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및 정보/- 베트남, 필리핀, 인니, 말레이

하노이(Hanoi) 중심가 볼거리

by 혜강(惠江) 2012. 10. 17.

 

 

하노이(Hanoi) 중심가의 볼거리

 

전쟁의 터전에 꽃피운 새로운 도시 

 

 

 글 사진 : 남상학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인 하노이는 1011년에 세워진 고(古)도시이다. 1954~76년에는 북베트남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였다.  이제 남부 베트남의 호치민이 경제 중심지라면 하노이는 독립국가 베트남의  명실상부한 정치 중심지이다.

 

 

*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상징적 건물 대우호텔, 1996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경영'의 상징물로 지은 베트남 최대 특급 호텔이다 *

 

 

  베트남은 1858년부터 117년 동안 프랑스에 지배당하고, 1945년 일본패망 후에는 30년 동안 전쟁과 남북 분단, 그리고 다시 전쟁으로 이어지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20세기 폭력과 전쟁의 역사 그 한복판에서 베트남은 철저하게 희생되었던 민족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의 열강들에 의해 국토는 둘로 나뉘어 이념의 각축장이 되었고, 베트남 민족은 그들의 포로나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의 정치의 중심지 하노이(Hanoi)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인 하노이는 1011년에 세워진 고 도시이다. 1954~76년에는 북베트남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였다. 홍강 서쪽 기슭의 베트남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 동안 중국인 정복자들이 자주 정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며, 프랑스 점령기, 일본 점령기(1940~45)에도 행정중심지 역할을 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1945년 8월 호치민[胡志明]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이 권력을 잡고 하노이 시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수도가 되었고,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이 무너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하노이는 전 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한 마디로 하노이는 베트남의 존심이다.

   남부 베트남의 호치민이 경제 중심지라면 하노이는 명실상부한 정치 중심지이다. 그 때문에 시내 여기저기에서 구소련의 영향과 사회주의 냄새가 느껴진다. 남성들이 쓰고 있는 짙은 녹색의 모자, 레닌 공원에 있는 미그 전투기 놀이 도구.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을 어두운 이미지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활기가 넘치는 호치민과 비교하면 다소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침략과 내란으로 수백 년 된 기념물과 궁전의 대다수가 파괴되었지만, 사적지와 명승지가 몇 군데 남아 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에 걸맞게 유서 깊은 사찰도 많고 식민지풍 교회나 건물이 많은 데 무채색의 건물들이 빚어내는 조화와 좁고 아기자기한 골목, 그리고 포장마차와 가게들이 몰려 있는 거리 풍경은 운치가 있다.  호안키엠 호수의 북쪽으로는 시장이 형성 돼 있으며 남쪽으로는 호텔, 항공사, 여행사 및 공관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는 프랑스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노이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호안키엠 호수(Hoan Kiem Lake)

 

 

  하노이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안키엠호수는 ‘되돌려준 칼의 호수(Lake of the Restored Sword)’로 유명한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15세기 중국 명나라에 대항해 전쟁에서 승리했던 레타이또(Le Thai To) 황제가 잃어버린 검을 찾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호수에 있었는데 거대한 황금 거북이가 수면으로 올라와 왕에게 검을 돌려줬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호수 남쪽에 세워진 작은 탑은 거북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거북이 탑(Thap Rua)으로 불린다. 이 호수에선 지금도 거대한 거북이들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것들은 250㎏정도 된다고 한다. 19세기에 이 호수 가장 자리에 세원진 옥썬사원(Ngoc Son)은 짧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황금거북 모형도 있다.

  하노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인 이 호수에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시간엔 운동을 하러 나오는 시민이 많고, 대낮에도 주변 아이스크림 가게와 분위기 있는 카페들은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려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든다. 호숫가 주변의 도로에는 항상 오토바이와 시클러, 자전거가 붐비는 것도 이색적이다.  

 

 

 

* 호안키엠호수 주변에는 하노이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호수 주변의 한 카페, 손님들로 가득하다.

 

 

정치의 중심, 하노이 바딘광장(Ba Dinh Square) 

 


  하노이의 중심인 바딘광장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호치민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1945년 호치민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한 곳으로 건국기념일이면 수많은 시민들이 모이고 평소에도 호치민 묘를 찾아오는 시민들과 관광객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여의도광장과 같은 곳이다. 지금 국회의사당과 공산당 본부건물 등 정부의 각 부처가 모여 있다. 

 

 

 

 

 

웅대한 호치민 능묘(Lang Chu Tich Ho Chi Minh)

 

 

  호치민 능묘는 국회의사당과 공산당본부 건물 앞 바딘 광장에 위치해 있다. 묘를 보는 순간 나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을 보고 베트남 시민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짐작케 했다.  

  호치민은 1945년 베트남 독립선언부터 1975년 베트남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반제국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이다. 호치민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졌던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는 비록 사랑하는 조국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사상과 지도력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베트남 국민들을 단결시켜 마침내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물리치고 조국의 통일을 이루어 낸 장본인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역사를 이어가며 후손들에게 삶의 등대가 되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용기와 열정의 불꽃이 된다. 아마 세기를 넘나들며 호치민만큼 온 국민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지도자는 드물 것이다. 베트남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호치민은 여전히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마음의 연인처럼 간절하게 사랑받고 있다. 호치민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지금 베트남은 발전하는 나라로 떠오르고 있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닮아가려는 베트남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호치민 영묘는 1973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년간의 공사 끝에 1975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호치민은 그의 유언에서 “내 시체를 화장하여 재를 셋으로 나눠 베트남 북부, 중부, 남부에 있는 구릉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그가 베트남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바딘 광장에 다낭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지은 웅장한 건물 안에 안치되어 있다. 묘의 외부는 연꽃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내부에는 베트남의 민족적 영웅인 호치민 주석의 유해를 모신 방과 호치민 주석의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투쟁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묘소에 들어가려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묘소 200m 전방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카메라나 캠코더 등은 보관소에 맡기고 입장해야 한다. 반바지와 민소매 옷, 샌들 차림을 해서도 안 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묘를 관람하기 위해 입장할 수 없었다. 호치민의 시신은 지금 방부처리를 위해 러시아로 가 있기 때문이었다. 시신을 잘 보존하려면 1년에 한 번씩 방부처리를 해서 밀랍형태로 보존하는데 1년 중 3개월은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방향을 달리하여 찍은 호치민 능묘, 능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우리 일행들 *

 

 

하노이 주석궁(Presidential Palace, Hanoi)

 


  주석궁(主席宮)은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대통령 관저이다. 이 건물은 1800년대 지어진 건물로 당초 프랑스 총독부 건물로 사용하였으나 1954년 프랑스 군을 몰아낸 후 흰색 건물을 금색 건물로 개조하였다.

 

  그런데 국가 주석으로서 당연히 이곳에서 살아야 할 호치민은 이를 사양했다. 전쟁 중인 나라와 고통 받는 국민을 놓아두고 나 혼자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이유로 호치민은 주석에 재임하는 동안 주석궁에서 살지 않고, 근처에 있는 정원사의 남루한 집을 관저로 사용했다. 이 집은 지금 외국의 손님을 접대하는 영빈관으로 사용한다.

 

 

 

* 금빛 찬란한 주석궁, 그러나 소박하게 살았던 호치민은 이곳을 사양했고, 지금은 영빈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주석궁 주변 호치민 유적지

 


  호치민 묘에서 도보로 2-3분 정도 이동하면 호치민의 생가와 관저를 볼 수 있다. 주석궁 맞은편이다. 1954년부터 1969년까지 호치민이 살았다는 2층 고상식 주거와 관저의 터로 최고 지도자의 가옥이라고는 생각하기에는 너무 소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호치민이 10년 이상 거주했다는 이 저택은 푸른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잉어가 노니는 연못이 있다. 작은 연못 주변에는 열대 과일이 달린 정원이 있다. 그리고 연못 주변의 나무 가운데 특이한 것은 부처목다. 나무줄기(기둥) 옆 땅으로 솟아난 뿌리의 형상이 작은 부처들 같다.

  검소했던 호치민은 주석궁을 두고도 화려한 곳에 살 필요가 없다며 전기공이 살던 집을 자신의 거처로 삼고 그가 집무할 때도 근처 소박한 건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작은 책상과 의자, 시계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집무실 옆에 있는 조그만 차고에는 러시아에서 선물로 받은 차량이 전시되어 있는데 호치민은 이 차도 잘 이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검소하고 소박한 서민적인 성품을 여기서도 느낄 수가 있다. 

  놀라운 것은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 주석이 생전에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牧民心書)>를 가장 즐겨 읽었다는 사실이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호치민은 일생을 자신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한 진정한 애국자이며, 특히 호치민의 공직관은 한국의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이다.

 

  호치민은 이 책을 매우 아끼고 익히며, 하물며 잘 때에도 목민심서 책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그는 다산의 생각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를 국부로 만든 철학이 목민심서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역만리 하노이에서, 그것도 베트남인이 민족 영웅으로 받들고 있는 호치민이 조선시대의 정약용을 일종의 공직자 멘토로 삼아 목민심서를 읽고 공직관을 더욱 투철하게 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 프랑스군이 침략했을 때는 전기공의 집이었고, 1954~1958년에는 호치민 주석이 이 집을 사용했다 함

 

 

* 호치민 거주지의 연못과 호치민과 집무실의 비품, 그리고 러시아로부터 선물로 받은 자동차 * 

  

호치민 박물관

 

  

  좋은 선조를 두었다는 사실에 마음 뿌듯해 하며 발길을 옯기니 이번에는 호치민박물관이다. 호치민 박물관은 1990년 5월 19일, 호치민 탄생 100년이 되는 날에 개관했다. 호치민의 묘 옆에 있는 하얗고 멋있는 건물로 내부 장식은 참신하면서 예술적이다. 구소련의 원조를 받아 레닌박물관의 전문가가 설계와 내부자익을 담당했다고 한다.

 

  호치민 생가의 모형, 애용품, 편지, 혁명과 관련되는 것이 전시되고 있으며,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관련 된 것들과 세계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되고 있다. 영어, 불어, 러시아어 가이드가 있으므로 부탁하면 안내해 준다.

 

 

 

 

 

기둥이 하나인 사원 일주사(일명 한기둥사원)

 

 

  호치민 박물관과 생가를 지나니 일주사(一柱寺)가 눈에 들어온다. 한 개의 기둥위에 불당을 얹었다 해서 한기둥 사원으로 불리는 이곳은 한국과 베트남 수교 10주년 기념우표에도 등장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1094년 리 타이 통 왕 때 축조된 것이며 탑 자체는 아담하고 소박했다. 일주사는 중심에 기둥이 하나만 있어 멀리서 보면 물위에 피어오른 연꽃처럼 보인다.

  리왕조(Ly Dynasty)의 통치하에 있던 1049년에 지어진 일주사는 독특한 건축양식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유물이다. 리타이통(Ly Thai Tong)왕은 관세음보살이 그를 연꽃이 있는 곳으로 이끄는 꿈을 꾸고 난 후 연꽃모양을 닮은 절을 지어 천일동안 기도를 하여 왕비가 왕자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이 사원을 끼고 왼쪽으로 돌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그날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 전설을 믿고 자녀를 낳기 위하여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



하노이 거리에 넘치는 오토바이 물결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사람들의 주 교통수단은 역시 ‘세 마이(Xe máy)’라고 부르는 오토바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자동차의 보급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주로 사용한다. 하노이 거리는 수많은 오토바이와 군데군데 끼어있는 자동차로 몸살을 앓고 있다. 출퇴근 시간이나 시내 중심가에서는 마스크를 하지 않고서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대기오염 정도도 심각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자동차가 쉴 새 없이 경적을 눌러대도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없다. 한국에서는 시비 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신호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신호라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하노이의 명물인 씨클로(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하노이 시내를 관광한다. 씨클로는 이동의 효율성과 기동성이 너무 낮아 더 이상 대중교통 수단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여전히 인기 있는 관광 아이템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내관광 코스에는 이 씨클로 체험이 들어가 있다.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호안키엠 호수를 중심으로 많이 몰려 있다.

 

그런데 우리 팀은 골프장에서 이용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카트를 탔다. 사람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씨클로에 비하면 기동성이 훨씬 낫다. 카트 역시 무턱대고 밀려드는 오토바이 부대와 금방이라도 충돌할 것 같아 불안했지만 용케도 잘 피해 다녔다.  30여 분간 시내 골목을 달렸는데 매연 때문인지 코와 목이 심상치 않았다. 

 

 

 

* 하노이 시내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물결과 관광객이 즐겨 타는 씨클로와 카트차

 

 

베트남의 문화 '수상인형극(WATER PUPPET THEATRE)' 

 

  하노이를 여행한다면 빠트리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수상인형극이다. 무아로이누옥(Mua Roi Nuoc) 또는 수상인형극은 그 기원을 10세기 델타의 홍강(Red river)에 둔 독특한 예술이다.

  베트남의 수상인형극은 처음에 농민들이 수확기에 연못이나 호숫가에서 하던 축제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궁중 문화로 발전을 하고 더 나아가 현재는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공연으로 성장했다. 베트남 국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20여 개국이 넘는 나라로 가서 해외공연을 하고 세계 인형제에서 수상한 유명한 공연이다. 수상인형극은 베트남 농민들의 삶을 배경으로 모내기, 낚시, 춤 등 여러 가지 주제의 단막극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는 여행의 일정상 하롱베이에서 관람했다.

  오늘날 수상인형극은 물이 고인 무대가 있는 곳에서 극이 행하여진다. 무대 한켠에 5-6명의 사람으로 구성된 전통 베트남 오케스트라가 배경음악을 연주해 주고, 그 장단에 맞추어 우스꽝스러운 인형들이 역동적이고 리얼한 공연을 펼친다. 인형을 조정하는 배우들은 무대 뒤에서 긴대나무 막대와 수면 아래 숨겨진 끈으로 인형을 조종한다.

  작물을 수확하는 얘기들, 고기를 잡는 얘기들, 온갖 축제에 대한 얘기들이 주요 하이라이트이다. 전설과 역사 또한 이 단막극을 통해 등장한다. 특히 일상생활을 그린 많은 소극들은 우리나라의 탈춤처럼 풍자와 위트를 연출한다. 각양각색의 인형들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50분의 공연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인형극이 끝난 뒤에는 인형을 조정한 사람들이 나와 인형이 어떻게 조정되는지 알려주고 관객에게 인사를 한다. 

 

 

* 베트남 문화를 대표하는 수상인형극 *



  하노이를 둘러보고 특별히 느끼는 것은 동남아 어느 도시 못지 않게 활기차다는 것이다.  전후의 폐허를 딛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정부와 온 국민이 적극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도로와 건물을 짓느라 베트남 전역은 공사 중이다. 베트남 남쪽지역에는 보통 3모작이 가능하고 하노이가 있는 베트남 북쪽 지역에는 2모작이 가능하다. 드넓은 농토에서 나는 농산물과 열대과일은 말할 것도 없고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도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 특유의 근면성에 의욕과 열정이 더해진다면 베트남은 하루가 다르게 신흥 발전국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 땅 도처에는 라이따이한으로 살아오면서 아픔을 딛고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동경해왔을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광명한 날이 올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 하노이의 과일 파는 아가씨의 미소가 밝다. *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