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한양도성박물관, 600년 한양도성과 남산 발굴유물

by 혜강(惠江) 2014. 9. 11.

 

한양도성박물관

600년 한양도성과 남산 발굴 유물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283 서울디자인센터 1~3층

 

 

 

·사진  남상학

 

 

 

 

 

  초가을 햇빛 따가운 어느 날 흥인지문 북쪽에 자리한 한양도성박물관을 찾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고대 도시에는 성곽이 있었다. 성곽은 도시를 방어하는 구조물이자 도시와 그 외 지역을 구분 짓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물론 성곽을 가지지 않은 도시들도 있지만 대개의 도시들, 특히 서울과 같은 도읍은 으레 성곽을 갖추고 있었다.  

 

   600년 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한양도성이 그것이다.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는 궁궐과 종묘사직이 자리를 잡자 도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조선 시대 서울을 둘러싼 도성(都城)인 한양도성(서울漢陽都城, Seoul city wall)의 둘레는 약 17㎞, 지정면적 1,730,221㎡. 사적 제10호. 현재 남대문·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수문(水門)·여장(女墻)·옹성(甕城)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한양도성은 한양사람들의 생활공간에 질서를 부여했고 성문이 여닫히는 리듬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전 세계 수많은 도시들이 성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성곽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 조선왕조 500년에 이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600년 세월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양도성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눈으로만 만날 수 있을 뿐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2014년 7월 31일, 흥인지문 북쪽 언덕 동대문이대병원 자리를 허물고 조성한 동대문성곽공원을 조성하고 서울디자인지원센터 1~3층에 한양도성박물관이 개관했다.


  큰길에서 한양도성박물관 표지판을 보고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는 아담한 정자가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바로 한양도성박물관이다. 동대문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배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1층 기획전시실, 2층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 3층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관람 동선은 3층으로 입장하여 1층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3층은 건물 뒤 언덕에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3층은 상설전시관이다. 한양도성 미디어아트를 시작으로 한양도성의 과거와 현,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모두 네 구역으로 나뉜다. 상설전시관에서 처음 만나는 전시물은 ‘도성 서울을 품다’라는 제1존 미디어아트다.

 

  한양도성은 서울의 도심을 둘러싼 성곽으로, 7대의 프로젝터를 이용해 22m에 이르는 한양도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성했다. 그림과 근대의 사진엽서에 남아 있던 한양도성의 풍경을 3D 애니메이션과 사진 콜라주로 보여주는데, 한양도성의 훼손과 복원 모습도 한데 어울린다. 

 

 

"금일은 순성(巡城)하세" 


  벽을 따라 펼쳐지는 미디어아트는 문을 통과하면 두 번째 존 ‘금일은 순성하세’로 이어진다. 조선 시대에는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했는데 이를 '순성(巡城)'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의 시간이 걸린다'고 적혀있다.

   유본예의 아버지인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1807)도『경도잡지(京都雜誌)』‘주람도성(周覽都城)’에서 순성을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고 호평했다.

 

 “都城周四十里 一日遍巡 周覽城內外花柳者爲勝凌晨始登 昏鐘可畢 山路絶險 有委頓而返者”(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를 하루 만에 두루 돌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거리로 여겼다. 이른 새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해질 무렵에 다 마치게 되는데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또 1901년 경의선 철로부설을 위해 프랑스에서 초빙된 철도기사 에밀 부르다레 또한 그의 저서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에서 "서울의 이 장벽은 하루 만에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상당히 잘 걷고 산을 잘 타는 사람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산책이 된다. 대단한 구경거리로서 비범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특히 좋은 계절에 소나무와 꽃이 우거진 남산비탈을 따라갈 때, 흠잡을 데 없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구석구석을 즐길 만하다."고 하였다.

   ‘금일은 순성하세’ 코너는 독특한 체험 공간이다. 바닥에 표시된 발판 위에 서서 손을 화면에 나타나게 해 직접 조작을 하면서 보고 싶은 구간을 선택해 한양도성을 둘러보고 정보도 얻는 체험이다. 손으로 직접 조작하면서 3면으로 바라보는 서울의 안과 밖의 모습이 매우 색다르다.

  ‘시간을 흐르는 선’이라는 작품을 따라 통로를 지나면 3 존으로 이어진다. 3 존은 한양도성의 축성부터 일제강점기의 훼손,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복원에 이르기까지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특별한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 

 

 

 

 

600년 한양도성의 역사


  성곽의 축조는 1396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축조되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는 궁궐과 종묘사직이 자리를 잡자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여 도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쌓은 성의 길이는 9천9백 70보(步 : 1보는 6자)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 · 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肅淸門 : 북대문) · 흥인문(興仁門 : 동대문) ·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 · 숭례문(崇禮文 : 남대문)의 4대문과 홍화문(弘化門 : 동소문) · 광희문(光熙門 : 수구문) · 창의문(彰義門) · 소덕문(昭德門 :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태조 때 짧은 기간 동안 쌓은 도성은 세종 때에 이르러 보수할 곳이 많아졌다. 이때 전국에서 동원된 인원으로 전 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농번기를 피해 한겨울에 공사를 해야 했다. 전국에서 백성을 불러들인 기록은 각자성석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종 때 실질적으로 완성된 도성은 두 차례에 걸친 큰 전란으로 파괴되었지만, 청의 간섭으로 오랫동안 보수를 할 수 없었으나,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전란이 일어나더라도 도성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지키자는 ‘도성수비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한양도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숙종 때 크게 정비된 도성은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수하게 된다.

   숙종부터 고종 때까지는 성을 고쳐 쌓으면서 공사에 참여한 감독과 기술자의 실명을 성벽에 기록하여 책임을 물었다. 지금도 한양도성 주변에서 음성(陰城), 김제(金堤), 울산(蔚山) 같은 지명이 새겨진 각자성석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성이 무너지면 그 구간을 쌓았던 군현에서 다시 쌓아야 했다. 세종 6년 8월에 함길도 북청부가 쌓았던 구간이 무너지자 다시 소환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런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순조 때의 것이다. 

 

 

 

도성 수난의 역사와 재건 

 

   그러나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성시구역개수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 · 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아 있고, 문도 남대문 · 동대문 · 동북문 · 홍예문뿐이나 조선 시대의 태조 · 세종 · 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으며, 그 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5년부터 한양도성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한양도성의 추가적인 훼손은 멈추게 되었다. 서울시의 주도로 이루어진 한양도성복원사업은 도성의 면모를 바꾸어 놓았다. 주택가 사이에 방치되어 있던 퇴락한 성벽은 주변 불량주택 철거, 성벽 복원이라는 절차를 거치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되살아났다. 1975년부터 2012년까지 총길이 18,627m 중 약 70% 구간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완전히 사라졌던 돈의문 현판이 100여 년 만에 공개된다. 흥인지문의 지붕 추녀마루에 있던 거대한 용두와 장식 기와, 국왕의 호위와 수도 방어를 맡았던 금위영을 뜻하는‘금영’명 기와도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일제강점기 한양도성과 사대문, 사소문의 수난사와 한양도성의 복원, 한눈에 보는 한양도성으로 이어진다.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한양도성은 전체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다. 

   4 존은 2012년 11월 23일,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것으로서 성곽 문화유산으로서의 한양도성의 가치를 공유한다. 세계현존수도 중 최장기간인 514년(1396~1910)간 도성 역할을 수행하였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자연친화적으로 축조된 점 등이 세계유산적 가치로 평가받았다. 한양도성의 연표와 세계 성곽유산분포지도, 정보검색대에서 한양도성과 세계 성곽유산에 대한 역사, 문화, 기록을 제공한다. 레고로 만들어진 숭례문이 관람의 흥미를 더한다.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의 역사 


  도성정보센터와 학습실이 있는 2층을 거쳐 1층으로 내려오면, 1층은 한양도성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현재 개관 기념 한양도성 발굴 유물 특별전으로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을 전시하고 있다.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렸던 옛날부터 서울N타워가 서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산에서 찾은 한양도성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양도성의 훼손과 복원 과정, 도자기나 성돌, 조선신궁의 석재 등 발굴 유물도 만나볼 수 있다. 

  남산은 인경산(引慶山), 열경산(列慶山)으로도 불리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목멱산이다. 산세는 동서로 길게 드리워져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상을 하고 있다. 놀이는 270.1m, 2,7㎞, 남북 2.1㎞이다. 태조는 1395(태조 4년)에 목멱산에 산신을 모시는 신사(神祠)를 지어 나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였고,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 5.5㎞를 쌓았다. ‘남산의 꽃구경(木覓賞花)’이란 말이 있듯이, 목멱산은 한양사람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또한 남산은 조선 팔도의 봉수대에서 올라온 봉화의 최종 목적지다. 

  이런 남산이 1898년 일본인들의 신사를 짓기 위해 왜성대공원(지금 숭의여자대학 터)이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훼손되기 시작했다. 1910년에 한양공원이 들어서고, 이어 약 33만 ㎡가 넘는 넓은 부지에 조선신궁이 들어섰다. 1939년에는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고 전국적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국신민서사비(皇國臣民誓詞碑)를 건립하게 했는데, 남산 자락에도 16m가 넘는 황국신민서사지주를 세우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한양도성 성벽이 파괴되었다. 그후에도 국회의사당조성사업, 이승만대통령 동상 건립 등으로 남산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렇게 훼손된 성벽은 1977년에 들어서서 남산지구를 복원하고 이어 남산제모습찾기, 남산봉수대(제3봉수) 복원, 외인아파트 철거, 국가안전기획부 이전, 아동광장 및 백범광장 발굴, 한양도성 복원, 중앙광장 발굴, 회현자락 정비사업 등으로 남산의 복원작업 및 발굴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남산 복원의 자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77 ~ 1979   남산지구 복원(1,369 m), 장충지구 복원(1,053m)
  1991               남산 제모습찾기
  1992               수도방위사령부 이전
  1993               남산봉수대(제3봉수) 복원
  1994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1995               국가안전기획부 이전
  1998               남산골 한옥마을 개관
  2009               남산 르네상스, 아동광장 발굴 및 한양도성 복원(84m)
  2009 ~ 2010  백범광장 발굴  및 한양도성 복원(성벽 복원 130m+흔적 복원 109m)
  2013 ~ 현재   중앙광장 발굴 중     

 

  전시관에는 조선신궁의 모습과 광복 후 조선신궁이 철거된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던 시절, 그리고 어린이회관이 있던 1970년대 모습까지 시대별로 변화하는 남산 회현 자락의 사진도 볼 수 있다.

 

 


<한양도성박물관 정보>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283 서울디자인센터 1~3층
* 전화 : 20-724-0243
* 관람시간 : 3~10월 평일, 토, 일, 공휴일 : 9.00~19.00 / 11월~2월 : 9.00~18.00 (
매주 월요일, 1월 1일 휴관)
* 관람요금 : 무료
* 교통 :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10번 출구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