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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서울

북한산둘레길(18~20구간) : 도봉옛길-방학동길-왕실묘역길)

by 혜강(惠江) 2012. 1. 30.

북한산둘레길(18~20구간)

도봉옛길-방학동길-왕실묘역길

                                     자연 속에서 문화와 역사를 호흡하다.

 

·사진 남상학

 

 

 

  둘레길 걷기 일곱째 날이다. 우이령길을 제외하고 둘레길 걷기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18구간인 도봉옛길에서부터 19구간인 방학동길을 거쳐 20구간인 왕실묘역길까지 7.8㎞를 걷는다. 특히 이 구간은 숲길을 걸으며 조상의 정취와 조선 왕실의 역사를 공부하는 뜻 깊은 길이어서 마지막 걷기를 의미 있게 장식하는데 알맞다.

 

18구간(도봉옛길) : 조상의 정취를 간직한 숲길 (3.1㎞, 1시간30분 소요)

 

 

 18구간은 다락원-국립공원생태탐방연수원, 청소년 수련원-도봉탐방지원센터, 도봉서원, 바위글씨 - 능원사-도봉사-무장애탐방로입구-시비와 신도비-윗무수골-무수골(도봉옛길 날머리, 방학동길 들머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둘레길 18구간인 도봉옛길은 다락원에서 오르막 언덕길을 오르면 유사시 적을 침투를 방어할 수 있는 구조물이 있다. 여기서는 도봉산 능선이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북한산(北漢山)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는 도봉산은 산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으로 자운봉·만장봉·선인봉·주봉·우이암과 서쪽으로 5개의 암봉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오봉 등 많은 봉우리가 있다. 둘레길을 걷는 동안 위치와 방향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시야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날씨가 흐려 봉우리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더구나 봉우리는 기복과 굴곡이 다양하여 절경을 이뤘고, 산중에는 60여 개 사찰이 있는데, 이 구간에서 탐방할 수 있는 사찰만 해도 도봉산에서 이름난 사찰인 도봉사를 비롯하여 광륜사, 능원사 등을 들 수 있다. 

  참나무 숲 사이 돌길을 따라 내려오면 꽤 넓은 운동장을 지나고 광륜사(光輪寺)를 거쳐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지구에 이르면 북한산국립공원생태탐방연수원, 국립공원등산학교 건물이 나타난다. 도한 이곳에는 국립공원 도봉산지구 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이 주변은 도봉산 탐방로의 주요지역인 동시에 계곡이 수려하고 이 계곡에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이 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도봉서원(道峯書院)은 1573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창건 때 '도봉(道峯)'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69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였다.

 

  이어 선현의 배향과 교육에 힘쓰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고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에 단이 설치되어 향사를 봉행해오다가 6·25전쟁으로 중단되었으며,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주자학(朱子學)의 대가이며 서인 성리학의 종주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도봉서원을 참배하고 서원 앞 계곡에 남긴 글씨가 있다. 그의 ‘도봉동문(道峰洞門)’이란 바위글씨는 이곳이 명산의 입구임을 알려준다. 1578년(선조6녕) 창건된 도봉서원 아래에 형성되었던 서원동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도 있다.   

  서울시는 도봉서원이 지난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당 부분과 옛 사료상의 도봉서원 유적으로 소개된 각석군(刻石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고 또한 이들을 감싸고 있는 도봉산 계곡 자체가 조선시대 각종 문헌이나 시에 등장하는 전통적 경승지(景勝地)에 해당하므로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해 기념물로 지정했다. 시간상의 문제로 계곡에 흩어진 각석군을 살펴보지 못하고 그 대신 공원 안에 세운 시비의 정한모(鄭漢模) 시인의 시를 소리내어 읽고 발길을 재촉했다. 

  하나된 새날을 열고자
  나눌 수 없은 한 몸
  나눌 수 없는 한 마음
  하늘이시여
  이제는 하나로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발돋움 하늘에 
  닿았나니
  우리의 마음 돋움 하늘에 
  맞닿았나니 

  통일교를 지나면 능원사(能園寺)가 나타나고 참나무 우거진 숲길을 돌아 오르면 도봉사((道峰寺)에 이른다. 능원사는 현대에 창건된 절로서 눈부신 황금단청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본전인 용화전은 말할 것도 없고, 종각을 포함한 모든 건물과 산문까지도 화려한 황금색이다.

  그에 반해 도봉사는 고려 4대 임금 광종에 의해 국사(國師)로 임명된 혜거스님(899~974)이 창건한 사찰로 예스럽고 고풍이 서려있다.  14대 임금 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된 뒤 국사(國事)를 돌봤던 곳이다. 이후 도봉사는 전쟁과 종교분쟁,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다가 1961년 벽암스님에 의해 복원됐다. 대웅전에는 혜거스님이 모셔온 유형문화재 151호 석가여래철불좌성이 있다. 

  산정약수터에서 시작하는 220m의 목조데크를 설치하여 걸을 수 있도록 만든 무장애탐방로는 교통약자인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모두가 북한산 둘레길을 탐방할 수 있도록 조성한 구간인데, 전망데크에 서면 성인봉과 도봉 절경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우리가 탐방하는 날은 안개가 자욱하여 구름 속에 감춰진 영봉을 상상으로 줄길 수밖에 없었다. 

  구릉을 넘어서서 나타나는 것은 영의정 진주유씨(晋州柳氏)의 묘역이다. 영의정을 지낸 유양(柳讓)의 묘를 비롯한 묘역주변에는 신도비, 시비를 거쳐 내려오면 위무수골이다. 서울 도봉구 도봉2동 104번지 일대를 의미하는 무수(無愁)골은 ‘무수울’이라고도 한다. 아무런 걱정 근심이 없는 골짜기, 마을이란 뜻이다. 

 무수골이란 이름은 세종이 재위 당시 찾았다가 물 좋고 풍광이 좋아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 무수골에는 세종의 아홉째 아들인 영해군(寧海君)의 묘를 비롯해 단아한 모양새를 갖춘 왕족묘가 있다.

  무수골 마을은 이 곳은 서울 도심 근처에 있는 대표적 주말농장이다. 2007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되어 농촌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실 무수골은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도심 속 농촌이다. 

 

 

 

 

19구간(방학동길) : 학(鶴)이 품은 평화로운 마을 ‘방학동’ (3.1㎞, 1시간 30분 소요:)

 


 

                 

  19구간은 무수골(세일교)-도봉옛길 날머리, 방학동길 들머리)-Y자갈림길-능선사거리(방학능선)-쌍둥이 전망대-쉼터(나무벤치)-바가지 약수터-포도밭-정의공주묘(방학동길 날머리, 왕실묘역길 들머리에 이르는 길이다. 


  북한산둘레길 19구간은 ‘방학동길’이다.  방학동이란 이름은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란 뜻을 가진 우리말 ‘방아골’에서 유래했다.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몸이 비슷한 방학리(放鶴里)로 고쳐지면서 지금의 방학동이 되었다.  무수골 세일교에서 방학동길은 시작된다. 성신여자대학교 체육시설부지 앞에서 좌회전하여 이름 없는 약수터 옆으로 소나무 숲길을 따라 방학능선으로 올라간다.

 

  계속 오르다보면 도봉산둘레길의 명소이자 유일한 전망대인 쌍둥이전망대를 만날 수 있다. 나선형식의 계단으로 오르면 학이 알을 품은 형상을 한 방학동 전경과 도봉산의 주봉우리인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낮은 구름이 주변을 자욱하게 덮어 이들 봉우리들은 구름 속에 자취를 감췄다. 

  하는 수 없이 전망대 위에 설치해 놓은 전망사진대만 바라보고 아쉬워할 밖에. 날씨 좋은 날 다시 와 보리라 다짐하고 전망대에 설치해 놓은 벤 존슨의 ‘고귀한 자연’,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헤르만헤세의 ‘낙엽’, 예이츠의 ‘낙엽은 떨어지고’ 등 시를 읽어보고 발길을 돌려 내려와야 했다. 전망대 아래 난간에는 각자 소원을 적은 조각들이 즐비했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 묻노니, 그대는 어이해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 웃을 뿐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 복사꽃 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라네.

 

         -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 -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속세를 벗어난 선경(仙景)이다. 이백이 지은 시 가운데서 특히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는데, 극도로 절제된 언어 속에 깊은 서정과 뜻을 응축해 내는 절구(絶句)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미 푸른 산에 동화되어 있는 화자는 번거로운 `말'의 세계, `논리'의 세계를 뛰어넘은 상태로 그윽한 미소가 있을 뿐이다. 그 미소는 맑은 물에 떠가는 복숭아꽃의 이미지와 한데 어울려 `비인간(非人間)' 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Autumn is over the long leaves that love us,        

  And over the mice in the barley sheaves;          

  Yellow the leaves of the rowan above us,         

  And yellow the wet wild-strawberry leaves.          

  The hour of the waning of love has beset us,       

  And weary and worn are our sad souls now;           

  Let us part, ere the season of passion forget us,     

  With a kiss and a tear on thy drooping brow.      

 

  가을이 우리를 사랑하는 기다란 잎새 위에, 
  보릿단 속 생쥐 위에도 머뭅니다. 
  머리 위 마가목 잎이 노랗게 물들고 
  이슬 젖은 산딸기 잎새도 노랗습니다.
  사랑이 이울어 가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슬픈 우리 영혼은 지금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헤어집시다.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그대 숙인 이마에 입맞춤과 눈물을 남기며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의 '낙엽은 떨어지고' -

 

   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는  'The Falling of the Leaves(낙엽은 떨어지고)'에서 낙엽을 보며 가을의 애상을 노래한다. 쌀쌀한 날씨 때문에 보릿단 속에 숨은 생쥐, 머리 위로 떨어지는 노란 단풍잎들, 열매는 다 떨어지고 축축한 잎만 남은 산딸기―가을 풍경은 성숙과 함께 불가피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자연의 법칙,  ‘한 번의 입맞춤’(a kiss)과 ‘눈물 한 방울’(a tear)이라고 매몰차게 말해 보지만, ‘그대 숙인 이마’는 그 이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가을날의 낙엽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사랑도 정열도 식어 그 충만함을 잃는 존재가 아닌가.

 

  내려오는 길은 바가지약수터까지 이어지는 다소 지루한 길을 걸어 내려오면 포도밭에 이른다. 비가림포도를 생산한 포도밭은 비닐로 덮인 채 그대로였다. 포도밭을 우측으로 끼고 작은 언덕을 넘으면 정의공주묘 옆의 ‘사천 목씨 제실’이라고 입구에 표기되어 있는 건물 앞에서 방학동길은 끝난다.  

 

 




20구간(왕실묘역길) : 왕실묘역이 자리 잡은 역사와 문화의 길 (1.6㎞, 45분) 

        

 

  20구간은 북한산 둘레길의 원형을 따라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구간이다. 이 구간은 정의공주 묘에서 연산궁묘를 거쳐 우이 우이령길 입구까지이어진다.


  정의공주묘는 방학동길 날머리인 동시에 왕실묘역길 들머리가 된다. 여기서 시작하는 북한산둘레길 20구간은 ‘왕실묘역길’로 명명되었다. 그 이유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성종의 맏아들로 중종반정 때 폐위된 연산군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良孝公 安孟聃과 貞懿公主 墓域)은 정의공주의 남편(세종의 사위)인 양효공 안맹담(安孟聃, 1415~1462))과 정의공주의 묘소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안맹담은 고려시대 귀족이던 죽산 안씨의 후손으로 부친은 가선대부 함길도 도관찰출척사와 함흥부윤이던 안망지(安望之)이며, 어머니는 봉상시 주부 허지신의 따님이다. 안맹담은 세종 10년(1428)에 부마(駙馬:임금의 사위)가 되어 죽성군이 되었고, 세종 14년(1432)에는 연창군에, 세조 3년(1457)에는 원종공신이 되었다. 


  묘는 정의공주와 쌍분으로, 봉분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 앞에 석등과 4기의 문인석이 있다. 묘역 아래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인데 풍화로 일부 파손되었으나, 받침돌의 거북조각과 머릿돌에 새겨진 두마리의 용조각은 매우 뛰어나면서도 정교한 편이다. 비문은 정인지(鄭麟趾)가 지었으며 글씨는 안맹담의 넷째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1982년에 서울시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달이며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이다. 그는 남편인 안맹담이 죽자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은 대한민국 보물 966호로 지정되었다. 그녀는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왕세자였던 문종과 함께 많은 기여를 했는데,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즉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한편, 대로를 건너 반대편에는 연산군 묘역인데, 연산군 묘 외에도 그의 부인인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 신씨(愼氏)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왕족의 무덤은 능, 원, 묘,로 구분을 하는데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세자, 세자빈 또는 왕을 낳은 친아버지, 친어머니가 묻힌 곳을 말하며, 묘는 그 외의 왕족의 무덤을 묘라고 한다.

 

  연산군 묘역을 능이 아닌 묘로 불리는 것은 한때는 왕이었으나 폐위되어 군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연사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그는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로서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연산군(1476∼1506)은 성종의 맏아들로 7살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어 19세에 조선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에 올랐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성종의 승하와 함께 1494년 12월 연산군은  왕위에 올랐다. 

  한편 성종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는 가난한 양반집의 딸로 집안이 궁핍해지자 궁에 들어가 빼어난 미모로 1473년 숙의에 봉해졌고, 원비 공혜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해 연산군을 낳았으나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1482년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성종 시대에 형성된 평화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었으나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기도 하였고, 기강확립을 위한 암행어사 파견, 변방의 여진인을 회유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괴하기도 하고조정의 학문 풍토 개선,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생모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게 되고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하여 크나큰 옥사와 많은 선비를 죽였고, 극단적인 사치와 행략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했으며, 생모 윤를 왕비로 추존하여 회묘(懷墓)를 회릉(懷陵)이라 고친 뒤 성종 능에 함께 제를 지냈다. 성균관을 주색장으로, 원각사를 기생의 집합장소로,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꾸는 등 무수한 실정을 거듭했다.
 
  이런 연유로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서북쪽 섬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병사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교동도(喬桐島)에 안장되었다가 연산군 부인 폐비 신씨가 중종에게 이장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여 1513년 이곳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었다.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과 봉분을 호위하고 있는 문인석의 얼굴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더욱이 길 건너편에 조성된 세종의 셋째 딸 정의공주묘역보다 더 협소한 크기를 보면 그 안타까움은 더 커진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 쓰고, 실록에 그의 시가 무려 130여 편이나 실려 있을 정도로 시를 잘 짓는 임금이었다.  연산군이 아들을 거듭 잃고나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 시 한 편을 소개하면, 

宗社幽靈不念誠(종사유령불염성)     종묘사직 영혼이 내 지성을 생각지 않아
如何忍頑我傷情(여하인완아상정)     어찌 이다지도 내 마음이 상하는지
連年四子離如夢(연년사자이여몽)      해를 이어 네 아들이 꿈 같이 떠나가니
哀淚千行便濯纓(애루천행변탁영)      슬픈 눈물 줄줄 흘러 갓끈을 적시네.

      - 연산군 일기에서 -  

 

 또 어머니 윤씨를 생각하며 지은 시에는 애절한 슬픔의 정한을 읊고 있다. 

昨趨思廟拜慈親(작추사묘배자친)      어제 효사모에 나아가 어머님을 뵙고  
尊爵難收淚滿茵(존작난수루만인)      술잔을 올리며 눈물로 자리를 흠뻑 적셨네
懇追情懷難紀極(간추정회난기극)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건만
英靈應有顧誠眞(영령응유고성진)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

      - 연산군 일기에서 - 

  
  묘소 아래에는 왕실묘역 뿐만 아니라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방학동 은행나무(수령 830년 추정)가 있다. 또 600년 전부터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어 온 원당샘(元堂泉)이 있다. 도봉구는 이곳에 공원을 만들어 연못과 정자를 두어 주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연산군묘역을 오른쪽에 두고 언덕길을 올랐다가 내려서면 2차산 포장도로를 만나는데 강북구와 도봉구의 경계가 된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주차장과 견인차량 보관소가 되고 왕실묘역길은 우이령길 입구에서 끝난다.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우리의 삶과 이야기를 알차게 담은 역사문화길이었다. 

  우리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휘도는 둘레길 20구간을 완주한 셈이다. 우이령길(21구간)은 이보다 먼저 걸은 적이 있었지만 완주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다음날 우이령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총 길이 71.8㎞, 행정구역으로는 서울시(도봉구, 강북구, 성북구, 종로구, 서대문구, 은평구)와 고양시(덕양구), 양주시(장흥면), 의정부시(가능동, 호원동)을 거쳤다.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어 걷는 둘레길은 물길, 흙길, 숲길과 마을길 형태의 산책길 형태에 21가지 테마를 구성한 길이었다. 

 

 

완주를 기뻐하며



  나는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의 소중한 자연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동시에 생태를 보존해야 한다는 자각과 아울러 이곳에 깃든 우리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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