 듯 보이는 늙은 소나무는 추사 자신을 표현한 것이리라.

 

 추사는 어렵게 구한 책을 힘없는 자신에게 보내주는 이상적의 마음에 눈시울을 적시며, 《논어》에 나오는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는 구절을 떠올렸다.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의미이다. 어려운 지경이 되어서 고마움을 알게 되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한도>는 하나의 그림이지만
실제로는 <세한도> 옆으로 긴 명문들이 이어지는데 그 길이가 14m에 이른다. 작가의 발문이 그림 끝 부분에 붙어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 있다. 그리고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곳 명사 장악진· 조진조 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와 함께 김준학(金準學)의 찬(贊)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그 후 세한도는 이 씨 문중에서 떠난 후
130여 년 동안 유전을 거듭하다가 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에게 들어간 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 선생의 노력과 재력에 힘입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죽기 직전까지 예술혼(藝術魂) 발휘

  과천 시절 코너에는 과지초당에서 추사가 읊조리는 시를 영상 연출을 통하여 그 마음과 공감할 수 있고, 과천시절 추사가 마지막 혼을 담아 써 내려간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또 한 번의 북청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1852년부터 1856년까지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에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친 추사는 죽기 전날까지 친구들과 서신으로 교유하며 글을 썼다. 

  이곳 전시실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판전(板展)’이라 쓴 편액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몸으로 기꺼이 일어나 붓을 들어 쓴 것이어서 글씨의 무게감이 드러난다. 이 편액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장경각에 걸린 것을 복각한 것이다. 어쩌면 추사의 글씨로는 보이지 않는, 마치 서예를 막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가 쓴 글씨처럼 어떤 기교나 멋이 보이지 않고 순수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극도의 경지에 이르면 오히려 천진난만해 보인다는 이른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판전 왼편에 덧붙인 일곱 글자 “칠십일수병중작(七十一壽病中作)”이라는 글씨 “칠십 나이 병중에 쓰다”라는 것을 볼 때 그는 병중에서 최후의 걸작을 남긴 것이다. 실제로 서에의 대가인 추사는 ‘편전’ 두 글자를 쓰고 나흘 뒤 세상을 떴으니, 그 글씨가 주는 무게감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랴.

  전시실 끝에서는
추사가 이룬 학예일치의 경지를 영상과 체험을 통하여 감각적으로 느껴보며 추사의 서거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조용히 앉아 추사의 삶을 다시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1층에서 만나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


  2층 추사의 생애를 관람한 뒤에는 관람 동선에 따라 1층 학예실로 이동한다.1층에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주제별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19세기는 북학(北學)과 연행(燕行)의 시대로 추사가 북학파 학자들의 영향으로 점차 청나라의 고증학과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 청나라 학자들과의 활발한 학예 교류, 조선 금석학 연구와 여러 계층과의 교우를 살필 수 있다.   추사가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인 해외묵연(海外墨緣), 추사의 후손이 일제 당시 5권으로 엮은 완당 선생 전집, 김정희 별세 후 10년 후 편지를 모아 수록한 완당척독(阮堂尺牘)은 아키나오가 기증한 귀중한 자료다. 


  조선 비석에 대한 논문을 기록한 해동비고(海東碑攷)는
그의 금석학에 대한 깊이를 가늠하는 소중한 자료이고 젊은 시절 선(禪) 논쟁을 벌이며 친교를 쌓아온 백파 선사의 비문은 지금 선운사에 남아있어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다. 권돈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마천십연독진천호(磨穿十硯禿盡千毫)는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로 학구열을 불태운 열정에 숙연해진다. 또한, 고전과 글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추사체’를 이룩해 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하 1층의 후지츠카 기증실 


  지하 1층에는 후지츠카 기증실과 기획전시실, 체험실 뮤지엄 숍, 강의실, 교육실 등을 갖추고 있다. 후지츠카 기증실은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츠카 치타시(藤塚鄰, 1879~1948)의 학문적인 성취와 추사 관련 유물의 기증을 기념하는 전시공간이다. 그의 아들인 일본의 후지츠카 아키나오는 2006년 추사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선친 후지츠카 치카시가 수집한 추사 서신 23점을 과천시에 기증하였다. 

  이곳에도 추사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아
오래전 사라진 추사 고택과 편지를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추지츠카 치카시의 논어 연구, 추사를 중심으로 한 청 왕조 문화 동전의 연구, 사진으로 남은 23점의 추사 글씨, 과천시의 추사 연구 등을 살필 수 있다.

  지하 1층에는 후지츠카기념실 외에도
기획전시실, 체험실, 뮤지엄 숍, 휴게실, 교육실, 강의실이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기획전시실에서는 2015년 특별기획전으로 추사 김정희와 함께 활동한 정벽(貞碧) 유최관(柳最寬)의 작품을 전시하는 <정벽유최관전(貞碧柳最寬展)>이 열리고 있었다.

  정벽 유최관은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와 함께
1812년 북경에 연행을 함께 다녀온 학인이다.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정벽 유최관과 옹방강의 아들 성원 옹수곤 4인의 교유를 기려 자신의 당호를 '성추하벽(星秋霞碧)'으로 지었는데, 정벽 유최관은 '성추하벽'의 네 번째 주인공이다. 학문적인 유대가 돈독함을 여기서 새삼 깨닫게 된다.

  기획전은 정벽가의 선조들, 정벽의 연행(燕行), 추사와 정벽,
정벽과 그의 친구들 등 4부로 나누어 60여 점의 유물을 선보이고 있다. 체험실에서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추사의 글씨 따라 쓰기, 난치기,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탁본체험도 할 수 있다. 

 



야외에 복원된 과지초당(瓜地草堂)



  추사박물관 구내 야외에는 추사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4년 동안 머물렀던 집 과지초당이 복원되었는데팔작지붕에 방 5칸과 대청마루, 행랑채의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집채의 버팀목은 비와 눈, 바람을 견디는 동안 색깔이 바래져 오히려 고풍스러운 멋을 지녔다. 과지초당은 추사의 생부 김노경(1766~1837년)이 1824년 과천에 마련한 별서(別墅)로 13년 동안 기거했다. 

 

이곳은 추사 선생 가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뜰에는 추사 동상과 네모 형태의 작은 연못과 정원, 또 추사가 조석으로 물을 길었다는 밑바닥이 없는 항아리로 만든 우물, 즉 독우물(옹정;甕井) 등이 있다. 

  괴지초당 뜰에 세운 높이 2.2m의 동상은
오른손에 접힌 부채를 들고 있고 왼손은 뒷짐을 진 채 꼿꼿한 자세로 옅은 미소를 띠어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돌아와 영면하기까지 기거한 4년간 삶이 힘들거나 외롭지 않음을 시사했다. 추사 선생은 1786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837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과지초당에서 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그는 시간 나는 대로 초당을 자주 찾았으며,
제주와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 8월부터 185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 동안 과지초당에서 지냈다. 그는 이곳에서 별세 3일 전에 쓴 봉은사 현판인 판전(板殿)과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과지초당의 뒤를 돌아가니 벽에 ‘치원 황상과 추사가’라고 쓴 시가 붙어 있다. 그 글은  추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치원 황상(巵園 黃裳, 1788~1870)이 추사의 집을 방문하여 과지초당을 소재로 쓴 글이었다. 치원 황상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가장 아꼈던 강진 시절의 제자다. 당대의 석학이자 명필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학문적 교우관계를 맺을 만큼 그는 학문적 내공을 인정받는 학자였다.

  1848년 제주도 유배 시절
추사는 황상의 시에 반하여 “두보(杜甫)를 골수로 삼고, 한유(韓愈)를 골격으로 삼았다”고 극찬하였으며,  그 후 1856년 추사 김정희와 산천 김명희 형제는 그의 시집 《치원유고(巵園遺稿)》에 서문을 써 주기도 하였다. 이 시는 1853년 황상이 추사의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황상이 과지초당의 정경을 묘사한 시였다.   “荒山野老一笻枝 白小魚遊万丈池 奇記屈沈博雅士…. ”으로 이어지는 이 시를 번역하면, 
    
   거친 산과 들 늙은이 지팡이 짚고 오니
   백소어(白小魚)는 드넓은 연못에서 노니네

   기이한 글 묵직한 박아(博雅)의 선비시오
   빼어난 모습 갓 태어난 아이와 같구나!
   시에서 본 송문석(松文石)을 구태여 알아보니
   그 누가 눈앞의 죽엽비(竹葉碑) 기억할까?
   가는 풀 이름난 꽃 안개 버들 언덕에 
   꾀꼬리 목청 고운 그때 풍경 어떠할지



  추사 선생은 죽기 직전에 황상의 시(詩)에 대해  “내 살아생전에 너보다 잘 지은 사람은 없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스승인 다산은 시(詩) 짓는 재주가 ‘으뜸’이라 했다. 

  추사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리에 누운 채
황상의 인사를 받고, 황상이 내려가자 추사는 강진으로 시를 써서 보냈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것을 짐작했던 것일까?  

   
이별의 회포를 가눌 길 없어
   차마 문을 나서서 보질 못했지.
   오늘 그대 간 거리를 헤아려보니
   지금쯤 월출산을 지났겠구려.


  이렇게 추사는 당대의 문인, 승려들과 교우하며 수많은 서예작품을 남겼다. 전국의 고찰이나 유적지에서 추사의 글씨를 많이 만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추사박물관 관람정보>

* 가는 길 : 지하
철 4호선 선바위역 1번 출구로 나와 선바위역 정류장에서 마을버스 6번을 타고 추사박물관 정류장 하차하면 된다.

* 휴관  : 매주 월요일(다만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 날) 휴관하며, 1월 1일, 설날, 추석 연휴 기간에도 휴관한다.

* 요금  : 어른 2,000원(단체 1,000원), 중․고생과 군인 1,000원(단체 500원), 초등학생 500원(단체 300원)이며, 6세 이하와 경로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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