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21구간, 우이령길)
도봉산의 걸출한 오봉을 감상하며 걷는 동서 횡단길
우이령길 입구~교현우이령길 입구까지 왕복(약 13㎞)
*코스 : 우이동탐방지원센터-대전차장애물-안보기념관-오봉전망대-유격장(석굴암 입구)-교현탐방기념센터-유격장-오봉전망대-안보기념관-대전차장애물-우이동탐방지원센터
오늘 일정은 북한산둘레길 마지막 21구간인 우이령 길 걷기 왕복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 코스를 걷고 끝내기에는 양에 차지 않았고, 완주 기념을 알차게 마무리한다는 의미와 완주 기념 축하모임을 갖기로 한 저녁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지막 날 영하의 강추위라니- .
* 우이령 길 입구 한 식당에서 분수를 이용하여 얼음기둥을 만들어 놓았다.
우이령(牛耳嶺) 길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를 연결하는 길로 북쪽의 도봉산과 남쪽의 북한산의 경계가 된다. 우이령이란 이름은 두 산의 능선이 고개를 중심으로 ‘소(牛)’의 ‘귀(耳)처럼’ 죽 늘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이 길이 역사의 전면에 떠오른 것은 한국전쟁부터다. 작은 오솔길에 불과하던 길이 6.25가 터지면서 미군 공병부대에 의해 수송도로로 확대됐다.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 군용트럭이 다니는 길로 확대되었으나 1965년 이후에도 사람들이 다니는 것은 허용되었다. 그러나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민간인 출입이 전면 금지된 이후 우이령길은 전면 통제되고 인적이 끊긴 역사의 단절 상태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4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2009년 7월 탐방 예약제로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길은 통제된 세월 덕분에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계곡과 숲을 함께 느끼며 걸을 수 있는 편안한 길이 되었다. 노약자도 걸을 수 있는 호젓하고 평탄한 길이며 특히 맨발로 걸어도 좋은 흙길이어서 건강을 다지기에도 좋다. 서울 근교에 살림욕을 즐기며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 이만한 데가 없을 정도다.
우이령 길의 들머리는 우이동 계곡이나 교현리 양방향에서 가능하지만 우리는 우이령부터 걷기로 했다. 우이령길 초입의 계곡에는 식당가들이 난립하여 경관이 그리 깔끔하지 못했다.
그러나 왼쪽 북한산 상장 능선의 우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런 모습은 우이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1㎞ 남짓까지 계속되는데 식당가를 지날 때는 아스팔트길이 계속되고 그 위쪽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예약확인 절차를 거쳤다. 이 구간은 자연생태 보존을 위하여 탐방 인원을 하루 1,000명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예약은 탐방 15일전부터 하루 전 10시까지 하며, 인터넷 예약한 뒤 탐방할 때는 예약 확인서와 신분증명서를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65세 이상, 장애인, 외국인은 전화로도 예약이 가능하다. (전화 우이탐방지원센터 02-998-8365 / 교현탐방지원센터 031-855-65590)
우이탐방지원센터 앞에는 북한산 지도와 우이령 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데, 우이령길 안내 표지판이 이채롭다. 우이령 길 곳곳에 동식물의 생태를 알리는 팻말들을 설치하고 있음은 보여주는 것인데, 그만큼 우이령 길이 자연생태에 대한 관심을 크게 쏟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탐방센터를 위쪽의 전경기동대 막사와 북한산 대기측정소를 지나면 흙길이 시작된다. 우이령길 6.8㎞ 중에는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된 4.46㎞의 숲길이 있다.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부터 교현탐방지원센터까지는 흙길이다. 이 길은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맨발로 걷도록 유도하고 있다. 흙길임을 알려주는 “맨발로 느끼는 우이령 숲(林)” 팻말이 보인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채 녹지 않아 걷기에 그리 미끄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하얗게 쌓인 눈길을 밟는 기분이 상쾌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새로운 감흥으로 다가왔다. 겨울 산 트레킹은 색다른 맛이 있다. 길 좌우로 신갈나무와 아까시나무, 리기다소나무, 밤나무, 오리나무, 국수나무, 병꽃나무, 생강나무, 쪽동백, 산초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신갈나무로 전체의 약 60%를 차지한다. 숲의 일부는 인공림이다.
1966년 우이령길에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시한 사방공사 때 심은 아까시나무, 물오리나무 등 2400여 그루가 건강하게 자라 완벽히 숲에 자리 잡았다. 겨울이 아니라면 여기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가 상쾌한 맛을 더해 주리라.
산새도 날아와 /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 홀로 앉은 /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 먼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 붉게 해는 넘어가고, //
황혼과 함께 /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박두진의 <도봉(道峰)> 전문
박두진(朴斗鎭)은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산의 시인이라고 할 만큼 자연 친화를 바탕으로 자연이 가진 근원적인 힘을 통해 밝고 건전한 공동체적 유토피아를 그린 시인이다. 그의 초기 시인<묘지송〉,〈도봉〉,〈향현〉,〈어서 너는 오너라〉, <해>, <청산도〉등이 그런 유에 속한다. 이 작품 역시 자연을 소재로 암담한 현실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외로운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가을밤의 어스름이 아니더라도 강추위와 눈 때문인지 겨울 도봉산 자락은 인적이 없고 산은 적막했다.
길가 쉼터의 의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우이령 정상(330m)까지는 멀리 북한산의 상장능선을 감상하며, 혹은 길가 나무와 숲에 관련된 팻말 앞에 잠시 멈추고 자연공부를 하는 것이 유일한 재미다. 그리 눈을 밟으며 명상하기도 좋고.
정상에 오르니 여러 개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길 양 옆에 설치한 전차장애물이 육중하게 버텨 섰다. 유사시 그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폭파해서 전차가 지나가지 못 하도록 막는다. 한국전쟁 때 양주와 파주지역에서 피난길로 이용했던 우이령 길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설치한 것이다. 우이령 길의 진정 평화로운 모습은 남북대치의 상징물인 이 흉측한 시설물이 철거되는 날 가능할 것이다.
대전차장애물을 벗어난 좌측에 길가에는 조그만 비석이 있다. 이 영문 비석엔 ‘이 도로는 미군 36공병단의 공병도로로 109공병대대와 102공병대대에 의해 1964년~1965년에 건설됐다’ 고 기록되어 있다. 좁은 길을 군사작전의 필요성에 의해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확장한 것으로, 작전도로개통기념비인 셈이다.
우이령 고갯마루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면서 좌측으로 안보체험관이 있다. 1968년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우이령 길이 통제되면서 군 벙커시설로 설치되었던 것을 우이령 길 개방과 함께 보수과정을 거쳐 전시관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초소근무자의 말로는 준비기간이어서 개방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
바로 아래 우이령광장이 있다. 집합장소나 작은 행사장, 헬기착육 등 다목적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조성된 것일 게다. 여기서 고개를 들면 우측 나뭇가지 사이로 바위덩어리의 도봉산 모습이 가깝게 다가온다. 바로 오봉이다. 오르막에서는 좌측으로 북한산 상장능선이 우리를 즐겁게 하더니 이곳에선 도봉산이 화답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 마루턱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팻말을 발견했다. 우이령이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리는 이흥렬(李興烈, 1907-1980) 선생이 작사․작곡한 가곡 <바위고개>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흥렬의 가곡은 ‘한국의 슈베르트’라고도 불릴만큼 그 선율이 아름다운 서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는 고려대, 숙명여대 교수와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지냈는데, ‘바위고개’ 외에도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코스모스를 노래함’ ‘봄이 오면’ 등 가곡과 동요 ‘섬집아기’ 등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다. ‘바위고개’는 ‘바우고개’라는 제묵으로 1934년 발행된 ‘이흥렬 작곡집’속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가곡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젊은 층이 아니라면 가곡 ‘바위고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나 부르기 쉬운 부드러운 멜로디에다 정감어린 가사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음악시간에 이 곡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임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고개 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임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임이 즐겨 즐겨 꺾어 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가곡 '바위고개' 중에서)
이 노래는 단순히 고고 없는 임에대한 그리움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지어진 연대로 볼 때 이 노래의 가사에서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임’은 빼앗긴 조국이며, ‘10여 년간 머슴살이’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서글픈 처지를 의미한다. 또 진달래꽃은 우리 민족의 상징인 무궁화꽃이란 단어를 드러내놓고 사용할 없기에 삼천리강산 어디에나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꽃으로 대치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민족적 울분의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흥렬 선생은 생전에 ‘바위고개는 어디에 있는 고개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늘, “바위고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개이며, 삼천리금수강산 우리의 온 국토가 바위고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혹자는 우이령을 이흥렬 선생이 노래한 그 ‘바위고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떠랴. 이 지역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면 아니라고 막을 도리 또한 없지 않는가.
입 속으로 흥얼거리며 내려오는데 전망대가 보였다. 오봉전망대(五峰展望臺)는 오봉(五峰)을 바라보기에 가장 적당한 곳에 세워져 있다. 오봉은 주봉인 자운봉, 만장봉과 함께 도봉산에 솟아 있는 걸출한 봉우리다.
정상을 향하여 높이 솟은 다섯 개의 바위덩어리, 바우고개가 그럼 오봉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나 혼자만의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니 그 어느 다른 장소에서 본 모습과는 또 다르게 준수하고 의연해 보인다. 그러나 오봉은 나의 상상과는 관계없이 옛날 다섯 명의 총각이 아가씨에게 장가들기 위해 북한산 쪽의 상장능선에서 건너편 도봉산 능선으로 바위던지기 시합을 하여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전설에 불과하지만 옛날 우리네 선인들이 인간 사이에서 보은(報恩)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을 기준으로 남한땅과 북한땅의 몇몇 도시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거리표 또한 흥미롭다.
* 전망대 옆에 우이령사방사업기념비가 있다. 1966년 사방사업개요를 적은 표석이다.
전망대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교현리 방향 우이령 계곡이 시작된다. 오른 쪽 울창한 숲 사이로 보이는 계곡은 물이 없고 말라붙어 바위들 뿐이다. 여름이라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일 테지만 겨울 계곡은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었다.
우이령중간쉼터를 지나면 차량통제소가 나오고, 계곡 쪽으로 유격장이다. 운동장에 시동을 켠 군용 차량들이 몇 대 서있고, 그 옆에 완전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무리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혹한기 훈련을 위해 출장한 군인들처럼 보였다.
석굴암 삼거리, 우측 갈림길에 석굴암 팻말이 보인다. 석굴암은 우측으로 7㎞에 있다는 안내표지로 보아 석굴암은 오봉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이곳도 탐방하고 싶었는데 다음을 기약하고 둘레길을 계속했다. 교현리까지 1km 남았음을 알려주는 안내표지대를 뒤로 하고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부터 우측 계곡은 교현리 계곡 비경에 속하는 구역이다.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높게 올려친 철조망은 우리 스스로 계곡을 아름답게 지키지 못하는 무능 탓이리라. 차단된 울타리 때문에 계곡은 빛 좋은 개살구격이다. 울타리를 따라 계속 내려오면 교현리 쪽 탐방지원센터에 이른다.
드디어 교현리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 우리는 입구의 대로변까지 가지 않고 발길을 되돌려 다시 우이동으로 향했다. 애당초 왕복을 목표로 했던 것이고, 둘레길 완주를 자축하기 위해 예약된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저녁 햇살을 등에지고 걷는 셈이다. 햇살은 비교적 따스한 편이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매섭다. 잠시 장갑에서 손을 빼면 손이 얼어드는 것 같았다.
오전 11시 30분에 우이동 쪽에서 출발하여 왕복하고 다시 출발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30분, 잠시 야외 쉼터에서의 점심식사(간이식사) 시간까지 포함하여 도합 4시간이 걸렸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미아삼거리에 내려 자축 모임을 가졌다.
겨울철 건강다지기를 위한 산행이었지만 북한산둘레길을 완벽하게 완주한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함께 참여한 동료들 - 강상대, 김삼봉, 오용환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우리는 내킨 김에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수도권 일대의 걷기좋은 길을 선별하여 계속 걷기로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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