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 요리
백합 품 속에 담아둔 서해를 맛보다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안정수 취재기자
국내의 대표적인 쌀 생산지를 찾아보면, 호남평야로 유명한 김제가 꼽힌다. 김제는 한반도 지형상 보기 드문 평야가 발달해, 우리나라의 쌀 생산지 중 보배로 통한다. 이같이 평평하고 고른 김제의 땅이 서해와 만나 넓은 갯벌을 이루니, 김제의 쌀처럼 갯벌에도 보물이 있을 터. 김제 ‘심포항’으로 보물찾기에 나섰다.
서해 바닷물이 빠진 후, 드러난 갯벌은 참 고요하다. 축축한 진흙의 뻘밭은 산이나 바닷속에 비해 조촐하기까지 하다. 가끔 숨구멍 언저리에서 주위를 살피는 게가 심심한 재미를 던질 뿐. 이처럼 조용한 갯벌이, 티 내지 않는 활동이 있으니 바로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다. 요즘 말로 ‘볼매(볼수록 매력)’이다. 육지에서 생긴 오염물질을 군말 없이 받아주는 것이 고맙고, 갯벌의 미스터리한 정화기능이 신비하다. 갯벌이 무엇을 내놓아도 감지덕지 받아야겠다.
*심포항 근해 풍경, 만경강이 흘러드는 곳으로 간척 공사가 한창이다. 이 풍경도 몇 년이 지나면 크게 변하게 된다
김제 ‘심포항’, 자연의 콩팥으로 불리는 갯벌과 이곳에서 자란 ‘백합’을 만났다. 100가지 무늬의 껍데기를 벌리니, 품 속 고스란히 담아 놓은 서해가 드러난다. 그전에 백합과 심포항의 이야기 속으로 가보자.
백합은 거주지를 깐깐하게 고른다. 깨끗한 민물이 들어오는 하구갯벌이 이들의 터전. 바닷물의 염분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안 된다. 또 모래펄이 곱지 않으면 계속 조류를 따라 자리를 옮긴다. 게다가 분위기까지 따지니, 파도와 바람이 심하지 않은 평온함을 좋아한다. 바다생물 중 이보다 더 귀족적인 패류가 있을까 싶다.
*백합, 약 3~4년 정도 산 백합은 주먹의 반만한 크기다
이렇게 까탈스러운 고집을 부려가며, 오래 살면 6년까지 산다고 한다. 그동안 껍데기에 새겨진 무늬가 100가지라고 해서 불린 이름이 ‘백합’이다. 보기 좋은 조개가 맛도 좋으니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진상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근대까지 경남의 하동포구, 김제의 심포일대에서 대량으로 수확됐지만 점차 그 양이 줄어, 하동포구에서는 보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지금은 국내 백합 생산량의 절반가량이 이곳 동진강과 만경강이 흘러드는 김제시와 부안군 일대 갯벌에서 채취된다.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백합 대부분이 일본에 수출되기 시작한다. 당시 국내 수산물 중 단일품목으로 외화벌이에 1등을 차지하는 효자였으나 정작 현지 어민은 귀한 백합을 먹기 어려웠다고… 그래서 백합을 밥과 함께 쑤어 먹기 시작한 것이 백합죽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구구절절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된 삶이 담긴 서민의 향토음식 중 하나를 만난 셈이다.
*외로이 바다와 심포항를 지키는 어선 모습에 기분이 짠하다
심포 갯벌은 조수간만의 차가 다른 곳에 비해 넓은 편으로 백합을 비롯해 다양한 조개의 집산지다. 이 갯벌의 배후 항구가 ‘심포항’이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수백 척의 어선이 활동하는 큰 항구였다. 지금은 어업의 쇠퇴와 더불어 새만금방조제로 인해 쓸쓸히 바다를 지키는 어선 몇 척이 외로이 떠 있다. 조금은 쓸쓸한 분위기의 항구에 바람은 어찌나 거센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북서풍이 바다를 건너와 만난 육지가 반가운 모양이다.
*[왼쪽부터]심포항 해안가의 조개구이 시장촌 / 도매가로 백합, 죽합 등 싱싱한 조개도 구할 수 있다
심포리 초입에서 폐업한 식당이 더러 눈에 띈다. 과거의 영광에서 조금은 빛바랜 오늘날 어촌 모습에 마음 한편이 아리다. 좀 더 항구에 가까워지면 영업 중인 식당과 조개구이 시장촌을 볼 수 있다. 그 중 한곳에서 백합으로 만드는 다양한 음식을 취재할 수 있었다. 평일이기도 하고 예약손님이 오기까지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취재하란다. 전라도 특유의 후덕한 말투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주인장을 따라 조리를 살펴봤다. 주방문을 나서더니 백합 30여 개를 가져오신다. 왜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으시냐 묻자. “냉장고가 따로 있나. 바람 부는 그늘에 바닷물 넣은 냄비가 냉장고지. 여기 넣으면 일주일은 가뿐히 살아 있다”며 흐르는 물에 조개껍데기를 박박 문대며 씻는다. 조개의 크기도 평소 보아오던 백합보다 커 보인다.
“생으로 먹을 건 대자가 좋고, 탕이나 찜으로 먹는 건 중자가 괜찮지”
*[왼쪽부터]백합죽에 들어갈 조갯살을 잘게 썬다 / 당근과 쌀을 먼저 끓이고 조갯살과 호박을 넣은 후 잔불에 졸인다
*백합찜은 은박지에 싸서 약 10분 정도 찌면 적당하다
백합 8개를 순식간에 발라내 살을 모아 잘게 썰어 죽을 쑤는 냄비에 넣는다. 그리고 은박지를 꺼내, 백합 10개를 각각 통째로 싸서 찜통에 넣는다. 백합탕은 따로 간할 필요가 없다며 그냥 맹물에 작은 백합 몇 개를 골라 무심하게 넣고 끓인다. 그리고 남은 조개는 상추를 깔아둔 접시에 그냥 올려놓는다. 이걸로 조리 끝인가 싶어 물어보자. “다 끝났지. 국에는 파하고 고추 좀 넣으면 되고 죽에는 계란 풀고 참기름만 넣으면 되지”
*백합으로 채워진 한상
백합죽, 백합회(생합), 백합찜, 백합탕 등 조개 하나로 이렇게 푸짐한 한상을 받아보기도 처음이다. 일단 뜨거운 백합탕 국물을 훌훌 불어가며 연거푸 떠먹는다. 미진하게 돌던 한기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짭조름하고 시원, 칼칼한 것이 백합죽을 이어서 한입 먹으니 궁합이 좋다. 조개탕에는 철분, 글리코겐 등 소화를 돕는 성분이 많다. 위가 안 좋은 사람에게 특히 좋다고 하며, 과음 후 해장용으로도 제격이다.
*[왼쪽부터]백합탕 / 백합죽
백합죽은 냄새부터가 진하다. 평소에 맛본 조개죽과 비교하면, 투툼한 조갯살이 씹히는 게 쫄깃하고, 죽에 배인 백합 고유의 맛이 부드럽게 입안에서 퍼져 진하게 남으니 음미를 멈출 수 없다. 부드러운 죽과 연한 조갯살이 한데 어울린 백합죽 풍미에 한 그릇은 금세 뚝딱 해치웠다.
조개껍데기가 맞물린 사이로 칼을 살짝 넣고 돌리면 백합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겨울 백합에 대해 주인장은 “봄이 되면 백합이 자라기 시작하고 겨울이 되면 성장을 멈춘다”라며 “요즘 백합이 야무진 게 맛도 좋고 탕을 끓이면 감칠맛이 다른 계절의 탕보다 좋지”라고 설명한다.
조갯살에 살짝 초고추장을 묻혀 한입에 먹는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금세 입안에서 사라진다. 조갯살이 익으면 쫄깃한 식감이지만 생으로 먹는 회는 녹는 듯 혀를 타고 넘어간다. 초고추장 없이 생을 씹어보니 짜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바닷내음이 느껴지고 깔끔한 식감을 전한다.
*[왼쪽부터]백합회 / 백합찜
조개회를 잘 못 먹는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 백합찜이 있지 않은가. 은박지를 뜯어 살짝 입을 벌린 조개가 보이자 입안에 다시 침이 흥건하다. 조개찜 애호가로서 본 기자의 먹는 법을 공개한다.
▶조개 윗껍데기를 뗀다.
▶숟가락으로 조개 관자를 밀어 껍데기와 분리한다.
▶ 한입에 조갯국물과 같이 입안에 투척.
별다른 표현이 필요 없이 별미다. 쫄깃한 조갯살이 통째로 씹히고, 고여 있던 국물이 시원한 맛을 돋운다. 커다란 조갯살은 이미 넘어가고 관자만 달랑 남아 껌처럼 씹힌다.
백합의 향연으로 입이 아주 호강했다. 배가 불러도 조갯국물은 시원하고, 회는 부드럽고, 찜은 쫄깃했다. 북은 칠수록 맛나다고 했던가. 백합은 껍데기가 열릴 때마다 맛나다. 2012년 껍데기가 열렸다. 백합 조갯살처럼 부드럽고, 쫄깃하고, 시원하고, 살맛나는 새해가 되길 기원해본다.
[김제 가는 방법]
대중교통
* 버스
서울강남터미널-부안, 하루 14-15회, 3시간 30분 소요
동서울터미널-부안, 하루 5회, 4시간 소요
전주공용터미널-부안, 15분 간격, 1시간 20분 소요
* 기차
<KTX> 서울-김제, 하루 6회, 2시간 소요
<새마을, 무궁화> 서울-김제, 하루 15회, 2시간 40분, 3시간 10분 소요
[심포항 가는 방법]
호남고속도로 → 전주IC → 군산방면 12.5km → 목천교 → 김제방면 6.8km → 만경입구 10km → 만경 → 광할방면 11km → 심포항 서해안고속도로 → 서김제IC → 만경, 군산방면 → 만경입구 → 광할방면 11km → 심포항
* 취재협조 : 연서활어회 (전북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502-30 / 063-543-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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