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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화마를 딛고 복원된 통일신라시대의 고찰

by 혜강(惠江) 2014. 4. 5.

  

 양양 낙산사

화마를 딛고 복원된 통일신라시대의 고찰

 


글·사진  남 상 학

 

 

 

  속초나 양양으로 나들이 올 때면 으레 들르는 낙산사, 사찰에 색깔이 있다면 낙산사는 푸른 색일 듯싶다. 동해의 넘실대는 파란 물결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인데, 원통보전에서 조금만 비껴서면 바다가 보이고, 낙산사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해수관세음보살상 앞에 있어도 바다가 푸른 바다가 코앞에 보인다. 또 의상대에서 홍연암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깎아지른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낙산사는 강원 양양군 오봉산(五峯山)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1,300년 전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의 진신사리를 모셔 만들었다는 사찰은 관동지방의 절경으로 이름난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고 푸른 동해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진실한 사람들의 소망과 기원을 받아준다는 관세음보살의 신통함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기원 사찰로도 이름 높다. 


  大聖圓通境曾聞海上峰 (관세음보살의 원통한 경지를 바다 위 섬에서 일찌기 들었네)

  恩同甘露潤香有紫泥封 (은혜는 감로처럼 윤택하니 임금님 도자니 봉향을 하사하셨네) 

  隋類身常現纏迷眼不逢 (우리곁에 상주하는 관음 진실을 미혹한 눈으로 는 만날 수 없다네)

  莫論眞與假但自禮慈容 (진실일까 거짓일까  따지지 말고 자비로운 저 모습에 예배를 하게나)

 

 


   이 절의 창건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858년(헌안왕 2) 범일(梵日)이 중건(重建)한 이후 몇 차례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전쟁으로 소실된 건물들은 1953년에 다시 지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世祖)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虹霓門) 등이 남아 있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한 후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그러나 동해를 바라보며 기원의 빛을 보내는 해수 사찰이자 관음사찰로 명성 높은 낙산사는 2005년 4월 5일 식목일에 고성과 양양 지역을 휩쓴 대화재로 천 년의 기록들이 재로 변하였다. 사찰 경내의 모든 목조건물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화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500년 역사의 낙산사 동종을 녹여낼 정도였다. 원통보전과 무설전 등 수많은 사람의 기원을 담고 마음을 다독이던 장소들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모든 사람의 마음 또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2013년 8년여에 걸친 낙산사 복원이 마무리되었다. 

 

 



   원통보전 정면으로 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7층으로 높였다. 부분적으로 손상됐으나 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기단부에서 투박한 겹연꽃 무늬를 볼 수 있다.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등 문화재가 모여 있다.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원통보전 내부에 있다. 고려 후반 전통 양식을 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온화한 표정, 가냘픈 손가락, 섬세한 옷 주름 등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원통보전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와와 흙을 차례로 쌓고 곳곳에 원형 단면의 화강암을 넣었다. 조선시대 사찰의 대표적인 담장으로 평가받는다. 담장 주위엔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대나무가 자란다. 홍예문에서 원통보전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여느 고찰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마치 세조가 다녀간 뒤 중수 직후의 모습이 지금 같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함과 생생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향하면 낙산사의 또 다른 매력이 기다린다. 화강암 재질의 해수관음상은 높이 15m, 둘레 3m 정도의 거대 불상으로, 불상 조각의 일인자인 권정학 씨가 조각했다. 크기만큼 공사 기간도 상당한데, 1971년부터 다듬기 시작해 6년 6개월 만에 완성했다. 거친 화마에도 자리를 지킨 해수관음상은 낙산사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람들의 마음을 달랜다. 바다를 등지고 불상을 바라보면 관음보살이 백두대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듯하다. 

 

 



   해수관음상에서 의상대를 지나 홍련암에 이르는 구간이다. 도보로 약 20분 거리지만 고개만 돌리면 낙산사와 자연이 빚어내는 조화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소나무의 숲으로 싸여 있던 사찰은 화재로 벌거벗고 나무들도 사라졌지만 검게 탄 그루터기만이 남은 자리에는 새록새록 푸른 생명들이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며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동해 일출과 멋지게 어울리는 의상대(義湘臺)는 여전히 아름답다. 바닷길 따라 절벽 위로 자리하는 건축물은 홍련암이다. 의상대사가 동굴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연꽃을 담았다는 암자는 바닥으로 뚫린 구멍으로 낭떠러지 아래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신비함이 있다. 암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지붕의 앞뒤가 각각 형식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불전에 앉으면 관음굴에서 치는 파도소리가 바닥을 울리며 몸으로 전해진다. 이 일대는 사적 제495호로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의상대에서 약 200m 거리에 의상전시관이 있다. 의상대사와 낙산사에 얽힌 이야기를 다양한 전시품으로 접할 수 있으며, 2005년 낙산사 화재 관련 자료도 볼 수 있다. 또 홍예문에서 출구 방향으로 약 40m 떨어진 낙산사화재자료전시장에도 화재 관련 자료를 전시해놓았다. 복원 과정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불에 탄 기와로 쌓은 탑, 화재 후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를 통해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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