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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학교 관계

남산 숭의캠퍼스 내의 문화유적

by 혜강(惠江) 2011. 10. 18.

남산 숭의캠퍼스 내의 문화유적    

                   
한경직 목사 기념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16세 방문기념비

경성신사 유적, 안중근 의사 동상, 숭의역사관

 

 

·사진 남상학


   

 

  2011년 10월 16일, 오전 11시 숭의대학교회의 야외예배가 남산캠퍼스 후원에 자리잡고 있는 고(故) 한경직 목사님 기도 동산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예배에는 대학교회 교인 외에도 학원관계자들이 초청되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다. 나는 본 교회에서 2부 예배와 맡은 일을 처리하고 부랴부랴 달려와 다행히 예배시간 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주변에 우거진 숲은 가을 색으로 물들었고, 깔끔하게 정리된 잔디밭에 라운드 테이블을 놓아 야외예배의 자리로서는 최적의 분위기였다. 예배는 찬송가 79장(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에 이어 숭의대학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정준희 목사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그는 <찬란한 나의 미래>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아 영적 상실감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인간은 영적 상실감을 부(富)나 성공, 명예나 인기 등으로 메워보려 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공허와 허탈뿐이었다.  인간의 구원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며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인간의 고독과 허무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소망을 가슴에 품고 안고 끊임없이인내하며 살아갈 때 해결될 수 있다.”    

 


* 고 한경직 목사님 기도동산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숭의대학교회 정준희 목사님 

 

* 찬양으로 교인들을 감동시킨 강찬 전도사의 열창 모습

  

 * 숭의학원 상임이사를 맡고 계신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님이 교회

설립의 배경과 숭의캠퍼스 내의 화유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예배가 끝난 후에는 뷔페식사(영안 협찬). 야외에서 즐기는 맛깔스럽고 푸짐한 식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고, 교제를 나누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다. 뒤이어 복음성가 가수 강찬 전도사의 열창에 의한 감동의 시간이 20분 정도 있었고, 숭의학원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백성학 이사님(영안모자 회장)이 대학교회 설립 배경과 학원 내 문화유산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 중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교회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헌금(70%~90)은 나눔과 구제를 통한 사회 봉사에 두고, 한국교회의 모델 교회 될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 13장 16절)는 말씀을 바탕으로,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명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어 숭의학원 내의 주요 문화유산- 한경직 목사 기념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방문기념비, 일제의 경성신사 유적, 안중근 의사 동상, 민족의 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숭의역사관 등을 차례로 둘러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1. 한경직(韓景職) 목사 기념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선량한 눈을 열어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며,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 기념비에 새긴 한 목사님의 기도이다.
그는 한국교회의 큰 지도자로서 어려운 시절 숭의학원의 이사를 맡은 적이 있다.  
                                                               

 

 2.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방문기념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16세 방문기념비, 세계스카우트 지원재단 명에총재로서 2008년 한국 방문시 실비아 왕비와 함께 숭의초등학교 걸스카웃 대원들과 함께 대활동에 참여하였다.

 

 

 

3. 학교 구내에서 발굴한 일제의 경성신사(京城神社) 유적

 

 

* 표지석 아래의 글 *

" 이곳은 1938년 일제식민지 시절 경성신사 참배터였으나, 1953년 숭의학원(1903년 평양 설립)을 재건 설립하였다."

 

 

 

  남산의 숭의캠퍼스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경성신사가 있던 자리였다. 평양에서 신사 참배에 항거하여 자진 폐교했던 숭의가 해방 후 그들의 신사터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큰 섭리라 할 것이다. 
 

 1903년  평양에 설립된 숭의학교는 일제에 맞서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에 앞장을 섰고, 급기야는  민족정기와 신앙의 절개를 지켜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1938년 자진 폐교(廢校) 조치를 취하는 등 빛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당시 일본은 천황제(天皇制)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하여 국민의식을 통제하는 정책을 폈늕데,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어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 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일본은 공원을 조성한다는 미명하에 일제강점기에 민족혼 말살을 위하여 남산에 위치한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인 서울한양도성, 봉수대, 국사당 등을 철거하고, 침략의 중심기관인 공사관, 통감부, 헌병대사령부와 신사, 관사 및 주거지를 배치하였다. 또한 1897년 일본은 1592년 이래로 일본거류민 주둔지였던 남산 북사면에 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왜성대공원(倭成臺公園)을 설치했고 1898년 숭의여대 일대에 경성 최초의 신사인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 1923년 경성신사로 개칭)등을 설치하여 남산을 일본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왜곡하려 했으며, 1910년에는 회현동 일대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이름으로 30만평에 이르는 공원을 조성하여 한양의 안산으로서의 남산을 파손하기 시작하였다.

 

 

▲숭의학원 자리에 세운 경성신사  

 

 

  또한 각 가정에 신붕(神棚)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그런데 일제의 탄압에 맞서서 폐교 되었던 숭의가 그들이 패망한 뒤 그들이 서울에 세웠던 "경성신사" 자리에 터를 잡고 폐교한 지 15년만에 학교를 다시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요 계획이 아닐 수 없다. 

 

      


  * 일제의 만행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하여 숭의학교 구내에서 발굴된 신사의 유적(석물)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4. 안중근(安重根) 의사 동상 



   한말  독립 운동가(1879~1910)였던 안중근 의사는 남포에 돈의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고, 1909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그의 어록 하나-그는 여순 감옥에서 나라를 걱정하며 한 말이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면 먼저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여 취하고,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면 목숨을 버려야 한다."  

 

 


 

 남산 중턱 숭의학원 내에 건립된 안중근 동상, 안중근 의사 동상은 1959년 남산 도로변 숭의학원 입구에 세워졌으나, 1967년 남산공원 안중근 의사기념관 입구로 이전하였던 인연을 가지고 있다.   

 

   * 안중근 의사 동상 이안 설치 배경을 밝힌 글 
   

         

  "조국이 기울어져 갈 제 정기를 세우신이여

  역사의 파도 위에 산 같이 우뚝한 이여

  해달도 길을 멈추고 다시 굽어보도다."


  - 이은상 시, 손재형 글씨 

 

 

* 동상 후면 벽에 새긴 글들 *

 

 

5. 숭의역사관 설치

 

 

  남산 숭의에는 민족과 함게 걸어온 숭의의 자취를 살필 수 있는 숭의역사관(2006년 10월 개관)이 있다. 숭의여학교의 탄생(설립)과 숭의가 걸어온 100년 역사 발자취, 즉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자진 폐교한 평양시대, 서울에서의 숭의 재건한 이후의 남산시대, 특히 숭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송죽결사대의 활동, 숭의를 빛낸 동문들, 김옥길 기념실, 홍종명 전시실 등으로 꾸며 보는 이로 하여금 숭의의 역사는 곧 우리 민족과 함깨 한 역사요, 빛나는 정신을 소유한 역사임을 공감할 수 있었다. 

 

   "조국을 건지기에 물불도 없이 /  민족의 대열에 앞장을 섰다.

   시새운 채찍 아래 배움도 잃고 /  장할손 너의 절개 지켜왔어라

   아아 자랑홉다 숭의여학교. /  높이자 의를, 의를. 의를 높이자

   그 이름 우리 숭의, 숭의여학교 "    

 

                                        -  <숭의의 노래> 제 2절 가사

 

 

 

 

 

  이제 숭의(崇義)는 숭의유치원, 숭의초등학교, 숭의여자중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숭의여자대학으로 그 세를 넓혀 기독교적 이념에 따라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남산캠퍼스에는 숭의유치원, 숭의초등학교, 숭의여자대학이 있고, 숭의여자중학교와 숭의여자고등학교는 대방동에 최신식 교사를 신축하고 새롭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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