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남부
망중한을 누릴 수 있는 호치민과 나트랑
망중한. 바쁜 가운데 잠깐 얻어 낸 틈. 마냥 여유롭기만 해서는 결코 망중한이 아니다. 잠깐의 '틈'이라도 감사하게 여길 만큼 바쁘거나 치열한 가운데 있어야 참으로 망중한을 누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베트남은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작은 사치를 부려 떠나온 여행자에게 망중한을 선물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거니와 그 누구보다 치열한 일상을 사는 베트남 사람들 특유의 소박한 망중한에 허를 찔리기에도 딱 좋은 곳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그 순간 '틈'의 가치를, 눈을 감아도 눈이 부신 베트남의 태양만큼이나 뜨겁게 느낄 수 있을 테니.
에디터트래비 글·사진Travie writer 서진영(호치민·나트랑),Travie writer이세미(다낭·호이안·후에)
취재협조 베트남항공 02-757-8920, 베트남 광남성관광청 (+84)510-381-1243
Vietnam Navigator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위치한 베트남. 지도를 보는데 얼핏 알파벳 'j'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는, 세로로 길쭉한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남북으로 긴 해안선은 장장 3,444km에 달한다. 우리나라 남북을 합한 길이보다 약 1.5배 정도 긴 셈이다. 그런 까닭에 베트남은 북부, 중부, 남부로 구분한다.
북부에는 수도 하노이가, 중부에는 후에, 다낭, 호이안, 나트랑 등의 휴양지가, 남부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정신적인 수도 호치민이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후에, 다낭, 호이안, 나트랑으로 이어지는 베트남 중부의 매력적인 휴양도시들이 <트래비>에 반가운 손짓을 보냈다. 동양의 파리라 불리는 호치민에서 베트남 중부까지. 뜨거운 미소로 손짓하는 베트남을 만나 보자.
●city 1 호치민 Ho Chi Minh
Smile Yellow 헤드라이트가 밝히는 호치민의 속살
베트남 현지에서 활동하는 여행가이드에게 들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가끔 여행자들이 심드렁하게 질문을 한단다. "도대체 저 많은 오토바이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거래요?" 그러게나 말이다. 노련한 가이드는 이렇게 답을 한단다. "제 갈 길 가는 것이 아닐까요?" 당연한 말씀. 그만큼 많은 오토바이들이 밤낮없이 호치민을 밝히는데 낮에는 색색이 고운 헬멧이, 밤에는 반짝반짝 헤드라이트가 호치민 사람들의 표정을 대신 말해 준다.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에 발을 주춤주춤, 오도 가도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한눈에 여행자. 베트남 여행자들 사이의 구호랄까 '자나깨나 오토바이 조심'이 실감난다. 그때마다 초록색 제복의 호치민 TOURIST SECURITY가 의기양양 다가와 카메라 스트랩은 손목에 감고 가방은 한쪽 어깨에 걸치지 말고 사선으로 매라며 단단히 주의를 준 다음 오가는 오토바이들을 잠시 막아 주는데 그럼 그들을 따라 삐악삐악 유치원생처럼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넌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학습의 결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오토바이를 향해 '네가 피해 가!' 무언의 시선을 보내며 길을 건널 수 있게 되니 이제부터 헬멧 아래 가려진, 헤드라이트에 그늘진, 마치 노란 스마일 아이콘을 닮은 호치민 사람들의 표정이 두 눈동자에 맺히기 시작한다.
오늘날 베트남의 수도는 북부의 하노이. 그러나 베트남 제1의 도시는 역시나 호치민이다. 베트남에서 인구도 가장 많고, 1인당 국민소득도 가장 높은,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 호치민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 지배기간과 20여 년의 남북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의 수도로 군림한 위용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통일 후 공식 지명이 호치민으로 개칭되었으나 베트남인들은 물론 우리에게도 이전의 지명인 '사이공'으로 더욱 친숙하다. 사이공강, 사이공 맥주 등, 베트남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것에는 어김없이 '사이공'이 붙는다.
베트남을 공산주의 국가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베트남은 민주주의적 정치요소와 자본주의적 경제요소를 도입한 사회주의공화국이다. 호치민이 여느 메트로폴리스 못지않게 활기로 넘치는 동시에 특유의 여유 또는 나른함을 가지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 결국 바쁘게 시동을 거는 오토바이는 그들의 시간을 함께 나눌 가족, 연인, 친구의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낮과 밤, 다른 듯 익숙한 풍경
호치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곳을 딱 한 곳만 꼽자면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벤탄시장Ben Thanh Market이다. 호치민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가보아야 할 명소로 손꼽히는 이곳은 호치민 사람들이 갖가지 생필품을 사고파는, 우리나라 남대문시장과 비슷한 형태의 전통시장이다.
1914년 프랑스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그후 100년 가까이 호치민의 일상이 숨쉬고 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벤탄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나절까지는 건물 내의 시장이, 해질녘부터 자정까지는 다양한 좌판과 먹을거리 노점이 늘어선 야시장이 구경꾼들로 북적인다. 전통시장답게 호객과 흥정은 시장 안팎과 낮밤이 다르지 않다.
한국인 여행자들도 꽤나 오는 모양이다. 베트남 대표 기념품인 커피 매장을 지날 때면 서툴지만 우리말로 인사하는 호객꾼들이 상당하다. "언니, 언니, 커피 좋아. 다람쥐똥 커피도 맛나." 가격을 묻고 비싸다는 표시로 몇 차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이내 계산기를 들이밀며 원하는 가격을 눌러 보라는 통 큰 제안을 해오니 안 사고 지나칠 수 있나.
한편 사지는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구경만 하는 여행자들이 영 성가신지 미동도 하지 않고 날 선 눈빛을 보내는 상인들도 있다. 이런저런 풍경이 재미있는지 역시나 여행자로 보이는 청년이 시장 바닥에 앉아 그 순간을 재빠르게 스케치한다.
시장 안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니 시장 밖이 밝아진다. 규모는 낮의 벤탄시장보다 훨씬 작지만 호치민의 밤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물품과 먹을거리들이 샛노란 천막 아래 펼쳐진다. 모두가 환한 불빛에 취해 일하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물건을 사고파는 것보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기 바쁜 듯이 느껴진다.
그 사이를 비집고 노점에 앉아 베트남식 빈대떡 빤세우를 비롯한 몇 가지 주전부리와 사이공 맥주, 코코넛 주스를 한 테이블 가득 차게 주문하니 적어도 그 순간의 나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다. 통하지 않는 말 대신 입 꼬리 힘껏 올라가는 함박웃음으로 대화 종결.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호치민, 벤탄시장의 일부가 된다.
위치 Le Loi. Q 1, Ho Chi Min / 개장시간 벤탄시장 오전 6시~저녁 6시, 야시장 오후 6시~자정
▶T clip. 사이공의 낮과 밤 즐기기
사이공의 속살 가까이 스피드 보트로 사이공 유람
사이공 강에서 보는 호치민은 어떤 모습일까? 귓가에 끊이지 않았던 오토바이 소리가 잠잠해지니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호치민 본연의 풍경이 두 눈에 들어온다. 호치민을 여행하는 동안 유일하게 여유롭고 시원하다고 느껴졌던 순간이랄까.
스피드보트가 데려간 곳은 메콩강 삼각주의 모습을 재현한 작은 유원지 빈쿼이Binh Quoi 마을. 우리네 민속마을과 닮아 있는데 호치민에서는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웨딩 촬영지로 인기가 좋다고. 전통 음식을 주막에서 바로 만들어 파는 뷔페도 인기다. 산책과 크루즈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사이공 리버투어로 호치민의 속살을 더욱 보드랍게 느껴 보자.
위치 108 Ton Duc Thang St, Dist. 1, Ho Chi Min
문의 (+84)86-290-9410 예산 1시간 1인 VND50만(최소 2인 이상 출발, 4인 이상 그룹은 20% 할인)
어두운 밤에도 빛나는 사이공 사이공 스카이덱
도심 한 가운데 우뚝 솟은 68층 높이의 BITEXCO FINANCIAL TOWER. 베트남을 상징하는 연꽃을 형상화한 건축물로 호치민 어디에 있든 고개만 들면 보이는 호치민의 랜드마크. 이곳 49층에 호치민시를 조망할 수 있는 스카이데크가 있다. 어두운 밤에도 강을 따라 이어진 대로에 불이 밝으니 낮의 사이공 강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호치민의 야경이 궁금하다면 이곳이 명당.
위치 36 Ho Tung Mau, Phuong Ben Nghe, Quan 1, Tp. Ho Chi Minh 문의 (+84)83-9156-156www.saigonskydeck.com개장시간 일~목 오전 9시30분-오후 9시30분 금~토 오전 10시~밤 10시(종료 45분 전까지만 발권) 가격 성인 VND20만, 4~12세 아동·65세 이상 어르신·장애인 VND13만
●city 2 나트랑 Nha Trang
Pearl Blue
진주빛 바다가 속삭인다
망망대해에서 해안선 가까이 바닷길을 헤쳐 온 원양어선, 갑판 위 포르투갈 선원 하나가 동료들을 급히 부른다. "저길 보라고, 저기 반짝반짝 빛나는 게 뭐지?" 나트랑Nha Trang은 '하얀 집'을 뜻하는 말이다. 나트랑에 가장 먼저 정착한 이방인인 프랑스 약제사가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나트랑 해안을 지나는 선원들의 눈에 띄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베트남어로 Nha는 집, Trang은 하얗다는 의미. 현지에서는 '나쨩'이라 부른다. 언덕 위의 하얀 집만큼이나 진주빛을 띤 해안 모래밭이 반짝반짝 빛을 반사하는 나트랑. 호치민이 동양의 작은 파리라면 이곳은 동양의 작은 나폴리, 베트남의 지중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아름다운 해양도시다.
여느 인도차이나 반도의 국가들처럼 베트남의 날씨는 우기와 건기의 구분이 있지만 평균기온 26도를 넘나들고 언제든 비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기본적으로 덥고 습하다. 그러나 나트랑은 해를 피할 수 있는 약간의 그늘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이 더위를 즐길 수 있을 만큼 뜨거우면서도 쾌청한 날씨가 계속된다. 우기도 10~12월까지로 비교적 짧은 편.
석회석이 많아 대체로 회색빛 파도가 일렁이는 여느 베트남 해안과는 달리 맑고 푸른 바닷물도 마음을 달뜨게 한다. 그런 까닭에 나트랑은 프랑스 지배시절부터 유럽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사랑받아 온 베트남의 숨은 보석이다.
6km 이상 곧게 뻗은 해변과 해변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주 도로가 나트랑의 중심가를 형성한다. 해변과 해변이 내다보이는 주 도로의 호텔과 노천카페에는 여지없이 해수욕과 일광욕을 즐기는 유럽인들이 붉게 익은 몸을 내보이는 한편 도로 주변으로 나트랑 사람들의 일상이 펼쳐진다. 도시의 구조와 분위기가 얼핏 우리나라 부산의 광안리를 연상케 한다.
나트랑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베트남 전쟁 때 우리나라 백마부대가 나트랑 근교에 주둔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한국에 굉장히 우호적인데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대부분이 전쟁보다 대민사업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나트랑은 박영한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90년대 초반 월남전 참전병사의 삶을 다뤄 반향을 일으켰던 TV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바쁘게 관광지마다 점찍고 돌아오는 여행보다 그저 골목골목을 걷기 좋아하는 나는 시간을 쪼개 나트랑의 골목골목을 걸어 보았다. 그러다 캐주얼한 체크무늬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Hi"하며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는 중년의 신사 한 분을 만났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그는 제리 아저씨. 상대적으로 이방인이 적은 나트랑이기에 한눈에 이방인처럼 보이는 녀석을 발견하고는 어지간히 반가웠나 보다.
간단한 통성명과 악수로 인사를 한 다음 그의 첫 질문. 나트랑에 얼마나 머무느냐는 것. 단 3일. 그는 깜짝 놀란, 안타까운 눈으로 왜 3일뿐이냐 되묻는다. 짧은 일정으로 베트남 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에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확신해. 네가 베트남의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의 말이 맞았다. 눈부시게 환한 태양은 따사롭게 눈가를 간질이고, 태양 빛에 낮에도 반짝반짝 별빛을 쏟아내는 바다는 고요하게 귓가를 간질이고, 고운 진주빛깔의 모래밭 해변은 보드랍게 마음을 간질였다. 그렇게 나의 오감이 아지랑이처럼 돋아 싱그럽게 꽃핀 곳, 나트랑이었다.
이방인이 반한 나트랑의 반나절
이곳 사람들은 어떤 색, 어떤 향을, 어떤 맛을 좋아할까? 여행을 할 때 늘 궁금해지는 것들. 그럴 때마다 가까이 있는 시장을 찾아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트랑 여행자들에게는 담 시장이 더욱 잘 알려져 있지만 조금 더 로컬 마켓에 가깝다는 곳이 있다고 해 서둘러 택시에 올랐다. 어떻게 발음해야 하나 입을 달싹거리다 택시 기사에게 지도를 내밀고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그가 내려준 곳은 쏨모이 시장Xom Moi market이다.
초대형 창고형 건물에 펼쳐진 앉은뱅이 가게들. 쏨모이 시장의 첫인상은 우리의 시골 오일장과 같았다. 싱싱한 과일을 파는 가게 옆으로 다양한 종류의 쌀과 국수면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지고 그 뒤로 생선 파는 가게와 육류 가게, 찬거리와 주전부리를 파는 노점이 끝없이 이어진다.
베트남 전통 모자 '농'을 쓴 현지인 사이로 원피스를 차려 입은 채 카메라를 든 여인 하나가 어슬렁거리니 온갖 시선이 모여든다. 반갑게 눈인사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한쪽으로 비켜서라고 다그치는 이도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도 맛보기 음식을 내미는 고마운 손이 있으니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닮은 구석이 있다. 자연의 빛을 품은 물품들이 그득그득한 쏨모이 시장은 겉은 곧 허물어질듯 슬레이트 지붕과 천막을 덧씌운 모습이었지만 그 속은 잘 된 반죽처럼 차지고 단단했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는 조금 더 깊숙이 골목구경을 한다. 부지런히 쏘다녔더니 뒤꿈치가 까졌다. 약국에 들어가 주민들 사이에서 밴드 한 줄을 사서 붙이고 바늘 눈금이 파르르 떨리는 체중계에 올라가 몸무게도 재 본다. 나트랑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새삼 느낀다. 일상에서 떠나왔지만 여행의 순간도 생활의 일부라는 것을.
쏨모이 시장┃위치 49 Ngo Gia Tu, Nha Trang
개장시간 오전 6시~오후 6시
<출처> 2012. 11. 19 / 여행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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